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
필웅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서 문을 열고는 바깥을 살펴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앉아서 그런 필웅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강유라가 물었다.
필웅이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 근처에 개도 없는데 어디서 개소리가 나길래.”
“뭐? 이 건방진…!”
“진정해. 근처에 혹시 엿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지 살펴본 거야.”
강유라는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는 데서 왠지 모를 쾌감을 느끼며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강유라가 그녀답지 않게 눈을 약간 떨구며 말했다.
“말했잖아, 같이 하자고.”
“내가 한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나는 너희 아버지를 집어넣겠다고 했어.”
“똑똑히 들었어.”
“허, 참.”
필웅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워낙에 온갖 심리전에 능한 강유라였고, 그녀에게 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갑자기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고 시도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마 내가 너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필웅이 미심쩍은 눈으로 팔짱을 단단히 끼며 물었다.
강유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일 단박에 OK를 했다면 나는 너를 머저리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았을 거야.”
“첫 번째 시험은 통과한 모양이네.”
“응. 축하해.”
“축하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군.”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영애한테 파트너가 될 기본적인 자격을 인정받은 거야. 마음껏 기뻐해도 좋아.”
“춤이라도 출까?”
“그건 내가 보고 싶지 않아서 안 되겠네.”
“유감이다.”
강유라는 한숨을 쉬며 똑같이 팔짱을 꼈다.
“할 얘기 다 했으면 본론으로 넘어가지. 말했지만 나는 너를 도와 우리 아버지를 잡아넣고 싶어.”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왜 내가 너를 믿어야 하지?”
“일단 첫 번째는, 너는 그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필웅은 강유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유라의 눈은 완벽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유라는 당연히 필웅의 현재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어설픈 블러핑은 통하지 않는다 이건가.’
필웅은 내보일 만한 패가 없었다.
사실상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의 제안에는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겠지만, 필웅으로서는 일단 들어는 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필웅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이유가 있나 보군?”
“물론이야. 좀 더 구체적인 이유들이지.”
필웅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뭔지 들어보고 싶은데.”
강유라는 잠시 잔을 흔들며 안에 든 보리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아버지가 실각하면 내가 삼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지. 뭐, 물론 몇 명 더 처리해야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권좌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달까?”
“그게 왜 내가 너를 도와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 전혀 모르겠군.”
강유라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 나는 너를 설득하기 위한 이유들을 주워섬기고 있는 게 아니야. 나의 제안이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왜 그게 네 제안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거지?”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 아무런 근거도, 목적도 없다면, 네가 그걸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웅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지금 너의 이 냄새나고 좁은 자취방에 친히 행차해서 우리 아버지를 걷어내자고 제안하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하면 그걸 믿을 수 있겠냐고?”
“이해했어. 하지만 네 제안이 말이 된다는 것과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별개라는 사실도 알아뒀으면 좋겠네.”
강유라는 피식 웃었다.
“말이 되는 제안이고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데 네가 그걸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마지막 이유는 다행히도 네가 좀 더 마음에 들어 할 이유야.”
“들어보지.”
“나는 사람을 죽이는 사업을 하고 싶지 않아.”
필웅은 잠시 정말로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어… 뭐라고?”
“내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나?”
“아니,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강유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왜 말이 안 되지?”
“정말로 네 악행들을 내가 하나하나 복기해 주기를 바라나? 내가 기억하는 것들만 수십 가지는 될 것 같은데,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강유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난 사람을 죽인 적은 없는데?”
“이런 미친… 이시원 씨를 해고한 건 뭐야?”
“내가 그랬어?”
“네가 묵인하고, 또 그걸 수사하는 것도 방해하려고 했잖아.”
“설령 그렇다고 쳐도 내가 이시원을 죽이려고 한 건 아니잖아?”
필웅이 벌컥 화를 냈다.
“꼭 사람을 찔러 죽여야 죽인 거야?!”
강유라는 여전히 왜 필웅이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필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여자는 완전히 사이코패스야. 납득시킬 자신이 없다….’
“뭐 좋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나나 시연이, 박 형사님, 서 기자님도 죽이겠다고 협박했잖아?”
“난 죽이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납치 같은 애매한 건 선호하지 않는다며?”
“납치 안 하면 죽여야 되나? 조필웅 너무 극단적인 거 아냐?”
