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60화 (60/151)

60화 그게 회사라는 거니까요

재판장이 건조한 목소리로 윤진에게 말했다.

“부인하는 이유에 대한 의견 진술해 주세요.”

윤진은 목을 가다듬고 답변을 시작했다.

“먼저, 건축법 위반이 있었다고 하려면 설계상 하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피고인의 고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살펴본 검찰 측의 공소장에 따르면 피고인이 설계상 하자를 인지하고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필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잠깐만요. 피고인은 삼영건설의 최종 결재권자인데, 설계도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피고인이 삼영건설의 최종 결재권자인 것은 맞지만, 피고인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문서를 결재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는 프로젝트의 팀장이 사실상의 최종 결재를 하지요. 이건 회사의 관행입니다. 삼영백화점 건축 당시의 보고서들을 보면 대표자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을텐데요?”

필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윤진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프로젝트가 점점 구체화되고 진행되어 갈수록 강무완 사장의 이름이 서류들에서 나타나는 빈도는 점점 낮아졌다. 아무래도 현장의 실무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사장은 꼭 필요한 중요한 때에만 나타나는 듯했다.

윤진이 말을 이어갔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검찰이 제대로 조사를 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검찰은 단순히 삼영백화점의 사건이 언론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무리하게 삼영건설의 대표자를 기소한 것 아닙니까? 애초에 설계상 하자가 있었는지 여부와 피고인이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별개입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윤진은 변론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검찰의 조사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입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의 구체적인 사항까지 대표이사가 전부 다 알아야 한다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요?”

윤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검찰 측, 이에 대한 의견 진술해 주세요.”

필웅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 부분에 대한 증거가 아직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피고인은 자신이 회사의 모든 업무를 결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와 같이 중대한 설계상의 하자를 대표이사가 몰랐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검찰 측은 향후의 기일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한 추가 증거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인 추가 증거 확보 계획이 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재판장은 흥미를 잃은 듯 다음 기일에 제출될 증거를 살펴보겠다며 기일을 종결했다.

재판이 끝나고 강무완은 먼저 일어서 수행원들과 함께 돌아갔다.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윤진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필웅에게 다가왔다.

“저기…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

필웅이 그녀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각자 할 일을 하는 거죠.”

“내가 좀 너무 나갔나 싶어서….”

“그럴 수도 있죠.”

필웅은 이렇게 대답하며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에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선배 개인한테 하나만 물어볼게요.”

윤진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응, 물어봐. 뭔데?”

“선배는 정말 강무완 사장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윤진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나가 재판정은 둘밖에 없었고, 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다.

윤진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요. 그냥 선배 개인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예요.”

윤진은 그 후로도 한참 말이 없었다.

필웅은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난 잘 모르겠어.”

필웅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모르겠다구요?”

“응.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어.”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믿지도 않으면서 변호를 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윤진도 한숨을 쉬며 필웅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필웅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윤진은 어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렵지. 어려운데 뭔가 변호사로서의 나는 강무완 사장을 믿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알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해.”

윤진은 양팔을 책상에 올리고 머리를 괴었다. 그녀가 이번엔 필웅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의외의 질문에 필웅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전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너희도 증거가 없잖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야, 그게.”

윤진이 쿡쿡 웃었다. 필웅도 멋쩍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글쎄요. 하지만 선배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내가 어떤 일을 굳게 믿고 있다면, 나도 모르는 새 이유를 찾았던 걸 수도 있다고.”

윤진이 재밌다는 듯 필웅을 돌아보았다.

“뭐야, 내 말로 나를 공격하는 거야? 치사하네.”

“검사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죠.”

“당할 수가 없네. 하하.”

윤진은 두 손을 들어 보이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아.”

“네?”

윤진이 자신의 자리에서 가방을 집어들며 따뜻하게 필웅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나를 설득시켜봐. 나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 거야.”

“상대방 변호인이 그런 도움말을 줘도 되는 건가요?”

윤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도움말인가? 사실 당연한 얘기잖아?”

필웅은 별말 없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진도 손을 흔들며 재판정을 나갔다.

필웅은 텅 비어 있는 재판정에 홀로 남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 * *

“검사님, 강석훈의 행적에 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전화기 너머 장경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전국 고속도로의 CCTV를 수배해 봤는데, 그중 하나에서 강석훈이 타던 차량이 발견됐어요!”

