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거기에 잡아 넣을 놈들이 있으니까
‘삼영건설이면 그 삼영백화점 지은 곳 아닌가?’
장경은 오후에 왔다 간 부인이 신고한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자료들을 살펴보던 장경은, 삼영백화점의 계열사 중 삼영건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자료들이 삼영건설이 삼영백화점의 시공을 맡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거 점점 수상한 냄새가 나는디….’
삼영백화점의 붕괴.
이를 전후해 행방이 묘연해진 삼영건설의 직원.
그리고 석연치 않은 회사의 대응.
장경은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먼저 삼영건설에 가봐야겠어.’
장경은 살펴보던 자료들을 대강 정리해 수첩에 적어 놓고 자리를 떠났다.
* * *
시연은 걱정스럽게 필웅의 사무실 방문을 올려다보았다.
시연이 보기에 필웅은 삼영백화점 사건을 접한 이후로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주 계장에 의하면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 한숨만 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연은 필웅이 좋아하는 토스트를 사들고 필웅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사무실 방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시연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크 좀 해.”
필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메마른 듯한 목소리에 시연은 조금 필웅이 안쓰러워졌다.
“미안.”
“미안까지야. 어쩐 일이야?”
시연은 우물쭈물하다 토스트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밥… 먹었어?”
“아니. 이제 먹어야지.”
“토스트 사 왔어.”
“토스트 좋지.”
필웅은 시연으로부터 토스트를 받아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괜찮아?”
“응? 뭐가?”
시연이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요새 밥도 잘 안 먹고 힘도 없어 보여서. 삼영백화점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필웅은 입을 닦고는 토스트를 잠시 내려놓았다.
“음… 뭐,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
“이럴 때일수록 힘내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할 수 있는 일이라….”
필웅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맞아.”
필웅은 미소를 지으며 시연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할 일을 일깨워 줘서.”
“아니야, 뭘.”
시연은 흔치 않은 필웅의 감사 인사에 조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시연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괜히 필웅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이거 아직 갖고 있네?”
시연이 말하며 반갑게 책을 꺼내 들었다. <형법학 개론>이라는 책이었다.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시연이 책을 꺼내자 켜켜이 쌓인 먼지가 구름처럼 흩어졌다. 시연은 콜록거리며 먼지를 털어냈다.
“그거…?”
“응. 나 대학교 1학년 때 이 책 보면서 도와줬었잖아. 기억 안 나?”
필웅은 그때서야 희미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필웅은 3학년 정도였고, 시연은 막 입학했을 때의 일이었다.
원래 유도선수였던 시연은, 당시 근처 고등학교의 여자 유도부 부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이것저것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주로 운동에 대한 조언들이나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한 조언들이었다.
그러던 시연이 부상으로 잠시 유도를 쉬고 있을 때, 한 후배가 그녀를 찾아왔다. 후배는 유도부의 코치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폭행, 폭언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시연은 예전 그녀가 있던 고등학교의 유도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는 학생이었고 운동부에서 그런 일은 거의 관행처럼 이뤄져 왔기에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시연은 그런 관행을 늦게나마 바로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 코치를 처벌하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시연은 우연히 필웅과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
필웅은 그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형법학 개론>을 꺼내 들고, 꼼꼼히 코치가 범한 죄를 하나하나 지적해 주었다. 경찰에 고발하고, 조사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절차도 알려 주었다.
시연은 필웅이 이야기한 대로 코치를 경찰에 고발했다. 코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시연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당시 시연의 부상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어서 기량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앞날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 그녀에게 필웅이 알려준 법과 절차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그 무언가였다.
‘운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거라도 조금 공부를 해 볼까? 나중에 선수가 되도 이런 법률적 지식은 필요할 수도 있잖아?’
오랫동안 시합에 나가지 못해 조바심을 내던 시연은, 그렇게 필웅이 권해 준 법률서적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형법학 개론>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연은 법학과로 전과까지 해 가며 사법시험에 통과해 검사가 되었다.
시연은 감개무량하게 그녀를 법조계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는 책을 쓰다듬었다. 필웅은 간신히 그가 그 책을 가지고 그녀를 도와줬던 것까지는 기억해 냈지만, 그 책이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기억은 나지. 그런데 무슨 책이었는지까지 네가 기억하고 있는지는 몰랐네.”
