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59화 (59/151)

59화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부인합니다

필웅이 윤진을 만난 날로부터 며칠 후.

필웅은 삼영건설으로부터 압수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삼영의 방해 때문에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내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법원은 생각보다 쉽게 영장을 내주었다. 삼영백화점의 붕괴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워낙에 뜨겁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필웅은 한숨을 쉬며 몇 박스가 되는지 세기도 힘든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부실시공된 삼영백화점을 삼영건설이 방치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해!’

필웅은 삼영백화점의 붕괴가 당연히 설계상의 하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 그 답에 맞게 과정을 꿰어 맞추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은 쉽지.’

어떤 사실이 발생했다는 것과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필웅이 밤을 꼬박 새워서 자료들을 살펴보고 대강 분류해 뒀지만, 그 수많은 자료들 중에도 삼영건설이 삼영백화점의 부실시공을 방치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삼영백화점 건축 후에도 삼영건설의 간부들이 삼영백화점의 회의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는 자료 정도였다.

“잘 돼 가?”

어느새 시연이 필웅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

“한 10분 전?”

“기척이라도 좀 내라.”

“옆에서 헛기침도 하고 인사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고….”

“노래? 아무튼, 어쩐 일이야?”

“일손이 부족한가 싶어서 도와주러 왔지!”

시연이 말하며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뭐부터 보면 됩니까, 검사님?”

“나도 모르겠어. 자료는 많은데 다 껍데기들 뿐이야.”

필웅이 짜증스럽게 들고 있던 회의록을 책상 위에 함부로 던졌다.

“이건 무슨 자료야?”

“회의록이야. 삼영백화점이랑 삼영건설 간부들이 모여서 회의한.”

“그 두 회사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왜 하는데?”

“회의한 내용 자체는 그냥 시시껄렁한 것들이야. 계열사 간 거래 조건에 관한 임원들끼리의 협의 뭐 그런 것들.”

“흐음….”

시연은 흥미롭다는 듯 회의록을 들어 올려 읽기 시작했다.

“그러네. 도대체 삼영건설과 삼영백화점이 무슨 거래를 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필웅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다른 자료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회의록을 들여다보는 시연에게 급하게 물었다.

“회의에 참석한 삼영건설 측 책임자는 누구야?”

“음… 보자…. 강석훈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필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들고 있던 보고서를 이리저리 넘겨보기 시작했다.

“찾았다!”

“뭘?”

시연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필웅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강석훈은 삼영백화점 실시설계를 지휘감독한 사람이야. 여길 봐.”

삼영백화점 건축 당시의 보고자료였다. 실시설계 감독자로 강석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수많은 삼영건설 사람들 중에 하필 강석훈이 회의를 위해 삼영백화점에 방문한 게 우연일까? 삼영백화점 건축 자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계열사 거래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글세… 삼영백화점을 처음 지을 때부터 관여해 왔으니까 삼영백화점의 실무자들이랑 안면이 좀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그건 이 사람을 소환해서 물어보면 알겠지. 당장 참고인으로 조사해 봐야겠어.”

필웅은 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님, 저 필웅입니다.”

“예, 검사님.”

“사람 하나만 찾아 주실 수 있어요? 삼영백화점 붕괴 사건 관련한 참고인입니다.”

“예 말씀하시죠.”

“강석훈 상무라는 사람입니다. 삼영백화점 건축 당시 상무였으니까 지금은 전무쯤 됐을 수도 있겠군요. 삼영건설 사람입니다.”

“어? 강석훈이라구요?”

필웅이 전화기를 고쳐잡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 왜, 얼마 전에 삼영건설에서 실종됐다던 사람이 강석훈입니다.”

“뭐라구요?”

“아직 실종 상태인데… 일단 잘 알겠습니다.”

필웅은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보고자료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실낱같지만 사건의 진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얻어낸 기분이었다.

* * *

그날 저녁.

자료를 들여다보던 필웅은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에 사무실을 나섰다. 어디라도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필웅은 문득 근처에 이제까지 밝혀진 삼영백화점 사고의 사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 번 가볼까.’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필웅은 알지 못했다. 가봤자 무척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가 그를 이끌고 있었다. 목소리는 필웅이 반드시 그 장소에 가봐야 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필웅은 스스로도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장례식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례식장은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장례식장 앞에는 예상대로 수많은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필웅은 들어갈까 말까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여기까지 온 거, 일단 들어가 보자.’

