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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63화 (63/151)

63화 단 한 놈도 도망치게 두지 않아

필웅은 새로운 증인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들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경솔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은 후에 빼도 박도 못 하게 기소를 했어야 하는 건데, 감정적으로 일을 너무 서둘렀어’

만일 그가 좀 더 다혜나 장경 등과 상의해서 새로운 증거나 증인이 있는지를 알아본 후 행동에 나섰다면, 너무 미리 강무완을 자극하는 일 같은 건 없었을 터였다.

그러면 그나 시연이 정직을 당하는 불의의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 물론 시간문제였겠지만 말이지.’

필웅은 일단은 과거의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필웅은 집에 있다가 방금 막 장경의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혜가 보여 준 사진에 있던 강무완의 수행원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필웅은 가슴이 뛰었다. 일단 지금 강무완의 수행원을 자신이 심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새로운 단서가 발견된 것이다.

“검사님, 오셨습니까?”

장경이 도착한 필웅을 반갑게 맞았다.

“예, 형사님.”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장경은 말하며 파일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건?”

“그날 근무하던 백화점 직원 중 사망자, 부상자 및 실종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명단이고, 이 중 생존자들 몇 명과 연락해서 조사를 해 봤습니다.”

장경이 건네준 것은 백화점의 직원 명단이었다. 각 직원들의 이름 옆에 ‘실종’, ‘사망’, ‘입원 중’ 등의 표시가 되어 있고, 표시가 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 누구인 것 같습니까?”

“교차 대조를 해보니, 이 중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은 단 한 사람입니다.”

장경이 말하며 명단의 이름 중 하나를 짚었다.

백화점의 점장인 ‘서덕현’이라는 임원이었다.

“어째서 연락이 되지 않는 거죠?”

장경이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등록된 전화번호로 전화도 해 봤는데 받질 않더라구요. 왠지 모르게 주소지는 써 있지를 않구요.”

“가족은요?”

“그게, 몇 년 전 아내와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애는 아내가 키우는 것 같더라구요.”

필웅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문득 강석훈이 갑자기 실종되고 사망한 것을 발견한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의문사라도 하면 어떡하죠?”

장경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최대한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동선을 확인 중입니다. 심지어 이 사람, 사건 당일에 관할서에서 조사도 받았던 것 같슴다.”

“관할서에서 조사를 받았다구요? 그런데 그냥 풀어준 겁니까?”

필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뭐 삼영건설이나 삼영백화점의 임직원들이 기소를 당한 상황도 아니었고, 워낙 경황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 당일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 후로 연락 두절이 된 거군요.”

“그런 것 같슴다.”

필웅은 아무리 생각해도 점장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실종되어 버린 것이 영 꺼림칙했다. 잘못하다간 누군가에 의해 입막음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빨리 찾아봐야겠군요.”

“예, 관할서랑 협조해서 자료를 한 번 받아보겠슴다.”

“알겠습니다. 전 사건 현장에 한 번 가 보겠습니다.”

장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건 현장에를요? 왜요?”

“왠지 거기에 뭔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경은 납득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전 일단 서덕현이를 발견하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수고해 주세요.”

필웅은 대답하고는 경찰서를 나와 삼영백화점으로 향했다.

* * *

삼영백화점의 붕괴 현장은 오늘도 분주했다.

사고 이후로 매일같이 구조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고, 무너진 잔해들을 치우는 작업도 병행되고 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간혹 기적적으로 생존자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드문 일이었다.

분향소와는 다른 슬픔의 냉기가 현장을 감돌고 있었다.

필웅은 쓰라린 시점으로 현장을 돌아보다가, 구조대에서 쳐 놓은 안전선 바깥에서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쥐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필웅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구조 작업 현장 근처에는 민간인이 출입하시면 안 되는데”

아주머니가 고개를 돌려 슬픈 얼굴로 물었다.

“누구시죠?”

“아, 죄송합니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검사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수사할 게 좀 있어서요.”

엄밀히는 정직당한 상태여서 자신의 사건 수사를 할 이유도 권한도 없었지만 필웅은 일단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가족이나 친지분이 사고에 휘말리신 건가요?”

“예. 사실 그날 친구랑 쇼핑을 왔었어요. 아들 옷을 사 가야겠다며 무척 들떠 있었는데 저는 잠깐 일이 있어서 이 앞에 나와 있었거든요.”

필웅은 잠시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에게 좀 더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말 유감이군요. 친구분은 백화점이 무너질 때 안에 계셨던 겁니까?”