“중요한 책이지. 검사 정시연을 만든 책이거든.”
시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형법학 개론>을 보다가 책을 내려놓았다.
“형법학 개론 서문에 써있던 말 기억나?”
시연이 갑자기 필웅에게 물었다.
“아니. 서문에 써있는 말까지는 잘….”
시연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는 이게 태어나서 처음 본 법률책이었거든. 뭔가 인상이 되게 깊게 남았었나 봐.”
“서문에 뭐라고 써있는데?”
시연이 눈을 감고 시를 읊듯 자신이 기억하는 서문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형법을 적용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미 피해자가 발생해 버린 후 가해자를 뒤늦게 처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죄에 대하여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법률의 의의이자 바른 이치이다. 형법은 벌을 받아야 할 자에게 벌을 내림으로써, 또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우리도 모르게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거야?”
“아니야. 당연히 문구는 좀 다르겠지. 얼추 이런 내용이었다는 얘기야.”
시연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필웅은 시연이 들려준 형법학 개론에 나왔다는 문구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가 필웅으로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어떤 사건들은 그만의 능력을 이용해 제대로 해결할 수 있었고, 어떤 사건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떤 사건들의 해결은 빨랐지만, 어떤 사건들의 해결은 너무 늦었다.
서다운, 심기원, 김혜진, 김태현, 진우현, 강준수, 장선영, 한호진, 이시원, 지경득.
그가 거쳐 간 수많은 사건들의 피해자와 범죄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이 피해자들을 구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국 인간이자 검사인 조필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범죄자들이 응당한 벌을 받게 만드는 것, 그것뿐이었다.
삼영백화점의 붕괴는 물론 슬픈 일이었지만, 그런 사건이 그를 막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됐다. 지금 그가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는 동안, 정작 가해자들은 자유롭게 저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필웅은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가 범죄자들에게 철퇴를 내려치지 않으면, 범죄자들은 반성도 후회도 없이 저 밖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어낼 것이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게 하는 일이야!’
필웅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시연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다.
“어, 어디 가게?”
“삼영건설에 가봐야겠어.”
“갑자기?”
필웅은 시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야.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보고 안타까워하기만 해서는 안 돼. 누군가가 밖에서 다른 사람을 쓰러트리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내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저 밖에서는 누군가가 또다른 백화점을 무너트리고, 또다른 피해자를 찾아 헤매고 있을 수도 있어.”
필웅은 잠시 말을 멈추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내가 가야 해, 거기에 잡아 쳐넣어야 할 놈들이 있으니까.”
* * *
필웅은 삼영건설의 본사에 도착했다.
사실 필웅도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지금의 계획은, 삼영건설에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기 전이니 기습적으로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본래 나영전의 성격은 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편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필웅은 나영전보다도 필웅의 저돌적인 성격을 따르고 있었다.
‘어차피 압수수색 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늘은 적당히 실무자들이라도 만나서 앞으로의 조사 방향을 잡아봐야겠어.’
필웅이 삼영건설에 도착한 때, 마침 장경도 삼영건설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필웅은 로비에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장경이 뒤따라 로비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장경을 불렀다.
“형사님?”
장경도 뒤늦게 필웅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검사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형사님은요?”
“저는 뭐 조사할 사건이 하나 있어가지구요. 검사님은요?”
“저는….”
필웅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로비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은 기묘한 소란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난 듯 시끌시끌해지더니, 삽시간에 적막에 가까워질 정도로 조용해진 것이다.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필웅과 장경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누가 나타난 것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렸다. 한 남자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에서는 중년의 중후함이 엿보였다. 한편으로는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나 몸에 딱 맞게 재단한 양복이 그를 젊어 보이게 했다. 아마도 삼영건설의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인 듯했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섰다. 필웅과 장경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도 그들을 돌아보았다.
“조필웅 검사님?”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필웅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필웅을 아는 듯했다.
“제 이름을 어떻게?”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뚜벅뚜벅 필웅 쪽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서자 필웅과 장경은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남자는 친근하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대신 가볍게 목례하며 울림이 있는 굵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유라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고 들었소.”
‘우리 유라?’
필웅이 의혹이 담긴 눈초리로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혹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라의 애비되는 강무완이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