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 회사가 어딥니까?
지 사장은 결국 수십 년의 징역을 살게 되었다. 약사법 위반 혐의뿐만 아니라 그가 회사를 운영하면서 저질렀던 수많은 비리들이 이번 사건 조사와 함께 터져 나온 것이다. 지 사장은 다시는 돈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면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필웅은 법정을 걸어 나오며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필웅은 골머리를 썩이며 예전 장경과도 몇 번 왔던 국밥집에서, 장경과 밥을 먹고 있었다.
그가 골치 아파하는 것은 K의 정체에 관한 것들이었다. AG케미컬의 임원들을 캐다 보면 뭔가가 나올 줄 알았는데, 결국 결론은 지경득이나 고일봉도 K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옛날 사진들을 입수해서 살펴보았지만 결국 고일봉의 손에도 흰 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원점인 건가…’
필웅은 쓴웃음을 짓고는 국밥에 부추와 다대기를 잔뜩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한 입을 크게 떠서 호호 불어 입에 물었다.
“그러니까, 지경득이나 고일봉이나 둘 다 진우현과 별 관계가 없다는 말이죠?”
장경이 넌지시 물었다.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말이죠. 고일봉은 K라는 인물을 아는 것 같긴 했습니다. 결국 정체는 모르지만요.”
“그런데 말임다, 검사님. 제가 듣기에는 진짜로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한데요.”
“왜죠?”
장경이 국밥 한 숟갈을 입에 물었다가 너무 뜨거웠는지 입을 벌려 하아, 하아- 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삼켰다.
“앗 뜨거! 어, 그러니까, AG케미컬 임원들이라면 똑똑한 양반들일텐데 뭐가 아쉬워서 진우현이한테 돈을 그냥 줘버리겠슴까? 뇌물을 먹여서 잘 봐달라고 할 만한 상대도 아니고, 투자금도 못 돌려받았다면서요?”
필웅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정확히 장경이 지적하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서가 이것밖에 없는데, 저들의 주장을 인정하면 단서가 여기서 또 끊겨 버리니까요.”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없는 죄를 물어서 뒤집어씌울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경도 필웅의 말을 듣자 갑자기 밥맛이 떨어지는 듯, 밥은 먹지 않고 힘없이 숟가락으로 국밥을 뒤적였다. 기운 넘치는 장경이었지만, 오랜만에 잡은 단서가 이렇게 눈앞에서 흘러가 버리자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참, 그 손에 흰 점은 어떻게 됐슴까!?”
장경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 다 없더군요. 지경득도, 고일봉도.”
장경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국밥만 내려다보았다.
국밥집에 틀어진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필웅도 반찬을 깨작이고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더니 아나운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속보입니다. 금일 오후 삼영백화점 건물이 붕괴해서 백화점 방문객들과 직원 일부가 무너진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현장에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브리핑이 끝나고 뉴스는 삼영백화점이 붕괴되는 모습과 구조작업이 펼쳐지는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필웅은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그것은 삼영백화점이 불과 얼마 전 그가 시연과 방문했던 백화점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갑작스레 끄집어낸 나영전의 어릴 적 기억 하나 때문이었다.
‘삼영백화점…!’
필웅은 비로소 그 건물이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기억해 냈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나영전의 어머니.
그날 그녀가 약속이 있다고 했던 곳은, 바로 ‘삼영백화점’이었다.
* * *
필웅, 아니 영전은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그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삼영백화점에 처음 시연과 갔을 때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도 뭔가 희미한 기억 같은 것이 돌아올 듯했지만, 결국 그 후로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삼영백화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전의 나이는 7살 정도였다. 너무 어려서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영전은 곧 삼영백화점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의 기억 자체가 무척 희미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 당시는 영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차가운 영정 사진으로 돌아온 어머니.
그리고 그 후로 그에게 점점 무심해진 아버지.
어린 그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유독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무시 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릴 적의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슬픈 기억들을 머리 속에서 꽁꽁 묶어 어딘가에 깊게 감춰 버렸다. 그의 정신 속에서 멀리 추방되어 있던 기억들이, 삼영백화점이 무너지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자 다시 살아났다.
필웅은 덜덜 떨며 TV에서 힘겹게 눈을 돌렸다.
“검사님? 왜 그러세요?”
장경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필웅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감은 눈앞에서는 끝없이 무너지는 삼영 백화점의 모습이 환영처럼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 * *
필웅은 다음 날 아침 퀭한 눈을 뜨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필웅은 점차 돌아오기 시작한 기억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뉴스를 뚫어지게 보던 아버지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이 나라는 미쳤다며 엉엉 울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저런 인간 쓰레기 새끼들을 살려 놔서 뭘 어쩌겠다는 말이야!”
