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회사가 이렇게 굴러가도 돼?
“자, 동의서 한 번 읽어주시구요. 혹시 여기에 해당 사항 있으신 분들은 체크 부탁드립니다.”
다혜는 AG케미컬의 임상실험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실험실에 온 참이었다. 그녀 외에도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임상실험에 참여를 희망하고 있었다.
AG케미컬에서 나온 흰 가운을 입은 책임자가 임상실험의 절차를 설명했다.
“일단 시험에 참여하시려면 동의서에 서명을 해 주셔야 하구요, 이번 시험은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의 참여자분들이 신약을 투약해 보시고 부작용이 없는지 알아보는 시험입니다.”
책임자가 신약을 밀봉한 봉투를 참여자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신약 투약 전에 혹시 특정 성분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이 체크리스트도 한 번씩 살펴봐 주시구요.”
책임자는 설명하면서 체크리스트와 동의서 등 수북한 종이뭉치를 참여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한 중년 남성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 혹시 무슨 성분에 알러지가 있는지 모르면 어떡하나요?”
“죄송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이 시험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책임자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책임자는 같이 온 부하 직원에게 중년 남성을 따로 안내해 드리라고 요청했다.
‘생각보다는 절차에 따라서 잘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혜는 동의서와 체크리스트를 읽으며 생각했다. 다혜는 인적사항란에 직업을 적는 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무직이라고 적어 내기로 했다. 만일 기자라고 솔직하게 쓰면 불필요하게 경계심을 일으킬까 봐서였다.
“서다혜 씨는 직업란이 무직이라고 적으셨네요?”
책임자가 서다혜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어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예…취업 준비 중이어서…”
“그래요?”
다행히도 책임자는 별다른 문제를 삼지 않고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서류를 파일에 집어넣었다. 다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자가 밀봉된 신약을 내밀었다.
“말씀드린 신약입니다. 앞으로 몇 번 저희 실험실에 와서 저희 담당자들이 확인하는 가운데 신약을 복용하신 후 경과를 체크할 겁니다.”
“여러 번 하나요?”
“주 3회 정도 할 예정입니다.”
“예….”
다혜는 밀봉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저기 담당자 따라가셔서 약 복용하시고, 2시간 정도 경과 체크한 후에는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책임자가 담당자를 손짓해 불렀다. 다혜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 * *
임상실험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다혜는 3번째 실험실에 방문한 참이었다.
‘다들 좀처럼 입을 열지를 않는군…’
다혜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담당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그녀는 책임자나 담당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보며 그들을 떠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AG케미컬의 직원들은 이 신약의 임상실험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즉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래가지고는 별로 얻어낼 게 없겠는데…’
다혜는 실험 참여자들을 위해 준비된 침상에 누워 생각했다. 아무래도 임상실험 참여를 빙자해 정보를 얻어내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그때 다혜는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속이 메슥거리면서도 어지러운 듯한 기분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데도 마치 건물이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담당자를 올려다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이제는 어지러움을 넘어서 두통까지 느껴졌다. 다혜는 입을 열어 담당자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커, 컥…”
치열한 노력 끝에 간신히 소리 비슷한 것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담당자가 비로소 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서다혜 씨? 서다혜 씨, 무슨 일입니까?”
“수, 숨이…”
다혜는 말하며 계속해서 목을 가리켰다. 하지만 목에 뭔가가 걸렸다기보다는 가슴이 완전히 꽉 막힌 기분이었다. 담당자는 놀라서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그녀의 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선생님, 선생님! 이리로 좀 와주세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담당자가 시험을 도와주고 있던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급한 발걸음으로 다혜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평소같이 신약 복용하고 경과 체크 중이었는데, 갑자기 참여자가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황급히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응급조치를 위한 약물 등을 가져오라고 주문하는 듯했다.
다혜는 이제 눈앞까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의사와 담당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계속해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다혜는 하얀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을 느꼈다.
‘아….’
이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다혜는 힘없이 손을 위로 뻗었다.
* * *
필웅은 사무실의 문을 열다가, 자신의 사무실에 떡하니 찾아온 강유라를 보고 화를 낼 기분까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한민국 검사 사무실이 너희 집 안방이냐?”
“아, 왔어?”
강유라는 주 계장이 마지못해 건네준 찻잔을 받아들고 반갑게 그에게 인사했다.
