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당신의 연락처만 알고 있어서
시연과 장경이 소란을 피우고 있던 시각.
다혜의 담당 의사는 사무실에서 오후에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야근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써도 써도 끝이 없는 서류작업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잠시 쉴까….’
한숨을 돌리려던 의사의 눈에 다혜가 오후에 쓴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재다이얼 버튼이 달린 전화기였다. 의사는 별생각 없이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천천히 전화기를 집어 든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재다이얼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 * *
시연은 계단을 올라가 조심스레 좌우를 둘러보았다. 장경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가 온 건물에 들릴 지경이었다. 아마 다혜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희미하게나마 소리를 듣고 나와 볼 법도 했지만, 아직은 별 반응이 없었다.
‘하나하나 다 뒤져 볼 수도 없고 어떡한다?’
그때였다.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방문을 연 듯했다. 시연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빼꼼히 문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혜였다.
“다혜 씨!”
시연은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려다가 순간 상황을 기억해 내고는 재빨리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누가 듣지는 못했는지 복도는 잠잠했다. 다혜도 시연을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시연 쪽으로 뛰어왔다.
“시연 씨!”
“다혜 씨! 이게 대체 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면 말씀드릴게요~”
그때였다.
“거기 누구야!”
누군가가 손전등을 시연과 다혜 쪽으로 비췄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시연이 눈을 찡그리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병원의 경비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런, 들킨 건가?’
경비들의 뒤에 서 있는 것은 화난 얼굴의 의사였다. 다혜도 그쪽을 돌아보고는 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다혜 씨, 이쪽으로!”
시연은 일단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혜도 그 뒤를 쫓았다. 고함을 지르며 그녀들의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혜는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면서 간신히 계단을 내려갔다. 시연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와 정문 쪽으로 향하는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철컥
그런데 아까는 분명히 열려 있던 철문의 손잡이가 아무리 해도 돌아가지 않았다.
“뭐야?”
경비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시연은 다급하게 돌아가지 않는 손잡이를 잡고 낑낑대다가 홧김에 발로 문을 차고는 다혜의 손을 잡고 다시 복도를 달렸다. 경비들도 같은 층에 내려온 듯했다. 시연은 복도를 헤매며 잠시 숨을 곳을 찾아 방문마다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모두 잠겨 있었다. 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혜를 잡은 손에도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혜도 불안하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철컥!
시연은 마구잡이로 열어 보던 방문 중 드디어 열린 곳을 발견했다. 시연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잽싸게 문을 열고 다혜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컴컴했다. 조금 어둠에 익숙해지니, 서서히 안에 있는 사물들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재창고 같았다. 시연은 숨죽여서 조용히 안을 살펴보고는 다혜를 이끌고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먼지 쌓인 커다란 낡은 책상이 보였다. 시연이 다가가 보니 책상 아래에 여자 둘이 충분히 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다혜 씨, 일단 여기 잠깐 숨어 있다가 밖이 좀 조용해지면 나가요.”
다혜는 긴장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거기 없어?”
“여기는 없어!”
“저쪽 한 번 찾아봐! 어디 방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어!”
시연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말에 실제로 방들을 체크하고 있는 듯 방문 손잡이를 거칠게 열어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시연은 이마에 흐르기 시작하는 땀을 초조하게 훔쳤다. 운동화 끈을 꽉 매고 여차하면 전부 엎어 치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철컥철컥
바로 옆 방까지 소리가 가까워졌다. 시연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다혜가 숨을 죽이며 고개를 책상 위로 들었다. 시연은 다혜의 고개를 다시 잡아 숙이게 했다.
-철컥
방문이 열렸다.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터벅터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그녀들이 숨어 있는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시연은 앞으로 살금살금 기어나가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엎어 칠 준비를 마쳤다. 누군가가 책상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연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그 누군가를 기습하기 위해 기색을 살폈다.
누군가가 책상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시연은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어 잡고 바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와당탕!
“으억!”
남자가 비명을 울리며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뭔가 시연의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시연은 흠칫 놀라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밖에서 새어 나온 빛에 드러난 얼굴은 장경의 얼굴이었다.
“형사님…?”
“어이구, 죽겠네….”
장경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허리를 붙잡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형사님? 어떻게 여길?”
“로비에서 소란 피우다가 쫓겨났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저도 뒷문으로 들어와서 찾아다니던 중이었죠. 듣던 대로 굉장한 솜씨네요. 으헉….”
장경은 말하다 말고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장경은 쓴 입맛을 다시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무슨 소리야!?”
장경이 넘어지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급하게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경은 시연과 뒤늦게 일어선 다혜를 잡아끌었다.
“사람들이 오는 모양입니다! 일단 제가 들어온 후문으로 빠져나가시죠, 빨리요!”
* * *
셋은 건물의 후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병원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셋은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거기 누구야!”
