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거래는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이다
“속보입니다. AG케미컬의 사장 지경득 씨가 약사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지경득 씨는 조직적으로 신약의 임상실험 결과를 조작해 온 혐의를 받고 있으며…”
뉴스에서는 지경득의 체포와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험을 주관했던 담당의사들도 모두 줄줄이 구속됐다. 그들의 참담한 표정이 카메라에 비춰졌다. 뉴스는 지경득의 사진과 임상실험이 이뤄진 성신병원의 특별병동 전경을 비춘 후, AG케미컬의 주가 폭락에 대해 항의하는 주주들의 시위 모습을 차례로 비췄다.
필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TV를 껐다. 다혜를 무사히 구출한 후로 사건의 경과는 일사천리였다.
필웅과 시연은 다혜의 증언과 다혜가 챙겨 나온 비밀유지서약서를 근거로 AG케미컬을 압수 수색했다. AG케미컬의 비밀 금고에는 그동안 임상실험 참가자로부터 받아 온 비밀유지서약서가 다수 발견되었다. 용기를 낸 다른 시험 참여자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결국 지경득 사장은 구속되었다.
‘강유라, 네가 아무리 옆에서 짖어도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고!’
필웅은 속으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이규필 차장도 말한 대로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다. 이규필 차장이 오히려 야근을 하는 필웅과 시연에게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 주기도 했다. 필웅은 그의 바뀐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일단은 수사를 중단시키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필웅은 사무실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럽게 AG케미컬에서 압수해 온 자료들을 다시 살펴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서류가 들어왔다. AG케미컬이 투자해 온 다른 회사들의 명단을 정리한 서류였다. 그 서류 중에 왠지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필웅은 서류상의 이름을 어디서 보았나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퍼뜩 그 이름을 어디서 보았는지 깨달았다.
필웅은 진우현의 사건 파일을 가져왔다. 서류 상의 회사는 진우현이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던 유령회사의 이름과 동일했다. AG케미컬은 진우현의 유령회사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 목적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유령회사였으니 투자된 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게 다 뭐지?’
필웅은 다른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정상적인 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자에 당연히 수반될 만한 투자 이후의 성과에 대한 보고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필웅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문득 지경득 사장에게서 나타났던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필웅은 K가 당연히 이니셜일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경득이 K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설마…?’
필웅은 급하게 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사님, 저 조필웅입니다.”
“아, 검사님. 무슨 일이세요?”
“혹시 지경득 사장 체포할 때 손 본 적 있습니까?”
“손이요? 아, 설마…?”
“예. 왠지 지경득 사장이 진우현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 적은 없는데…. 구치소 가서 한 번 보고 올까요?”
“제가 가서 한 번 보고 오겠습니다.”
필웅은 전화를 끊고 급히 지경득 사장이 구속되어 있는 구치소로 향했다.
* * *
지 사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면회장에 나와 있었다. 반인륜적인 임상실험의 조작과 각종 부작용이 뉴스에서 보도되자, 범죄를 떠나 그를 매도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의 부인과 딸도 그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지 사장은 눈에 띄게 초췌해 보였다.
필웅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진 범죄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손 좀 보여주시죠.”
지 사장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싫은데요? 제가 왜 검사님 부탁을 들어줘야 합니까?”
“부탁입니다. 제발요.”
지 사장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왼손을 올렸다.
“오른손도 보여주세요.”
지 사장이 한숨을 쉬더니 두 손을 다 탁자 위로 올렸다. 한쪽 손에 푸르스름한 점이 있었다.
‘뭔가 애매한데…?’
분명 K를 목격한 사람은 K의 손에 흰 점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흰 점이라면 손등의 색과 비슷할 테니 눈에 잘 띄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흰 점이라고 인식한 걸 보면, 실제로는 흰색보다는 다른 비슷한 색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지.’
필웅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유심히 지 사장의 손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지 사장이 손을 빼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상한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진우현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필웅은 순간 지 사장이 흠칫하고 놀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진우현이요…? 뉴스에서는 몇 번 봤습니다만.”
“시치미 떼지 마시죠. 이미 AG케미컬이 투자한 회사들 목록을 보고 온 길입니다. AG케미컬이 투자한 회사 중에 진우현의 유령회사가 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진우현을 TV로만 봤다구요?”
지 사장이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검사님…. 검사님이 회사를 운영해 보지 않으셔서 아무래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죠?”
“AG케미컬이 얼마나 큰 회사인지 아십니까? AG케미컬이 투자한 회사들 목록을 보셨으면 잘 아시겠군요. AG케미컬은 1년에만 10개가 넘는 회사들에 투자합니다. 물론 그 투자들이 다 성공하지는 않고, 실패할 때도 있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장으로서 제가 그 모든 걸 다 감독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닙니다. 투자 관련 결정은 우리 회사의 CFO가 전담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장님은 AG케미컬이 진우현의 회사에 투자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지 사장은 느긋하게 뒤로 앉아 건성으로 말했다.
“물론 제가 결재하는 그 수많은 서류들 중에 진우현 회사에 대한 투자 결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유령회사라면서요? 그 말은 얼핏 봐서는 그 회사가 진우현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기 어렵다는 소리 아닙니까? 설령 제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제가 그 회사가 진우현과 관련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도 중요한 투자 결정인데, 누구 회사인지도 모르고 투자를 한다구요?”