“계장님… 잠시만 자리 좀 피해 주세요.”
“예.”
주 계장은 오히려 고맙다는 듯이 필웅에게 눈인사를 하고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번엔 또 뭐야? 말해 두는데 행패 부릴 생각이면 바로 기소해 버릴 거니까 조심해.”
“나는 그렇게 실익 없는 짓은 하지 않아.”
“그럼 왜 온 거야?”
“본지 좀 됐다 싶어서.”
필웅은 짜증을 내려다가 한 번 참았다. 왠지 모르게 강유라의 앞에서는 감정의 통제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게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강유라였다.
“차 다 마셨으면 꺼져.”
“요새 한가한가 봐?”
“이거 우연이네. 나도 똑같은 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나는 바빠.”
“뒷주머니로 돈 빼돌리느라?”
강유라의 표정이 새침해졌다.
“나는 그런 짓 안 해. 안 믿기면 삼영패션도 한 번 털어보든가.”
“환담은 됐고, 왜 왔냐고?”
강유라가 차를 들어 한 입을 마시더니 퉤, 하고 옆에 찻물을 뱉어냈다.
“뭐야? 이거 티백이야?”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
“당연히 아니지. AG케미컬이라고 알아?”
필웅은 도대체 왜 주위 사람들이 모두 AG케미컬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다혜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누워 있던 시험 참가자용 침상은 아니었다. 어느 병원의 1인실인 듯했다. 그녀의 팔에 링거 수액을 위한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다혜는 그제서야 비로소 숨을 쉬는 법이 생각난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까보다 확실히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혜는 비로소 진정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에는 그녀 혼자였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의료기기에서 연결된 선이 그녀의 몸에 이리저리 붙어 있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다혜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알 수 없는 곳에 옮겨져 있다는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라도 질러볼까 고민하고 있던 중 문이 열리고 아까 그 의사가 나타났다.
“아, 정신이 드셨습니까?”
“예, 여기는 어디죠?”
“AG케미컬에서 운영하는 병원입니다.”
의사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혜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체크하기 시작했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죠?”
“1-2시간 정돈데,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녀를 진단하던 의사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렵게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건 저희 직원이 따로 설명해 줄 겁니다.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의사가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처음 시험 참여 당시 봤던 AG케미컬의 책임자가 들어왔다.
“다혜 씨, 정신이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인가요?”
책임자는 옆의 의자를 끌어다 다혜의 침상 옆에 놓고는 그 위에 앉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가벼운 항진 반응입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만 앞으로 시험 참여는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다혜는 좀더 시험에 참여해서 AG케미컬의 내부 정보를 알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말했다. 책임자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모든 임상실험에 참여하신 걸로 해서 참가비는 전부 지급 드릴 예정입니다.”
책임자는 다혜가 임상실험 참가비를 다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줄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다혜는 사실 임상실험 참가비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예예,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책임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서다혜 씨. 그런데 말입니다…”
“…?”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책임자가 미리 준비해 온 듯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비밀유지서약서>라는 제목이 다혜의 눈에 들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AG케미컬이 이번 신약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어서요. 다혜 씨가 겪으신 증상은 사실 상당히 희귀한 증상이고 실제 투약 과정에서 발생할 확률은 1만분의 1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번 임상실험에서 그런 증상이 한 번이라도 나타났다는 게 밝혀지면 저희가 이번 신약을 출시할 수가 없게 돼서요. 저희한테 약간만 협조해 주시면 임상실험 참가비 외의 수수료도 톡톡히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임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펜과 종이를 다혜에게 내밀었다.
다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AG케미컬은 신약을 만들 때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요?”
“예? 아아… 그런 것은 아니고, 저희로서는 참으로 불운하게도 가끔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될 증상이 발현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습니다. 뭐, 약이라는 게 원래 부작용도 있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책임자는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펜을 다혜 쪽으로 내밀었다.
다혜는 어이없음을 넘어서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감정을 속으로 삭이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좀 쉬고 싶네요. 알았으니까 다음에 얘기해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서약서는 여기 두고 갈 테니 살펴보시고 서명해 주시면 저희가 불편함 없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책임자는 다혜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두려웠는지 군말 없이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이게… 회사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도 되는 건가?’
다혜는 진절머리를 내며 의자 위에 남아 있는 서약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