누군가가 손전등을 그들에게 비췄다. 시연은 눈이 부셔서 찡그리며 그쪽을 간신히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구의 경비원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었다.
“에이 씨…!”
시연이 여차하면 다가오는 남자들을 엎어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부아아앙, 끼이이익!
거친 엔진소리가 들리더니, 차 한 대가 시연과 남자들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급제동했다.
장경의 차였다. 창문이 내려가며 필웅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해, 빨리 타!!”
시연과 장경, 다혜는 순간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차에 올라탔다.
“저건 또 뭐야! 잡아!”
경비원들이 험상궂게 소리쳤다. 하지만 필웅은 급하게 핸들을 돌려 몰려드는 남자들을 위협하듯 몰아내고는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꺄악!”
차 안이 심하게 요동쳤지만, 그들을 태운 차는 승객들이 뭐라 불평을 할 사이도 없이 게이트를 거의 부수다시피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후…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필웅이 숨을 고르고 나서 다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다혜도 숨이 차서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다혜는 간신히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대답했다.
“일단… 검찰청으로 가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 * *
“대체 무슨 일이야?”
필웅이 시연에게 물었다.
“다혜 씨가 납치당해서 사람들에게 쫓기다가 구출해 나오는 길이야. 후, 십 년 감수했네.”
“그게 무슨 소리야? 납치라니? 설마 강유라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아직 몰라. 다혜 씨가 자초지종을 얘기해 준다니까 같이 듣자. 언뜻 듣기로는 무슨 AG케미컬이랑 관련된 일이라던데?”
“AG케미컬…?”
필웅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확신했다.
‘확실히 AG케미컬을 둘러싸고 뭔가가 벌어지고 있어.’
필웅이 장경과 다혜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 이게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설명할게요.”
조금 진정한 듯한 다혜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웅과 시연은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 AG케미컬의 신약과 관련해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나머지 셋은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얼마 전 AG케미컬이 그 신약과 거의 동일한 성분으로 다른 신약을 개발해서 임상실험을 한다는 광고가 떴어요. 저도 신약과 관련된 내부 정보를 좀 더 파악할 수 있을까 싶어 시험에 지원했죠.”
“그런…!”
“시험 절차 자체는 잘 통제되고 있었어요. 다만, 3번째 투약 후에 제게 이상 증상이 발생했어요. AG케미컬은 저를 즉시 입원시킨 후 대단한 부작용은 아니라고 했지만, 저한테 이런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함구하겠다는 서약서를 적으라고 강요했어요. 그런 식으로 임상실험 결과를 조작해 온 것 같아요.”
“다혜 씨, 시방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겁니까?”
장경이 흥분해서 다혜를 돌아보며 외쳤다. 다혜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아무튼, 서약서를 적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 후로 사실상 저를 그 병원에 가둬 놓은 거예요. 어렵게 전화할 기회를 잡아서 형사님한테 연락을 드려서 오늘 이렇게 빠져나온 거구요.”
필웅은 다혜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 기자님,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아십니까?”
“반성하고 있어요….”
필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홱 젓고는 말했다.
“어쨌든 무사하게 빠져나오셨으니 됐습니다만, 왜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다혜가 주저하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가 매일 사건들을 발견하고, 검사님이나 형사님들 모두 그것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는데… 저는 막상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증거를 가져다드리고 싶었어요.”
“서 기자님. 아니, 다혜 씨.”
필웅이 조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다혜를 바라보았다. 다혜는 필웅이 뭐라고 더 질책을 할까 봐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전에 다혜 씨도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전장이 다를 뿐이라고. 다혜 씨의 전장은 지면이고 저희의 전장은 재판정인 거죠. 우리는 전우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도와주고,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필웅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를 시작한 김이라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각자가 자신의 전장에서, 하지만 같이 싸우는 겁니다.”
다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필웅은 비로소 시연과 장경으로부터 다혜를 구출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와, 검사님 그때 진짜 제가 유단자가 아니었으면 바로 허리 부러졌을 거라니까요?”
“형사님이 무슨 유단잔데요?”
“…아무튼 그런 게 있슴다! 그래서 그 길로 후문을 박차고 뛰어 나오는데 뒤에서 막 경비들이 가스총을 들고…!”
“엥? 경비들이 가스총을 들고 있었어요?”
“제가 똑똑히 봤단 말임다!”
필웅은 피식피식 웃으며 시연과 장경이 입씨름을 하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다혜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혜 씨, 그러고 보니 왜 시연이가 아니라 박 형사님한테 연락한 겁니까? 통화한 내용을 들어 보니 박 형사님보다는 시연이가 더 잘 알아들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다혜가 부끄럽다는 듯 볼을 쓰다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에, 제가 사실 박 형사님 연락처만 외우고 있어서요~”
장경이 벌컥벌컥 마시던 물을 풉- 하고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