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손 본 적 있어?
필웅은 시연을 만나 강유라로부터 들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삼영이 진우현한테 투자를 했다는 얘기를 자기 입으로 얘기했단 말이야?”
“음.”
“우리가 진우현 사건 때문에 K를 쫓고 있는 걸 뻔히 알텐데, 바보도 아니고 강유라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필웅도 시연이 지적한 부분을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강유라라면 필웅이 진우현의 사건을 수사한 것도, 따라서 K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삼영도 진우현에게 투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필웅이 알게 된다면?
필웅으로서는 당연히 삼영그룹의 어떤 인물이 K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강유라는 그런 허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릴 사람이 아니었다.
‘즉, 강유라는 K가 아니고, K가 누군지도 모른다?’
필웅이 강유라와의 대화에서 느낀 것은, 정말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식의 태도였다.
진우현도 알고 K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알지만,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삼영그룹에 K라는 이니셜을 가진 고위직은 수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 강릉 페리 호텔에서 사체로 발견된 강석훈도 강무완의 먼 친척으로서 이니셜이 K였다.
또, 아직 필웅이 만나본 적 없는 삼영그룹의 회장, 즉 강무완의 아버지도 당연히 강씨였다.
그렇게 거대한 삼영그룹에서 K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 또는 그가 뭘 하고 다니는지 강유라가 모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워낙에 사람의 심리를 잘 갖고 노는 강유라라면,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말처럼 툭 내뱉은 말로 필웅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하는 걸지도 몰랐다.
필웅은 순간 한동안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손! 강유라의 손 본 적 있어?”
“손?”
“그래! K의 손등에는 흰 점이 있잖아. 강유라의 손에도 그런 흰 점이 있다면?”
시연도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워낙 요즘 여러 사건이 휘몰아치다 보니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맞아, 그게 있었지!”
그러나 밝아졌던 시연의 표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근데 난 걔 손은 본 적 없는데.”
“나도….”
“불러서 봐 볼까?”
“내가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고, 전화도 중간에 끊어버렸는데?”
시연은 답답하다는 듯 성을 냈다.
“아니, 평소엔 안 불러도 잘만 불쑥불쑥 나타나더니 얘는 왜 이럴 때는 그림자도 안 비치는 거야!”
필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일단 삼영백화점 건에 집중하자. 강유라를 혹시 만나게 되면 좀 더 파내 볼게.
설령 강유라 본인이 아니라도, 왠지 K가 삼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아.”
* * *
삼영백화점 사건의 제2회 공판기일이 열렸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재판정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강무완과 윤진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필웅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지난번에는 강무완이 삼영백화점의 설계 하자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눈앞에서 그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필웅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10분 후면 재판 시작이었다.
이윽고 강무완과 윤진이 여러 수행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윤진은 필웅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필웅은 문득 K의 손에 있다는 흰 점을 떠올리고, 그런 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강무완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손이 윤진에게 가리거나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빌어먹을, 손 좀 보여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필웅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일단은 곧 재판이 시작하니 재판에 집중하자.’
재판장이 들어오고, 일동은 잠시 기립한 후 자리에 앉았다.
“1998고합1067 건축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 제2회 공판기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선언하자 필웅이 손을 들었다.
“검찰 측, 무슨 일이죠?”
“재판장님, 공소장의 죄목을 변경하고자 합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뭘로 말이죠?”
필웅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해 온 말이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쉽지 않았다.
“검찰 측은….”
필웅은 윤진과 강무완을 돌아보았다. 강무완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윤진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뭘 하려고?’
윤진의 눈빛이 그렇게 묻는 듯했다. 필웅은 고개를 돌렸다.
“업무상 과실치사가 아닌 살인죄를 적용하고자 합니다.”
잠시 재판정에 정적이 흘렀다.
정신을 차린 윤진이 손을 들어 거세게 항의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업무상 과실치사와 살인죄는 엄연히 사실관계가 다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윤진이 손을 들고 외치자 필웅도 지지 않고 외쳤다.
“사실관계는 달라진 바 없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삼영백화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피고인이 삼영백화점의 부실을 알고도 방치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이 과실이든 의도적인 것이든, 사실관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윤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검사 측은 지난번 기일에서 피고인의 과실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의적인 살인이라뇨?”
필웅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건 오늘 검찰 측이 입증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못 했다고 이번에도 못 하라는 법 있습니까?”
재판장이 둘의 말싸움을 잠시 지켜보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좋습니다. 공소장 변경을 허가합니다.”
“재판장님!”
