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69화 (69/151)

69화 갱스터 영화도 아니고

서덕현 점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필웅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서덕현 점장이 무슨 말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이제까지 했던 말들을 뒤집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영원 같은 5분이 흘렀다.

윤진이 대답을 재촉했다.

“증인, 대답하세요.”

서덕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진이 다시 대답을 독촉하려는 순간, 서덕현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윤진은 서덕현의 작은 목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서덕현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뭐라구요?”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저도 대피 명령을 내리지 말라는 결정에 관여했습니다.”

윤진이 그것 보라는 듯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덕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윤진은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강무완 사장님의 죄가 덜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는 강무완 사장님이 대피명령을 내리지 말자고 했을 때, 사장님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범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공범이 한 명, 두 명, 아니 열 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겁니다.

제가 죄가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강무완 사장님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덕현은 이제까지 말을 더듬고 자신 없게 말을 이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말의 홍수에 파묻혀 허우적대던 윤진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듯 빤히 서덕현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그녀가 또 무슨 말로 서덕현을 몰아붙일까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상입니다.”

놀랍게도 윤진은 더 이상 신문을 이어가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좋습니다. 양 측, 추가로 주장할 내용 있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윤진이 일어서며 말했다.

“검찰 측은 피고인이 피해자들이 사고에 휘말리게 놔둔 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고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업무상 과실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행위라는 것이죠.

하지만 피고인은 단 한 번도 피해자들을 의도적으로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윤진이 기계적인 몸짓으로 강무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초에 삼영건설의 사장인 피고인이 굳이 백화점에 쇼핑 온 사람들을 죽이려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살인죄는 의도적일 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필웅은 오늘 업무상과실치사죄를 살인죄로 변경한 바 있었다.

공소장에 적힌 죄목이 변경되면, 만일 사실관계를 따졌을 때 변경되기 전의 죄가 인정되더라도 유죄로 판결할 수 없다.

재판은 공소장에 적힌 죄에 대해서만 판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업무상 과실치사와 살인죄는 엄연히 다른 죄이므로, 사건을 살펴보니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로 인한 사망사고라면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따라서, 만일 윤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강무완은 유죄를 받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지.’

필웅은 뭔가 찜찜함을 느끼며 반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고인에게 고의가 없다는 변호인의 주장,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잊으셨습니까? 우리나라의 법은 그런 확실한 고의뿐만이 아니라 ‘미필적 고의’ 또한 고의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재판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필적 고의란, 단순한 실수와 고의의 사이쯤에 있는 개념이었다.

만일 단순히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수다.

만일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확실하게 그런 결과를 의도했다면, 그것은 고의다.

만일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을 예상했고, 그런 결과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설령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방치했다면, 그것은 미필적 고의가 된다.

“즉, 피고인이 피해자들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는 마음먹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백화점의 붕괴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피를 하지 않는다면 모두 죽거나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예견하지 못했을까요?

심지어 증인의 말에 의하면, 피고인은 백화점의 매출을 걱정하면서 일부러 대피를 지연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사고의 발생을 예견했으면서도 사고에 휘말려 사람들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작 돈 몇 푼을 위해서!”

필웅은 말을 하며 점점 스스로의 화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돈, 돈, 돈! 돈 말고는 중요한 게 없는 건가!’

과거의 자신이 들었으면 아이러니할 말이었지만, 필웅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이자, 영전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이 자리에서 옭아매지 못한다면, 필웅으로서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윤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무완이 약간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옆에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윤진은 여전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묵묵하게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필웅은 아까부터 윤진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윤진이 미필적 고의 같은 기초적인 개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윤진은 형사법을 조금만 알아도 주장하지 않을 내용을 주장했다.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 건가.’

필웅은 윤진의 입장이 난처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일단은 재판을 이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재판장은 재판의 종료를 선언했다.

필웅은 주섬주섬 자료를 챙기다가, 아차, 하고 강무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강무완은 이미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법정을 나서는 중이었다. 손등의 점 따위를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제길!’

필웅은 책상을 주먹으로 짧게 탁, 쳤다.

“필웅아.”

모두가 돌아가고, 필웅과 단둘이 남자 윤진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선배.”

윤진이 그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윤진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필웅도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좀….”

윤진이 말하며 앞에 있는 의자 쪽으로 엎드렸다.

“뭐랄까… 저번에 네가 한 말 생각해 봤어.”

“저번에요?”

“응. 강무완을 믿냐는 얘기.”

“아아.”

“잘 모르겠더라고. 난 예전에는 당연히 변호인은 피고인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한 가지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부분이 있다면 그걸 우리가 대변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거지.”