강유라는 뭐가 재밌는지 깔깔 웃기까지 했다. 필웅은 그럼 대체 뭘 하려고 한 거냐며 물으려다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으로 내몬다고 해도 자기가 죽이지는 않았다며 어리둥절해 할 여자야.’
필웅은 강유라의 도덕 관념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너는 사람을 멀쩡한 직장에서 잘라 버리고,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 같군. 그러면 죽이는 건 왜 안 된다는 거야?”
“사회적인 죽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죽이는 건 진짜로 죽이는 거잖아?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쁘다는 걸 굳이 내가 설명해 줘야 하나?”
필웅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유라를 보며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어졌다.
‘적어도 사람을 진짜로 죽이는 게 나쁘다는 건 알고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어야 하나….’
필웅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점점 강유라를 이해할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든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무서웠다.
필웅은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잠깐만.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된다고?”
“그래.”
“그렇다면 강무완 사장이 사람을 죽이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당연한 걸 얼마나 더 물어야 그만둘 거지?”
필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물었다.
“강무완이 삼영백화점의 설계 하자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사실 알고 있는 거지?”
강유라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면 네가 나와서 그 사실을 증언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강유라는 가슴을 쳤다.
“아니, 이 멍청아! 내가 공개된 자리에서 그걸 스스로 인정해 버리면? 엉? 내가 이 그룹을 승계할 수 있겠어? 그러면 내가 배신자가 되어 버리는데?”
“네 손을 더럽히지 않는 형태로 강무완 사장을 잡아넣고 싶다?”
“바로 그거야.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럼 넌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강유라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뭘 원하는데?”
“일단 나와 시연이를 복직시켜줘.”
“딜.”
“그리고 이 사건에 관여하는 입김이 없게 해줘.”
강유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왜?”
“일단 내가 이 사건에 역방향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게 걸리면 내가 나와서 증언한 것과 똑같은 효과가 발생하니까. 넌 도대체 머리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필웅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유라는 강무완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나서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돼. 그리고 간접적으로 나서는 게 들켜서도 안 된다 이거로군.’
필웅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복직시켜 주는 것 자체로 네가 손을 쓴 사실이 발견되는 것 아닌가?”
“그 정도까지는 괜찮아. 너 같은 평검사 몇 명 쥐락펴락하는 것 정도는 힘을 쓰는 축에도 못 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평검사 몇 명 입 막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니, 도대체가….’
필웅은 도대체 이 나라의 사법체계가 어디까지 재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뭐, 좋아. 이해했다고 치지. 결국 나와 시연이를 복직시켜 주는 것 정도가 네 도움의 한계치라는 말이로군.”
강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뭐 가끔 우리 회사 제품 정도는 보내줄 수도 있어. 아, 드레스 좋아하니?”
“그딴 건 필요 없어. 그러면 조건 하나만 더 추가하지.”
“말했듯이 관여하는 입김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어.”
“나도 알아. 내 조건은 이거야. 네가 앞으로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강유라가 상처받았다는 듯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필웅이는 내가 싫은 거야?”
“재수 없으니까 다시는 그딴 표정 짓지 마.”
“큭큭. 나도 너희들의 상판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좋아. 그것도 딜이야.”
강유라는 말하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아,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 아프네. 다음에는 의자 좀 사놔라.”
“다음 같은 건 없다고 말했을 텐데.”
“참, 그렇지. 물론 나도 이런 우중충한 곳 다시 올 생각 없어. 안녕~”
강유라는 문을 열고서는 나가려다가 잠시 멈칫하고 뒤돌아서서 물었다.
“저기… 비 많이 오는데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
“당장 꺼져.”
필웅이 으르렁댔다. 강유라는 깔깔대고는 우산을 집어 들었다.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복직은 3일 안에 이뤄질 거야.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
“동감이다.”
필웅이 툴툴대자 강유라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 사건 끝나면 앞으로 다른 삼영그룹 일에도 주둥이 들이대지 말라는 소리였어.”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내가 수사하고 싶은 걸 막을 수는 없어. 아, 나를 죽이지는 못할 테니 날 막을 방법은 없겠군.”
강유라가 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해. 조필웅은.”
“뭐?”
“아무것도 아냐. 나 간다. 삼영건설 내가 이어받게 되면 이놈의 빌어먹을 동네부터 재건축해 버려야겠어.”
강유라는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이것 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정말 알 수 없는 밤이로군….’
비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필웅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며 정말 강유라가 약속을 지킬지 궁금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