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SOS 콜
다혜는 조심스레 서약서를 집어 들었다.
임상실험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비밀로 하고, 만일 이를 제삼자에게 누설할 시에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혜는 한숨을 내쉬며 서약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서약서를 잘 접어 두었다.
‘내 옷가지들은 어디 있지?’
다혜는 몸에 연결된 거추장스러운 링겔들을 빼버리고는 침상 옆의 옷장을 열었다. 다행히 그녀가 입고 왔던 옷들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고 나서 소지품들을 AG케미컬에서 이리로 옮겨다 준 모양이었다. 다혜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옷을 갈아입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녀는 바로 방문으로 향하다가, 생각난 듯 다시 침상으로 돌아와 접어 두었던 서약서를 가방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아까 찾아왔던 의사가 나타났다. 다혜는 깜짝 놀라 헉, 하고는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의사가 의심쩍다는 듯 물었다.
“서다혜 씨? 어딜 가시는 거죠?”
다혜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 저기, 그… 이제 괜찮은 것 같아서요~ 마침 회사에 급한 볼일도 있고…”
“다혜 씨는 직장이 없는 상태 아니었습니까?”
다혜는 아차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게나 둘러댄 게 하필이면 인적사항에 적어 놓은 무직이라는 정보와 맞지 않는 핑계였던 것이다.
“예? 제가 회사라고 했나요? 사실은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의사는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차트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혹시 서약서 받아 보셨습니까?”
“서약서…요?”
“예, 서약서. 아까 책임자가 들렀을 텐데요.”
“아! 그랬죠! 네, 서약서.”
“작성하셨습니까?”
“서약서를요?”
“예.”
“아뇨. 아직.”
의사는 한숨을 쉬고는 삐딱하게 서서 차트를 옆구리에 끼고는 가만히 다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직 경과를 좀 더 봐야 해서 며칠 더 입원해 계셔야겠습니다.”
“예? 하지만 저는 멀쩡한데요?”
“그게 다혜 씨가 그렇게 느끼는 거고 아직 바이탈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의사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다혜를 가볍게 병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게 무슨!”
“식사는 1시간 있다 제공해 드릴 겁니다.”
눈에 띄게 차가워진 의사의 태도에 당황하던 다혜는 미처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병실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의사가 문을 닫았다.
‘이거 완전 감금 아냐? 서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안 내보내 주겠다, 이건가?’
다혜는 오싹한 기운이 척추로 흐르는 듯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 * *
다혜가 병실에서 갇힌 시점보다 조금 이른 시간, 필웅의 사무실에 찾아온 강유라는 자리에 앉아 필웅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필웅은 그녀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AG케미컬이라면 들어는 봤어.”
“그래? 신문 열심히 보는구나?”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왜냐니, 대한민국 검사가 시사에 밝은지 여부를 알고 싶은 건….”
“그거 말고. 내가 AG케미컬을 알고 있는지 왜 궁금하냐는 거야.”
강유라는 아무 생각 없이 찻잔에 입을 다시 가져다 대려다가 이내 질겁을 하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다른 차는 없어?”
“차 마시고 싶으면 커피숍을 가.”
“후, 좋아. AG케미컬 말이야. 얼마 전에 나온 신약 관련 기사는 봤겠지?”
“봤어.”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그 사건 건드리지 마.”
필웅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그거 건드리지 말라고. 어차피 네가 말을 듣는 인간도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러는 거야.”
“또 협박이냐? 이제 알아챌 때도 되지 않았나? 네 협박 같은 건 나한테 안 통해.”
강유라가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이래서 없는 것들은 봐 주면 자기네가 잘해서 그러는 줄 안다니까?”
“이번에 삼영산업을 털어 버렸는데도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너도 이제서야 대한민국 검사 무서운 줄은 안 것 아닌가?”
“검사? 네가? 무서워? 하!”
강유라는 정말 재밌어 죽겠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기묘하게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면 바쁘신 양반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나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잘 봐달라고?”
강유라는 갑자기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필웅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여기 금연이야.”
“피우면 어쩔건데? 기소할 거야?”
강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색의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필웅도 얼마 전까지 흡연자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강유라가 자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워 무는 꼴을 보고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조필웅.”
“….”
강유라가 담배를 후, 하고 내뱉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필웅은 강유라가 웃는 것이 싫었다. 웃는 모습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나를 봐주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돼.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AG케미컬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이번에야말로 옷 벗을 각오하고.”
“이제 그거 안 통하는 거 모르겠어?”
필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긴장했다. 아직은 강유라가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지가 걱정이었다.
강유라는 짜증을 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검사님 나셨네. 너는 내가 본 검사들이랑은 확실히 달라.”
