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네가 좋을 대로 생각해
강유라가 약속을 지킬지 알아보는 데는 3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강유라가 다녀가고 바로 다음 날, 필웅과 시연에게 복직명령이 떨어졌다.
필웅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강씨 일가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 것인지 착잡하기도 했다.
필웅은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장경에게 전화해 서덕현 점장의 안위를 물었다.
“잘 지키고 있습니까? 특이사항 없죠?”
“물론임다. 쥐새끼 한 마리도 들락날락 못하게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음… 가끔 살아 있는지 확인도 해주세요.”
“식사 때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복직하셨나 보네요?”
“예. 뭐 어떻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필웅은 장경에게 강유라가 다녀간 일을 말해야 하나 잠시 주저했다. 물론 언젠가는 말하긴 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 바로 말해도 되는지 조금 망설여졌다.
“음… 다음에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장경은 순순히 납득하고 알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장경과의 통화가 끝나자 시연이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왔다.
“너도 복직한 거 맞지?”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강무완이 우리 정직시킨 거 아니었어? 근데 강무완은 아직도 밖에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잖아?”
필웅은 한숨을 쉬고는 어제 강유라가 찾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한테? 단둘이?”
시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필웅을 쏘아보았다. 필웅이 질색을 하며 말했다.
“단둘이 있었다고 내가 걔랑 뭐가 되기라도 할 것 같아? 내가 제일 혐오하는 인간이라고, 그 여자는.”
“강유라 예쁘잖아.”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거냐 너는?”
시연은 헤헤, 하고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강유라가 자기 아빠를 쳐내는 조건으로 다시 우릴 복직시켜줬다? 강무완이 이 사실을 모를까?”
“당연히 아빠 몰래 꾸민 일이겠지.”
“그럼 다시 강무완이 손을 쓰면?”
“그렇게 되지는 않게 강유라가 막아 준다고 했어. 아마 우리는 상상도 못 할 그룹 내 암투가 벌어지고 있겠지.”
“뭔가 엄청난데….”
“그러게. 하지만 이제 그쪽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아.”
필웅은 말하며 다시 갖고 온 강무완 사건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다혜 씨가 이 사건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어. 너무 위험해 보여서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여전히 막무가내네.”
“어쩔 수 없지. 일단 지금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반인들도 알아야, 다시는 갑자기 정직당하거나 사건에서 밀려나지 않을 테니까.”
필웅은 마지못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도 역시 이 사건에 대해 다혜가 기사를 쓰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비록 강유라가 그들을 복직시켜 주기는 했지만, 강무완으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강유라는 스스로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강무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 같았다.
납치, 감금, 고문, 심지어는 살인조차도 눈 깜짝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뱀 같은 인물이었다.
주 계장이 사무실로 돌아와 반갑게 필웅에게 인사했다.
“검사님, 복직을 축하드립니다.”
“계장님! 저 없는 사이에 별일 없었죠?”
“예, 그런데….”
갑자기 주 계장이 조금 어두워졌다.
“방금 이규필 차장님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잠깐 찾아오라고 하십니다.”
“지금요?”
“예.”
“그러죠, 뭐.”
필웅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연이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이미 복직까지 된 마당에 뭘 어쩌겠어.”
시연이 잠시 주 계장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들을 수 없도록 사무실 밖으로 필웅을 불러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규필 차장님, 삼영 쪽에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닐까?”
사실 필웅도 어느 정도 그런 의심을 하고는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의심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다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다만, 삼영에서도 강유라 쪽인지 강무완 쪽인지는 불확실해.”
“그렇네….”
“이번에 한 번 알아봐야지. 일단 사무실에 돌아가 있어.”
“응. 끝나면 연락 줘.”
필웅은 시연을 보내고 긴장된 발걸음으로 이규필 차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직 축하해, 조검.”
이규필 차장이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필웅을 반겼다.
필웅도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그래. 정직됐던 기간동안 마음고생 많았겠어.”
“아닙니다. 별로….”
필웅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규필 차장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강무완 사장 사건 다시 맡게 됐다지?”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한 건가?”
필웅이 고개를 들어 이규필 차장을 마주 보았다.
필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치미 떼지 말고. 자네나 나나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다 알고 있잖아.”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군.’
이규필 차장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나오자 필웅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내를 다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김진범이 진술을 번복해서 가혹행위가 없었던 것으로 판명 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외관상 이유야 그렇지.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진술을 번복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이규필 차장이 말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저야 애초에 그 인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니, 대답을 드릴 수 없겠군요.”
“그래?”
“그렇습니다.”
“그게 자네의 대답이라 이거지. 좋아.”