지 사장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겠다는 표정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검사님, 회사에 그 수많은 직책들이 왜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최종 결정을 내릴 정도로 서류가 준비됐다는 건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검토해 왔다는 뜻이죠. 그런 걸 두고 제가 ‘이 회사가 정상적인 회사가 아니고 누군가 수상한 사람의 회사일 수도 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와!’ 이러면서 서류를 제 아랫사람 면전에 대고 뿌리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필웅은 할 말을 잃었다. 둘러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지경득이 하는 말에 딱히 틀린 부분은 없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아, 검사님.”
일어서는 필웅을 지 사장이 불렀다. 지 사장이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검사님이 삼영의 강유라 사장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필웅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문을 들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걸 친분이라고 한다면 저와 지 사장님은 베스트 프렌드 정도 될 겁니다.”
“그래요…?”
지 사장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또 검사님이…. 아, 아닙니다.”
지 사장은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일어서 뒤로 돌아 면회장 밖으로 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필웅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AG케미컬의 CFO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투자 관련 결정을 내린다고 했으니, 그는 뭔가 알지도 몰랐다.
AG케미컬의 CFO도 지 사장과 동일한 혐의로 같은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었다. 필웅은 몇 시간 후 그와 마주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AG케미컬의 CFO인 고일봉이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지 사장과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수능란한 편은 아니었다.
‘이 남자의 이니셜은 K로군.’
필웅은 생각하며 무방비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진 고일봉의 손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런데 한 쪽 손이 화상인 듯한 자국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손은 어떻게 된 겁니까?”
고일봉이 자신의 손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구속되기 며칠 전에 집에서 요리를 하다가 데었습니다.”
“혹시 손에 흰 점 같은 게 있지는 않습니까?”
“흰 점이요? 기억 안 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고일봉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본인이 K라면, 자신을 식별할 수 있는 표시인 흰 점 같은 게 있었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도 있어. 다음에 고일봉의 예전 사진이라도 찾아봐야겠군.’
필웅은 더 캐묻는 대신 가방을 열었다.
“이 회사 알고 계시죠?”
필웅은 그에게 진우현의 유령회사에 관한 자료를 내밀었다. 고일봉 이사는 잠시 눈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자료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게 왜요?”
“이게 진우현의 유령회사라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습니다.”
필웅은 한 번 그가 당황할 만한 질문을 던져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당신이 K입니까?”
“뭐라구요?”
“진우현은 K라는 인물과 공모해서 거액의 주식 사기 행각을 벌여왔습니다. 우리는 K가 진우현의 배후에 있는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고 이사가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를 뒤척이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지 사장은 본인은 이 투자에 대해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잘 알 거라고 하더군요.”
“하, 아니. 한두 푼도 아니고 회사가 거액을 투자하는 데 사장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 사장은 자신이 투자 부문을 전부 총괄하는 게 아니라 디테일은 모른다고 하던데요.”
“디테일은 몰라도 투자 사실 자체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필웅은 고일봉과 지경득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데 싫증이 났다.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 이사님, 솔직히 저는 두 분의 핑퐁게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두 분이 어떻게든 진우현의 유령회사에 대한 투자 건에 관여를 했고, 만약 진우현의 유령회사라는 걸 알고 투자를 했다면 두 분의 혐의에 업무상 배임 혐의까지 추가해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고 이사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필웅의 협박이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크흠, 알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저도 사장님도 그 회사가 진우현의 회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맹세코 그 투자금을 진우현 개인에게 주려고 했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도 피해자라구요.”
“그걸 제가 왜 믿어야 하죠? 진우현과 모종의 거래를 한 뒤, 마치 정상적인 회사에 투자한 것처럼 해놓고 사실은 그에게 자금을 제공한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검사님.”
고 이사가 답답하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필웅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왔다.
“거래가 있었다고 하려면 저희도 바보가 아닌데 무언가를 그로부터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진우현이 무슨 고위 관료라거나 국회의원 아들인 것도 아니고, 그 인간한테 기대할 수 있는 건 돈밖에 없는데, 그 인간한테 돈을 못 받으면 대체 우리가 뭘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고 이사는 정말 억울한 듯 가슴을 탕탕 쳤다.
“그리고 사실.”
고 이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낮추더니 말했다.
“이번 임상실험 사건도 K가 지시한 겁니다.”
“뭐라구요?”
“K는 우리 회사에 차명으로 주식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 K인지, 차명으로 주식을 갖고 있는 K의 대리인이 누구인지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K는 우리 회사의 운영에도 손을 댈 정도로 우리 회사에 막대한 투자를 해 오고 있어요.”
“그 얘기를 조사 과정에서는 왜 안 한 겁니까?”
“K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K가 시켰다고 하는 소리를 누가 믿습니까?”
“누군가 K를 대신해서 임상실험을 조작하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
“항상 발신인 불명의 편지로만 지시사항을 받아 왔습니다. 컴퓨터로 쓴 거여서 필적도 없고, 편지가 어떻게 거쳐서 온 건지 알 수도 없게 그냥 어느 날 책상 위에 올라와 있어요. K가 우리 회사의 핵심 투자자만 알 수 있는 사실을 편지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K려니 하는 것뿐입니다.”
고일봉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필웅은 생각에 빠진 채 고일봉과의 면회 자리에서 일어섰다.
‘AG케미컬과 진우현…무언가 관련은 있어. 하지만 만약 정말 몰랐다면? 실제로 진우현은 돈을 받아내기만 하고 뭔가를 제공한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이건 그냥 우연일까? 지경득이나 고일봉이 K의 정체와 관련이 있긴 한 걸까?’
필웅은 AG케미컬의 인간들을 만나면 뭔가 해결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