“결국 검찰이 더 입증이 어려운 죄를 적용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검찰 측 설명대로 사실관계 자체에 변함이 없다면, 피고인에게 불리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재판장이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윤진은 돌아서서 강무완과 뭔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강무완은 처음에는 몇 번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윤진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검찰 측 증인 신청이 있군요.”
“그렇습니다.”
“증인을 불러오세요.”
웅성거리는 인파 가운데서 서덕현 점장이 초췌한 모습을 드러냈다.
저번에 필웅이 봤을 때보다도 더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더 심했던 듯했다.
“증인, 선서하세요.”
서덕현은 증인석에 올라 선서를 마치고 멍한 눈빛으로 필웅을 돌아보았다.
“검찰 측 먼저 신문하시죠.”
필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덕현에게 다가갔다.
“증인, 증인의 직위를 말씀해주시죠.”
“삼영백화점 점장입니다.”
필웅은 반응을 보기 위해 강무완 쪽을 돌아보았다.
강무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증인, 삼영백화점 사건 당시의 일정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날 아침에 출근해서 보고를 받았습니다.”
“무슨 보고를 받았지요?”
“백화점에… 이상이 있다는….”
“그렇군요. 그래서 증인은 삼영백화점의 시공을 맡은 삼영건설에 연락했겠군요?”
“예.”
“누가 왔지요?”
서덕현은 이리저리 불안하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증인, 집중하세요. 그날 삼영건설에서 온 것은 누굽니까?”
서덕현은 덜덜 떨며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손톱이 잘 뜯어지지 않자 숫제 손가락을 씹어 먹을 기세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서덕현의 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필웅은 인상을 찌푸렸다.
“증인, 뭐하시는 겁니까? 그만두세요!”
“저는… 저는….”
서덕현은 여전히 온몸이 부서져라 떨고 있었다. 뭔가 간신히 입을 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강무완 사장이 독사 같은 눈빛으로 서덕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서덕현은 그 눈에 마주칠 때마다 마치 그 눈에서 뭔가가 나와 그를 맞추기라도 하는 듯 덜덜 떨었다.
‘완전 뱀 앞의 생쥐 꼴이잖아?’
서덕현은 눈에 띄게 강무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필웅이 만나 본 강무완의 됨됨이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웅도 그가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것으로 서덕현을 이렇게까지 겁에 질리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증인, 진정하세요. 누구도 증인을 다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필웅이 서덕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강하게 말했다. 필웅은 동시에 몸을 돌려 강무완의 시선으로부터 서덕현을 가려 주었다.
잠시 후 조금 안정을 찾은 서덕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그날 강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강무완 사장이요?”
“예.”
“와서 뭘 했지요?”
“회의…를 했습니다.”
필웅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무슨 내용이었죠?”
“백화점이 무너지고 있다….”
재판장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수군거리는 소리마저 멈춘 채 서덕현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필웅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무완 사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서덕현이 공허한 눈빛으로 강무완을 슬쩍 바라보았다. 필웅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그가 먼저 강무완을 바라보자 살짝 놀랐다.
서덕현은 자포자기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매출이 걱정되니… 최대한 버티라고 했습니다.”
재판정 안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서덕현의 말에도 아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필웅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재판정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어났어야 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매출? 매출이라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있는데 옷 팔 걸 신경 썼단 말이야?’
‘세상에….’
정적이 깨진 다음, 낮은 수군거림이 쥐 떼처럼 재판정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필웅도 정신을 차리고 재차 신문을 이어갔다.
“매출이 걱정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대피 명령을 내릴 생각도 없었단 말입니까?”
점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피 명령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피를 시키면 혼란이 가중될 것 같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강무완 사장님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백화점이 무너지고 있다는 상황을 알면서도, 대피를 시키면 혼란이 더 가중되니까 냅두자고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서덕현은 대답하며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잘 알겠습니다.”
필웅은 신문을 마치고 차갑게 윤진과 강무완을 돌아보았다.
“피고인은 최초에 이야기한 것과 달리 백화점에 갔을 뿐만 아니라, 백화점의 대피를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검찰 측은 추가 증거로 당일 백화점 입구에서 촬영된 강무완 사장과 그 수행원의 사진을 제출하겠습니다!”
필웅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윤진이 신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은 왠지 오늘따라 윤진의 표정에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증인, 증인은 삼영백화점의 점장이지요?”
“그렇습니다.”
“백화점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위에 있는 건 누구입니까?”
“점장이죠.”
“그렇다면, 증인은 삼영백화점 방문객의 안전을 위해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증인.”
윤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증인은 피고인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죠?
백화점의 고객들을 피신시키고, 대피시켜야 할 점장은 마치 구경꾼처럼 이야기하고 있군요.
솔직히 말하세요. 그날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에 증인도 관여한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