“그게 어딥니까?”

“강릉 쪽이어서 그 인근의 CCTV를 다시 확인하는 중입니다. 구체적인 게 포착되면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필웅은 전화를 끊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제 그를 찾아내서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귀중한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사가 개시되고 정말 오랜만에 얻은 결정적인 단서였다. 필웅은 초조하게 장경의 연락을 기다렸다. 잠시 후 반가운 전화 소리가 울려왔다. 필웅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조필웅입니다.”

“검사님, 저 박장경입니다. 대강 소재지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잠깐 와서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제가 경찰서로 갈게요.”

필웅은 전화를 끊고는 부리나케 경찰서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 * *

필웅은 장경과 함께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CCTV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강석훈의 차는 경포대 인근에 진입하는 것까지 목격되었고, 근처의 호텔에서 그의 차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었다고 했다. 장경과 필웅은 목격이 이뤄진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예, 강릉 페리 호텔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남부경찰서 박장경 형사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거기 투숙하는 분들 중 강석훈이라고 있습니까?”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잠시 침묵했다. 뭔가 난처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희가 숙박부를 따로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요.”

규모가 작은 호텔이어서 따로 투숙객들의 명단을 유지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지난 9월 초에 투숙한 사람들 중에 이렇게 생긴 사람 없습니까?”

장경은 강석훈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보고 그의 생김새와 키 등을 간단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9월 초요?”

“예, 아마도 9월 2일 이후로요.”

9월 2일은 경포대 인근에서 그의 차가 목격된 시점이었다.

“흠, 비슷하게 생긴 분은 있는 것 같은데요.”

“한 번 가서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가서 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장경과 필웅은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장경이 긴장된 눈빛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강릉 페리 호텔입니다. 박장경 형사님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강석훈 씨는요?”

“그게… 로비에서 전화를 걸어 봤는데 받질 않으시길래 올라가 봤는데 방문이 잠겨져 있더라구요.”

“그 뭐냐, 마스터키 같은 걸로 열어 보시면 안 됩니까?”

“그건 좀… 투숙객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고….”

“아니, 지금 그분이 실종신고가 들어와서 빨리 현재 상태를 확인해야 된단 말입니다.”

“저희로서는 솔직히 전화상으로는 진짜로 형사님이신지 누군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투숙객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야 없는 것 아닙니까?”

장경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니, 그게 시방 뭔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예?”

“정 필요하시면 정식으로 공문 보내시던가요.”

“와, 진짜 답답하네.”

필웅은 더 이상 쓸데없이 힘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장경을 만류했다.

“그냥 저희가 직접 가보죠. 어차피 강석훈 씨한테 할 말도 있고.”

“알겠슴다.”

장경은 전화기를 잡고 페리 호텔에 가는 길을 물었다. 장경은 주소를 받아적고 전화를 끊었다.

“진짜 답답한 양반들이네요.”

“어쩔 수 없죠. 아직 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빨리 가봅시다.”

필웅은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는 장경을 다독이며 길을 재촉했다.

* * *

필웅과 장경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곧 만나게 될 증인이 어떤 사람일지, 그로부터 뭘 얻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긴장감만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형사님.”

“예?”

“형사님은 이번 사건 어떻게 보십니까?”

필웅은 삼영백화점의 붕괴 사건과 그가 강무완을 기소하게 된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합동분향소를 가서 어린 시절의 영전을 만난 이야기는 빼고.

“글쎄요…저는 그 윤진인가 하는 변호사님 얘기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필웅이 장경을 돌아보았다.

“그래요?”

“저희 아버지도 예전에 건설 쪽 일을 하셨슴다. 건설사 대표라는 사람들은 현장에 거의 오지도 않아요. 아마도 그 강무완 사장이 실제로 설계도면을 본 적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회사라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필웅은 조금 힘이 빠졌다. 내심 장경이 자신의 사건을 지지해 줄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약간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형사님도 잘해봐야 현장 책임자 정도나 잡아넣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로군요.”

장경이 흘긋,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필웅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검사님이 하신 거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검사님이라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넣고 싶다고 해서 잡아넣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거 고맙네요.”

“아, 저 앞인 것 같슴다.”

장경이 손을 들어 저 멀리 보이는 호텔 간판을 가리켰다.

<강릉 페리 호텔>

필웅은 심호흡을 하면서 안전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마쳤다.

“좋습니다. 들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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