이규필 차장이 헛웃음을 짓고는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들 인사고과는 내가 다 쥐고 있는 거, 잘 알고 있겠지? 강무완 사장 사건 눈에 띄지 않게 잘 처리해. 안 그러면 너나 정시연이나 듣도 보도 못한 어디 섬에 딸려있는 지청에서 검사일 마감하게 될 거야.”
필웅은 마음 놓고 적대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규필 차장이 점점 고마워졌다.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차장님, 삼영백화점 관련해서 이미 언론에서 꼬리를 물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래서?”
“그 사건을 처리하던 검사들이 처음에는 정직을 당했다가, 복직을 했더니 다시 시골로 전출을 당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말하고 싶은 게 뭐야?”
필웅이 이규필 차장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이 사건 끝날 때까지만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끝나고 나서는 섬에 가서 미역이든 굴이든 딸 테니까요.”
“내가 왜 그걸 기다려 줘야 하지?”
“지금 차장님이 하신 말, 다 녹음해 뒀으니까요. 사실은 이것뿐만이 아니라 은근슬쩍 AG케미컬을 수사하라고 등 떠민 것도 다 녹음해 두었습니다.
아마 그것도 제가 AG케미컬에 정신이 팔려서 삼영산업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신 거겠지만요.”
이규필 차장은 번개같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필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는 차장님 방이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걸 설치해 뒀겠습니까? 당연히 녹음기를 갖고 들어왔지.”
“너 이 새끼…!”
“제가 뭐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필웅은 짐짓 여유 있는 척 이규필을 도발하고 있었지만, 사실 모아 쥔 두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물론 이규필 차장의 발언들은 분명히 문제를 삼을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삼영그룹과 직접적인 연줄을 갖고 있다면, 삼영그룹의 힘으로 검사의 스캔들 따위 얼마든지 덮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필웅이 쥐고 있는 패는 생각보다 강력하지 않거나, 혹은 순간 강력할지 몰라도 오래 가지 않을 패였다.
필웅은 단지 잠시만이라도 이규필을 묶어둘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제발! 제발 넘어와라!’
일단 이규필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규필이 배짱을 부리기 시작하면 필웅으로서는 더 이상 꺼내 놓을 카드가 없었다.
이규필이 당장 자신의 커리어가 사소하게라도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규필은 여전히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네 뒤를 봐주는 건 누구지?”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필웅은 하마터면 아무 생각 없이 강유라라고 대답하려다가, 전면에 자신이 드러나면 안 된다던 강유라의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이규필은 고민스러운 듯 입술을 비죽였다.
‘아마도 나를 복직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게 설마 그 똑같은 삼영그룹의 강유라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 말이야.’
“알았어. 나가 봐.”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 거라고 생각해도 됩니까?”
“네가 좋을 대로 생각해.”
이규필 차장은 대답하고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잠이라도 들 것처럼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
“감사합니다.”
필웅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호랑이굴 같은 이규필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필웅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 강무완과의 결전만이 남아 있었다.
필웅은 다시 증거들을 점검했다. 물론, 정직 이후로 새로 추가된 증거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사고 당일 강무완 사장을 수행했던 서덕현 점장의 증언이 남아 있었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강무완 사장이 사고 당일 삼영백화점의 붕괴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 사실이 재판에 전환점을 갖고 올 것이었다.
‘좋아, 서덕현을 증인으로 신청하고, 사고 당일 강무완이 보고를 받았으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걸 입증하면 승산이 있어!’
필웅은 간만에 사건이 잘 풀려나가는 기분에 상쾌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에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K.
아직도 K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그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K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지 못한 탓이 컸다.
‘이번 사건이 정리되면 이제 정말 K에게 집중해야겠어.’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강유라야.”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건 보는 건 아니잖아?”
“후, 무슨 일이야?”
“복직한 후에 짖어대는 개들은 없어?”
복직 후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없냐는 뜻인 듯했다.
“딱히 없어. 김진범은 어떻게 구슬린 거야?”
“김진범? 아, 그 진우현 딱까리? 원래 진우현 패거리한테 우리가 투자한 게 꽤 되거든.”
필웅은 인상을 쓰며 전화기를 바로 고쳐 쥐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우현한테 투자를 했다고? 진우현은 AG케미컬한테만 돈을 받아온 게 아니었나?”
“진우현이 굴린 돈이 얼만데 AG한테만 돈을 받았겠어? 우리도 진우현 회사에 지분을 좀 갖고 있거든.”
그 후로 강유라는 뭔가를 더 말했지만, 필웅은 충격에 빠져 전화기 너머에서 계속 강유라가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전화를 끊었다.
필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강’씨 역시 이니셜이 K로 시작하는 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