필웅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더욱 어수선했다. 급하게 마련된 장소여서 자리는 협소했고, 영정 사진을 올려놓은 단은 더 이상 사진을 올려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빡빡했다.

여기저기서 유족들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왜 자신이 여기 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필웅은 그렇게 무작정 합동분향소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음…?’

그러던 필웅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딘지 낯익은 여성의 사진이었다. 바로 나영전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영전의 아버지는 없었다. 영전의 아버지는 당시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것이라며 한창 사고 현장이며 담당공무원들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필웅의 눈에, 어린 나영전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린 영전은 구석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말라 버린 눈물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도 울다 지쳐 진이 빠진 상태인 모양이었다.

필웅은 안쓰럽게 어린 영전을 쳐다보다가, 다시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영정사진을 찍을 틈도 없어서 그저 밝게 웃는 얼굴의 평소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리라.

필웅은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꼈다. 그것은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이 모든 사태를 불러온 자들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때 어린 영전이 고개를 들어 빤히 필웅을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필웅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응… 어머니 친구.”

“우리 엄마 친구예요?”

“맞아.”

“우리 엄마 진짜 죽었어요?”

필웅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린아이의 질문치고는 너무나도 직설적이었다. 필웅은 어린 영전이 당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었는지 다시금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필웅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영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힘내야 해.”

“…?”

영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필웅을 올려다보았다.

필웅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분향소를 나왔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이번 사건만큼은 반드시, 반드시 전부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 * *

제1회 공판기일이 열리는 날.

필웅은 일찍 재판정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곧 공판기일이 시작되는데, 결국 강석훈은 찾아내지 못했다. 장경의 말로는 얼마 전 회사에 출근한 후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그냥 그렇게 없어졌다구요? 가족들은요?”

필웅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딸은 이미 결혼해서 같이 안 살고, 부인이 실종신고를 했었죠.”

“그런데 아직 못 찾은 겁니까?”

“일단 계속 행적을 찾아보고는 있는데, 아직 밝혀진 게 없습니다. 회사에서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필웅은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았다. 일단은 강석훈이 없는 상태로 해볼 수밖에 없다.

삼영건설의 설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전문가들의 감정도 이미 다 마친 상태였다. 삼영건설이 설계한 삼영백화점은 태생적으로 높은 하중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삼영건설의 최종 결정권자, 그러니까 강무완 대표가 그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여부였다.

만약 강무완 대표가 어떠한 이유로 설계의 하자를 당시에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었으니 무죄가 나오고 끝날 것이었다.

‘겨우 그 정도로 끝내줄 수는 없지!’

당연히 필웅은 쉽게 삼영건설의 임원들을 봐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설계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과 강무완 대표가 이를 알고도 버려뒀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얘기니까….’

필웅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가 강석훈을 불러 확인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강석훈은 삼영건설을 대표해 삼영백화점에서 열린 회의에 여러 차례 참석한 바 있었다. 만약 설계에 하자가 있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을 것이다.

삼영백화점이 준공된 후에도 그런 내용의 회의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삼영백화점과 삼영건설의 임원진들도 설계의 하자가 있음에도 이를 방치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필웅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던 그때, 변호인과 강무완 대표가 재판정에 도착했는지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은 뒤를 돌아보았다.

윤진이 강무완과 함께 재판정에 들어오고 있었다.

‘선배…도대체 왜 또….’

필웅은 윤진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하필이면 윤진이 수임한 사건에서 자꾸 자신과 부딪히게 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다.

윤진이 들어서며 필웅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선배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예전 이야기를 나눠 본 바에 의하면 윤진은 자신의 의뢰인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변호사로서의 일을 하고, 필웅은 검사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윤진의 태도였다. 필웅은 그렇게 칼로 자르듯 공사를 구분할 수 있는 윤진이 때로는 부러웠다.

“1998고합1067 건축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재판의 개시를 알렸다.

“검찰 측, 공소사실의 요지를 설명해 주세요.”

필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무완 쪽을 돌아보고는, 강무완을 기소한 죄목을 밝히기 시작했다.

“피고인은 삼영건설의 대표입니다. 피고인은 삼영백화점 건축 당시 삼영백화점이 건축법에 위반하여 안전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그대로 강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삼영백화점은 결국 붕괴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와 같이 피고인은 건축법을 위반하였음은 물론 업무상의 과실로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는바, 피고인을 법률에 따라 처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재판장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변호인 쪽을 바라보았다.

“피고인 측,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윤진이 필웅을 잠시 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피고인 측은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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