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쉽지는 않겠지
필웅과 장경은 긴장하며 강무완을 마주 보았다.
강무완의 표정은 태평했다. 오히려 뒤에 서 있는 수행원들이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 회사에는 어쩐 일이시오?”
강무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필웅은 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어쩌지, 삼영백화점 이야기를 바로 꺼내면 분명 불필요하게 경계심을 자극할 것 같은데.’
장경이 갑자기 대신 대답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실종사건을 하나 조사하고 있는데 실종자가 이 회사 직원이어서 말입니다.”
“이쪽 분은…?”
강무완이 그제서야 비로소 장경을 발견했다는 듯 그에게 슬쩍 몸을 돌리며 물었다. 장경은 호주머니에서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박장경 형사라고 합니다.”
“그럼 검사님은 이분과 같이 오신 거요?”
장경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필웅이 잽싸게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장경은 무슨 소리냐는 듯 필웅을 돌아보았다. 필웅은 강무완이 볼 수 없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주 작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장경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완 대표가 말했다.
“이런, 저희 회사 직원이 실종됐다니 저희가 꼭 도움을 드리고 싶구려.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담당 부서가 적극 협조하도록 잘 얘기해 두겠소.”
‘특이한 말투로군…’
필웅이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경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강석훈 씨라고 하던데, 혹시 아십니까?”
그때 필웅은 강무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필웅처럼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장경도 수첩을 꺼내 보면서 이야기를 했기에 강무완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생긴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강무완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부끄럽지만 회사가 규모가 있다 보니 직원 하나하나를 다 알기는 힘드오.”
“그럴 수 있죠.”
“어쨌든 회사 내부적으로 확인해 보라고 하겠소.”
“감사합니다.”
장경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강석훈이 근무하던 사무실이 어느 쪽인지를 묻기 위해 로비의 방문객용 데스크로 걸어갔다. 필웅은 여전히 자리에 남아 강무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강무완의 머리 위쪽으로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뭐야 이게?’
이제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크리미널 아카이브였다. 뭘 먼저 봐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가히 범죄의 집대성이라고 할 뿐이었다.
필웅이 얼이 빠진 채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읽어 보려고 한 순간이었다.
“검사님.”
강무완이 갑자기 필웅에게 가까이 다가와 서며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우리 유라랑은 별로 사이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맞소?”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필웅은 다시 초점을 그에게 맞췄다. 필웅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딸아이가 워낙에 지기 싫어해서 말이오. 그래도 나쁜 아이는 아니니 잘 좀 부탁드리겠소.”
강무완이 말하며 친근하게 필웅의 어깨를 두어 번 탁탁 두드리고는 가던 길로 돌아갔다. 필웅은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가 한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했다. 강무완의 아리송한 말들 때문에, 아까 장경이 강석훈이란 사람을 언급했을 때 강무완이 보인 이상한 반응은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아 참, 원래 여기에 온 목적이 있었지.’
필웅은 문득 삼영건설에 왔던 원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하지만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치게 많은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회사의 대표가 갑자기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 주위 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몰래 삼영건설에서 삼영백화점의 건축을 담당했던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던 필웅의 계획은 이미 틀어진 듯했다.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뭔가 냄새를 맡고 일부러 나에게 접근한 건가?’
강유라와 필웅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필웅이 강유라를 어떻게 방해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강무완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그런 필웅이 회사의 로비에 나타났으니, 일단 먼저 아는 척을 해서 허튼짓하지 말라는 사인을 준 것일지도 몰랐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기습의 효과는 사라져버렸군.’
필웅은 혀를 차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 * *
필웅은 사무실로 돌아와 삼영건설에 대한 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삼영건설은 단독으로 삼영백화점을 설계하고 건설한 회사였다. 삼영백화점에 설계상 하자가 있다면, 삼영건설에서 이를 몰랐을 리 없었다. 그리고 삼영건설이 삼영백화점을 건축할 당시의 회의자료나 그 후 유지보수를 할 때 보고자료 같은 것이 있다면, 삼영건설이 삼영백화점의 하자를 알면서도 이를 방치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필웅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압수수색을 해야겠지. 그 다음에는 주요 증인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어. 만약 설계상 하자가 있었다는 걸 삼영건설의 실무자들도 알았다면, 그런 사실을 증언해 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내부고발이니까 쉽지는 않겠지…’
필웅은 바로 얼마 전 삼영산업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고초를 겪었던 이시원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AG케미컬이라는 의외의 구원자가 있어서 이시원의 증언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삼영그룹의 분위기라면 내부고발을 한 증인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하긴 뭐, 그것도 증인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필웅은 내심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열렸을 때 삼영백화점 사건이 있었는지 제대로 파악해 두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만일 삼영백화점 사건과 그의 연관점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누가 주요 증인이 될 수 있을지와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전부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무완의 태도에 비추어 봤을 때 그가 쉽게 다시 필웅을 만나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필웅은 모아 놓은 기사들 중 강무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필웅은 한참이나 기사를 노려보다가 포기했다.