“변호사로서는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점점 회의가 들었어. 네가 제출한 자료들, 오늘의 증인들, 평소 강무완 사장의 태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서 강무완 사장이 결백하다는 걸 믿기 어려워졌거든.

자기가 공범으로 몰릴 걸 뻔히 알면서도 증언을 이어나가는 서덕현 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왠지 뭔가가 머리를 치는 느낌이 들었어. 아, 이 사람이 말하는 건 진실이구나, 하고.

그런데도 난 계속 강무완을 변호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까 재판에 집중하는 게 너무….”

윤진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필웅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너무… 어려웠어.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변호사가 된 건 아니었어. 이제까지는 그래도, 그래. 어쩌면 난 이제까지 나 자신을 속여 오면서 이 일을 했던 거야.”

“선배….”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지마. 이건 다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니까.”

필웅은 뭐라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필웅은 윤진이 지금까지 변호해 온 상대를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런 놈들을 변호하는지 윤진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윤진도 그 가운데서 끝없이 고뇌해 왔던 것이었다.

‘어쩌면 모두가 악당이라고 하는 사람을 잡아넣는 것보다, 모두가 악당이라고 하는 사람을 변호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필웅은 착잡함을 느끼며 어색하게 손을 뻗어 윤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 내세요.”

윤진이 멍하니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그럴게. 나도 이번 사건 끝나면, 인권단체 변호사로 취직할 생각이야.”

“정말요?”

“응. 원래 구체적인 계획이 있던 건 아닌데… 이번 사건 겪으면서 많이 느꼈어. 내가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야 하는 일도 아니라는 걸. 어쩌면 네 덕분일지도 모르지?”

“잘됐네요.”

갑작스런 윤진의 선언에 필웅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윤진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강무완을 대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삼영백화점과 직접 관계된 건 아닌데….”

“뭔데요?”

“강무완이 통화하는 걸 몇 번 듣게 됐어. 아무래도 강무완이 뭔가 다른 범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무슨 통화였는데요?”

“누군가에게 뭔가를 ‘처리’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내용이었어.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데, 왠지 말하는 낌새가 심상치 않았어.”

“처리라구요?”

윤진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정확히 처리가 무슨 의미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어. 나도 참,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람. 갱스터 영화도 아니고. 하하.”

윤진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필웅은 강무완이 능히 누군가를 제거하거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필웅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선배 몸조심해요.”

“응? 갑자기 왜?”

“강무완이란 사람, 선배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이에요.”

“주의할게.”

윤진은 자료를 챙겨 들고 재판정을 떠났다.

필웅은 홀로 남아 묵묵히 고민에 빠졌다.

‘선배가 뭘 들은 거지? 선배도 위험에 빠지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 * *

장경은 사무실에 남아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최근 필웅을 도와 이런저런 사건들에 시간을 쏟다 보니, 다른 업무들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 상황이었다.

김 계장에게 업무를 좀 빼달라고도 해봤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야 임마, 너가 요새 검사님이랑 같이 다닌다고 너가 검사라도 된 줄 아냐? 너가 할 일이라는 게 따로 있는데 검사님 도와드린다고 다 빼주면? 그 일은 누가 하라고?”

“계장님이 좀 하시면 되지 않슴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이걸 확!”

장경은 툴툴대며 그동안 쌓인 보고서들을 억지로 써 내려 가고 있었다.

그때, 후배 형사 하나가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 한 명을 연행해서 데리고 들어왔다.

“뭐냐?”

서류에 파묻혀서 졸음과 싸우고 있던 장경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얘요? 뭐 무슨 인천 쪽에서 유명한 변태 새끼라고 하던데, 최근 근처에서 목격됐다는 제보받고 체포해서 오는 길입니다.”

장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혀를 끌끌 차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이 변태, 느그 구역이 인천이면 인천에서 놀지 뭘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서 이렇게 잡히냐? 엉?”

체포된 남자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태라고 부르지 마십쇼! 전 콜렉터입니다!”

“콜렉터?”

“엄선된 취향과 안목으로 콜렉션을 수집한 것뿐입니다!”

뒤에서 후배 형사가 그의 뒤통수를 빡 하고 내리쳤다.

“미친놈아, 남의 속옷을 수집하는 건 범죄야, 범죄! 남자가 여자 속옷을 사 모은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판에 남의 속옷이나 훔치고 다니던 새끼가….”

장경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런 내용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디…?’

장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남자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야, 이놈 이름 뭐야?”

후배 형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가 번쩍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내 이름은 괴도 인천, 최후의 속옷 콜렉터! 이주남이요!”

장경은 별생각 없이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네가 이주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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