“예….”

아주머니는 말하며 지금도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눈물을 훔쳤다.

“저는 그때 백화점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입구에서 웬 양복 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나오더니….”

필웅의 귀에 전기가 찌릿 흐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 잠시만요. 양복 입은 사람들이라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필웅은 깜짝 놀라 잠시 아주머니의 말을 끊고 품 안에 계속 갖고 다니던 다혜의 자료 사진을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예, 맞아요! 이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이쯤에 서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머니는 말하며 사진에서는 각도상 보이지 않는 구석을 가리켰다.

“그랬군요…. 혹시 백화점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남자, 기억나십니까?”

“예, 맞아요. 한 사람이 조금 떨어져서 바쁘게 뛰어나오고 있었어요.”

필웅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혹시 그 사람들이 뭔가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아주머니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대화를 했다고 해도 들을 만큼 가까이 있지도 않았구요. 하지만 뭔가 굉장히 급해 보였어요.”

“급해 보였다?”

“백화점을 흘긋흘긋 뒤돌아보면서도 양복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걸어왔어요. 그래요, 마치 곧 백화점이 무너지리란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도망치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너무 이상해서 기억하고 있는 거죠.”

“그랬군요”

필웅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잠시 이 아주머니를 증인으로 데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자들이 급하게 걷는 것을 봤다는 것은 아주머니의 느낌일 뿐일 수도 있었고 급하게 걸었다는 것이 곧 백화점이 붕괴할 것을 알았다는 의미로 연결될 수는 없었다.

필웅은 단순한 정황이 아닌 더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애매한 정황 증거는 오히려 반격의 여지를 줄 뿐이야.’

상대방 변호인인 윤진은 사소한 증거의 허점을 찾아내서 그것으로 역전의 공격을 펼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괜한 트집거리를 줘서는 안 돼. 이걸로는 부족해….

하지만 어쨌든 이 인간들이 급하게 삼영백화점에서 빠져나왔다는 게 사실이라면, 강무완이 미리 사고를 알고 있었을 거라는 내 예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군.’

필웅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혹시 몰라서 연락처를 하나 받아두고는 몸을 돌려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필웅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에구, 영전이 그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필웅은 잠시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있다가 간신히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 이따금 눈물을 훔치며 하염없이 사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필웅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영전이라고…?”

입조차 그의 것이 아닌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는 수만 가지 생각으로 하얗게 번뜩였지만, 몸은 완전히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예?”

“영전이라고 하셨습니까?”

아주머니가 손수건으로 코를 한 번 횅, 풀더니 대답했다.

“예. 제 친구 아들 이름이 나영전이었거든요.”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에구머니나!”

아주머니가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필웅은 그녀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섰다.

“왜 그러세요, 검사님? 혹시 제 친구를 아시나요…?”

필웅은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그저 갑자기 좀 현기증이 나서…”

“이런,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필웅은 그녀에게 물었다.

“마지막에, 마지막에 어머니, 아니 영전이 어머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아주머니는 잠시 그런 걸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음,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영전이 오랜만에 새 옷을 사줘야겠다며 좋아했어요. 오랫동안 새 옷을 못 사줬다구요.”

필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 나영전의 기억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 * *

나영전은 어머니에게 보채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괜한 심술이었다.

“애들 다 마이키 티셔츠 입는단 말이야!”

“다음에 사 줄게, 다른 옷도 아직 많이 있잖니.”

“나는 마이키 입고 싶다고!”

영전은 그 날따라 어머니에게 무척이나 칭얼댔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부업을 하느라 최근 통 영전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알았어. 엄마가 이따 일 일찍 끝나면 마이키 티셔츠 사다 줄게.”

“정말이지?”

“그럼.”

“약속이야!”

영전은 활짝 웃으며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어머니는….

“검사님…?”

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필웅은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뭔가 축축한 것이 눈에서 맺혀 흐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좀 더워서 땀이 흐르는 것 같네요.”

필웅은 재빨리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소매로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이상하게 그를 쳐다보는 그녀를 두고 돌아서면서, 필웅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증거만… 증거만 확보되면, 단 한 놈도 무죄를 받아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어!’

* * *

장경은 자료를 얻기 위해 관할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 점장을 조사했으니 뭐라도 있겄지.’

그러나 관할서의 태도는 도착하자마자 장경을 실망하게 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관할서의 경찰은 자리에 앉아 장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관할서도 아니면서 그 자료가 왜 필요하시냐구요?”

장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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