“무슨 의미야?”
“말한 그대로의 의미야. 칭찬이라고 생각해 둬.”
“너한테 칭찬받아봤자 전혀 고맙지 않아.”
“나도 고마워해달라고 한 적 없어.”
강유라가 차갑게 내쏘고는 담배를 길게 빨아들여 필웅의 얼굴 쪽으로 훅 내뱉었다. 방심하고 있던 필웅은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콜록댔다. 강유라는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필웅은 도무지 그런 강유라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삼영산업을 건드린 건 왜 그냥 넘어간 거지? AG케미컬은 또 왜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거야?’
필웅의 머릿속에서 끝없는 의문들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눈앞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댈 뿐이었다.
“담배, 피워?”
강유라가 담배를 그에게 내밀었다. 필웅이 본 적도 없는 외제 담배였다. 필웅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 의외네. 너도 왠지 나랑 동류 같은 느낌이 들어서 피울 줄 알았는데.”
“누가 너 따위랑 동류라는 거야?”
필웅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지만, 그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에 뭔가 켕기는 느낌을 받았다.
사무실에 점점 연기가 점점 자욱해져 필웅은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참다못한 필웅이 강유라로부터 담배를 빼앗으려는 순간, 강유라는 꽁초를 입에서 빼 찻잔에 그대로 던져 넣었다.
필웅은 이를 갈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강유라는 거침없이 핸드백을 집어 들고는 일어섰다.
“나 간다. 배웅 안 해주냐?”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안 펴지네.”
“시시하기는.”
강유라는 또각또각 발소리만 남긴 채 사무실에서 떠났다. 필웅은 넌덜머리를 내며 사무실의 모든 창문을 열어젖혔다.
‘건드리지 말라고? 어디 한 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필웅은 창문 밖으로 강유라가 청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오기가 다시 한번 그를 휘감고 있었다.
* * *
다음 날. 다혜는 병실을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병실은 말이 병실이지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몰래 시험 삼아 복도로 나가자 주위에 돌아다니던 간호사며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운이 좋게 정문까지 나가더라도 누군가가 그녀를 정중하게 병실로 모셔다 줄 것이 뻔했다.
다혜는 답답했다. 서약서를 써서 줘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 후에 다혜가 기사를 쓰거나 이 사실을 고발할 경우 병원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는 뻔했다. 이렇게까지 민간인을 잡아다 놓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인간들이라면, 단순히 위약금을 내놓으라고 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혜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침상에 누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쪽같이 이 병실에서 탈출할 만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이전의 그 의사가 차트를 든 채 들어왔다. 의사는 여전히 다혜가 서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혜 씨, 슬슬 서약서를 작성해 주셔야겠는데요.”
“저는 쓰고 싶지 않은데요.”
“다혜 씨가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다. 집에서 걱정 안 해요?”
그때 다혜에게 번쩍하고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집에 며칠째 연락도 못 했는데, 집에 전화 한 통만 하면 안 될까요?”
“그냥 서약서를 쓰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혜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호소하는 눈빛을 보냈다.
“저 진짜 이런 거 처음 보구요~ 읽어 봤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집에 한 번만 전화한 다음에 열심히 읽어보고 쓸게요. 네?”
의사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다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래도 여러 차례 들락날락했던 다른 AG케미컬의 직원들과 다르게 의사는 조금은 다혜의 처지가 안됐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다혜는 기자 생활에서 다져진 자신의 사람에 대한 관찰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괜히 차트를 보다가 손목시계를 보는 등 초조해 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제가 보는 앞에서 통화하셔야 됩니다. 서약서의 내용이나 시험 내용을 발설하셔도 안 됩니다.”
“좋아요!”
“따라오시죠.”
의사는 다시 차트를 옆구리에 끼고는 뒤돌아서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혜는 행여나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재빨리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랐다.
의사는 자신의 사무실까지 그녀를 안내했다. 정말로 그녀가 전화하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기세였다. 다혜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다혜가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수상한 내용을 말하려고 하면 즉시 의사가 전화를 끊어 버릴 것이었다.
의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짧은 찰나에 다혜는 수십 가지의 생각들을 검토했다. 주로 누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 상황을 알려야 할지, 알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의사는 자리에 앉아 가운을 벗고는 책상 한쪽에 놓인 내선 전화기를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다혜가 자리에 앉자, 의사는 턱짓으로 전화를 하라고 지시했다. 다혜는 긴장해서 떨리는 손으로 차례대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호가 5번도 넘게 울릴 때까지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의사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챌 경우 바로 전화를 끊어버릴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여보세요.”
드디어 전화 너머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다혜는 반가움에 외쳤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