아버지는 벽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영전은 어른이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모습을 처음 봤기에 너무 무서워서 후다닥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 귀를 꼭 막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까지 미친 사람처럼 벽을 두드리다 지쳐 잠들었다. 어린 영전도 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울며 잠이 들었다.
필웅은 갑자기 이런 기억들이 생생히 돌아오는 것에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시연이었다.
시연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뉴스 봤어?”
필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구조할 수 있겠지? 생각보다 사상자 수가 적대…!”
필웅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해 줘도 믿지 않겠지만.’
필웅은 적당히 대답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렇겠지.”
“휴….”
시연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널부러지듯 앉았다.
“진짜….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냐….”
“그러게.”
“그러고 보니 삼영백화점 얼마 전 우리가 갔던 데잖아?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었다는 거네….”
필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저 저 사람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던 거겠지.’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짐짓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겠지!”
“그래, 힘내고.”
“응응, 너두!”
‘글쎄, 힘이 날지는 모르겠다.’
이미 사건 자체는 모두 벌어진 일이다.
나영전의 어머니는 사건 당일 죽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며칠 동안 버티지도 못하고 사고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했다. 이미 그 사실들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필웅은 시연이 갖고 있는 실낱같은 낙관만큼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필웅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 없이 엎드렸다.
* * *
장경은 신문을 구겨 던지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형사들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먼 친척이 사고에 휘말렸다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이런 XX럴, 낼 모레면 21세기라는 나라에서 이게 뭔 개같은 경우여?’
대명천지에 그렇게 거대한 건물이 폭삭 무너지다니, 장경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 이거 진짜 무슨 북한 놈들이 테러라도 한 거 아니냐?”
똑같이 신문을 보고 있던 강력계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장경에게 말을 건넸다. 장경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도 않으면서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아, 좀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말이 안 될 건 뭐냐? 아니, 애당초에 서울 한복판에 백화점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무너졌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 북괴가 폭탄테러를 해서 건물이 무너졌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
장경은 다시 한번 그게 말이 되냐고 반박하려다가 멈칫했다.
‘가만, 그것도 그런가…?’
그로서도 사실 서울 한복판의 대형 백화점이 순식간에 아무 전조도 없이 무너졌다는 것을 믿기 힘든 참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 나라가 어떤 나란디….’
장경은 그래도 무려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루고, 엑스포도 개최한 나라에서 이런 후진국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강력계장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자기도 모르게 넘어갈 뻔한 것이다. 그만큼 아무런 화재도, 폭발의 징조 같은 것도 없이 그저 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쉽지 않았다.
“저…”
한 부인이 사무실에 앉은 장경에게 다가왔다.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장경은 자리를 권하며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희 남편이 실종된 것 같아서요.”
“얼마나 됐습니까?”
“한… 일주일 정도요.”
‘아니, 요새 사람들은 당최 왜 이렇게 실종신고를 늦게 하는 거야?’
장경은 호진이 사건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장경은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약간 언성을 높여 물었다.
“예? 아니 그런데 왜 이제서야 찾아오신 겁니까?”
“평소에도 갑작스런 외근이나 출장이 잦아서… 이번에도 그런 건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보통은 갑자기 출장 가게 돼도 연락은 오는데 이번에는 너무 오래 연락이 없어서….”
“남편분 회사나, 그런 데에선 연락 없었습니까?”
“그게 남편 회사가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연락해 봐도 자꾸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면 회사에서 출장 보낸 게 맞긴 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동안 실종신고를 안 하려고 했는데.”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매번 전화해서 대체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면, 항상 확인 중이라고만 하고 출장지를 알려 주질 않아요. 그래서 좀 더 물어보면 바빠 죽겠는데 좀 기다리시면 되지 뭘 그렇게 자꾸 캐묻냐고 화만 내고.”
“흐음.”
장경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회사의 반응을 보면 분명 회사는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굳이 그걸 가족에게 숨기는 이유는 뭐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회사의 대응은 너무 이상했다. 하다못해 회사의 실수로 남편에게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를 평생 숨길 수는 없으니 일단은 가족한테 알리기는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예 남편의 상태조차 확인해 주지 않는 것은 여러모로 뭔가 이상했다. 장경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부인을 바라보다 물었다.
“저, 근디 그 회사가 어딥니까?”
부인은 어느새 걱정에 눈물을 글썽이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대답했다.
“삼영… 삼영건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