‘아쉽긴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필웅이 마지막으로 자료를 한 번 더 정리하려고 이리저리 흩어진 서류들을 추스르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사무실 방문을 두드렸다.
시연부터 장경, 심지어 강유라까지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나타났기에, 필웅은 방문자의 예절 수준에 상당히 감동했다.
“누구세요?”
“나야, 윤진.”
필웅이 놀라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선배, 웬일이에요?”
“법원 왔다가 너 생각나서 한 번 와봤지! 밥은 먹었어?”
“아, 아뇨.”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자.”
필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저 보던 서류만 좀 정리하고 가죠.”
“응, 그래!”
필웅은 살펴보던 삼영건설의 보도자료들과 삼영백화점 건축 당시의 기사 등을 정리했다. 윤진이 그의 뒤에서 힐끔힐끔 자료들을 넘겨다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일 하나 궁금해요?”
“응? 아니~ 그냥 뭔가 해서.”
필웅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윤진은 이상하게 어색해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필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서류를 파일에 철한 뒤 윤진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요?”
“난 떡볶이!”
“예? 아니 애도 아니고 무슨 떡볶이에요?”
“애들만 떡볶이 먹니? 떡볶이 싫으면 튀김이랑 순대도 시켜 줄게~”
“예예. 그것참 황송하네요.”
필웅은 윤진과 사무실을 나와 근처의 분식집으로 향했다.
“진짜 이런 걸로 괜찮아요?”
“그럼! 나 분식 진짜 좋아하거든!”
필웅은 허름한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서며 떡볶이와 순대를 주문했다.
“요새 일은 어때요?”
“일? 뭐 매일 똑같지.”
윤진의 표정이 이상하게 조금 어두워 보이는 것을 눈치챈 필웅이 재차 물었다.
“요즘도… 진우현 사건 같은 거 해요?”
윤진이 씩 웃으며 반문했다.
“진우현 사건 같은 게 뭔데?”
“뭐, 그러니까… 음…. 서민들 등쳐먹어서 번 돈으로 법무법인 진화도 선임할 수 있는 범죄자들?”
윤진이 깔깔 웃었다.
“재미있는 정의네. 그렇게 정의한다면 진우현 사건 같은 것들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 물론 나는 그 사람들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단 한 번도, 이 사람이 범죄자인데 내가 보호해 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안 해봤어요?”
필웅이 진지하게 물었다.
사실 어쩌면 이건 과거의 자신, 나영전에게 하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나영전은 물론 윤진과는 상황이 달랐다. 윤진의 태도는 자신의 의뢰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 쪽에 더 가까웠다. 반면 나영전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증거만 없으면 된다는 주의였다. 만일 과거의 나영전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는 아마도 ‘범죄자인데 내가 보호해 주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라고 물어왔을 것이다. 필웅은 윤진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윤진은 막 나와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빨간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들며 대답했다.
“왜 안 해봤겠어.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지금 내가 전부잖아. 나조차도 등을 돌리면 그 사람이 무죄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구.”
“실제로 무죄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물론, 실제로 무죄가 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 사람이 무죄가 아니라고 밝히는 게 검사들의 역할이라면, 무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편을 들어 주는 게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공권력에 맞서 싸워야 되는데, 자기편이 하나도 없다는 건 너무 외롭잖아?”
윤진은 싱긋 웃으며 떡볶이를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필웅도 떡볶이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필웅은 왠지 윤진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묘하게 설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설득력이 있는 얘기기도 하지만… 감정이 남아서 그런 걸까.’
필웅은 생각하며 흘끗 윤진을 살펴보았다. 윤진은 떡볶이가 너무 매웠는지 연거푸 물을 마시며 입김을 불고 있었다.
“선배.”
“응?”
“내가 지금 하려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아직은 증거도 부족하고 상대방도 엄청나게 힘이 센 사람이에요.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어요. 오히려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일이예요. 만약 중도에 그만둘 수 있다면, 그만둬야 할까요?”
물론 필웅은 삼영백화점 사건을 중간에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필웅은 왠지 윤진의 생각이 듣고 싶어졌다. 필웅 자신이 삼영과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주위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늘 그를 괴롭혀 왔다. 이럴 때 만약 윤진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필웅은 조금은 더 힘이 날 것 같았다.
“흠, 필웅아.”
“예?”
“그런 게 고민이 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
예상치 못한 윤진의 대답에 필웅은 두 눈을 꿈벅꿈벅, 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되찾고 반문했다.
“그런가요?”
“우리는 어른이잖아. 내가 옳다고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일이 물론 있겠지. 하지만 그걸 주위 사람들한테도 강요해야 할까? 주위 사람들이야 물론 말로는 괜찮다고 하겠지. 상처 주기 싫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이라고 해서 내 주위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할까?”
“그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윤진이 말하며 이제 소스만 남은 떡볶이 접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더 시킬지 고민하는 중인 듯했다.
필웅은 윤진의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