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50화 (50/151)

50화 혐의가 있으면 조사해봐야겠죠

필웅은 AG 케미컬의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강유라의 삼영패션을 찾아갔을 때와는 달리 공손하게 접견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사실 지 사장으로서는 딱히 필웅을 만나 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흔쾌히 방문을 승낙해 주었다.

“저도 시도때도 없이 찾아갔는데 검사님이 어려운 걸음하시는 걸 제가 거부해서야 되겠습니까?”

연결된 전화에서 지 사장이 호방하게 말했다. 필웅은 여러 차례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고 나서 AG 케미컬의 본사에 도착했다.

“조 검사님? 이쪽입니다.”

필웅은 로비에서 안내를 받아 사장실 문 앞에 섰다.

필웅은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똑똑.

“검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지 사장이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필웅이 지 사장이 권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삼영산업 사건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생각해 보니 AG 케미컬이 어떤 회사인지 별로 아는 게 없어서요. 앞으로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번은 찾아뵈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필웅은 쉴새없이 지 사장의 표정, 말투, 행동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오신 김에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지 사장이 책상에 붙은 벨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준비해 오라고 일렀다.

“AG 케미컬에서는 어떤 제품을 주로 만들고 계십니까?”

비서가 갖고 온 차를 홀짝이며 필웅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지 사장의 눈이 잠시 반짝 빛났다.

“뭐, 자랑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검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약품 종류는 거의 다 만들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두통약이나 감기약, 뭐 그런 것들인가요?”

“그런 것들도 있죠.”

“진통제 같은 것도 있습니까?”

자랑스럽게 회사의 제품을 소개하느라 들떠 있던 지 사장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기사를 보신 거군요.”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보게 됐습니다.”

“아뇨, 일부러 찾아 보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다 저희가 부족한 탓이지요.”

“기사에 나온 이야기, 사실입니까?”

필웅은 이리저리 돌려 물어보느니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사에 따르면 이미 관련 정부부처에서도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어차피 필웅이 뭘 더 물어본다고 해서 갑자기 AG 케미컬의 경계심이 높아질 이유도 없었다.

“아직은 저희도 자체적으로 알아 보는 중입니다.”

“기사에서는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던데요.”

“저희도 많이 당황스러워서 원론적으로 밝힌 입장일 뿐, 실제로 당장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비자 분들은 충분히 혼란스러우실 수 있죠.”

지 사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겸허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필웅은 잠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뭐지? 정말 뭔가 오해가 있는 건가?’

필웅은 언뜻 처음 지 사장을 만났을 때 떠오른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본 신형 진통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후 그를 만났을 때도, 심지어 지금도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여전히 흐릿했다.

‘기존의 세계에서는 조필웅이, 서다혜가 제대로 관여하지 않았기에 사건이 커지지 않아서 그랬던 걸 수도 있겠군.’

실제로, 대부분의 다른 사건들은 필웅이 주동적으로 사건을 조사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사건이 커져 있는 것들이었으나, 이번 사건은 달랐다.

그래서 다혜가 아직은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했음에도 지 사장을 떠보기 위해 직접 방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 사장의 태도로 봐서는 뭔가 사건이 될 것 같지가 않은 걸.’

예상치 못한 지경득의 태도에 필웅은 점차 자신을 잃어갔다. 만일 그의 회사가 정말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약품을 팔아 수많은 피해자를 낳게 된다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 앞에 있는 지경득은 아무리 봐도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검사님?”

생각에 빠진 필웅을 지 사장이 불렀다. 필웅은 화들짝 놀라 지 사장을 바라보았다.

“예?”

“앞으로도 혹시 저희가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 부탁 드립니다.”

필웅은 딱히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지 사장으로부터 뭔가를 더 알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다.

“예, 차 잘 마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필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장실을 나온 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 * *

사무실에 돌아온 필웅을 이제는 차장검사가 된 이규필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검, 강력부 일은 좀 어때?”

필웅은 먼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이규필 차장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올려 놓고는 이규필 차장의 앞에 앉았다.

“쉽지는 않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 어려운 건 없고?”

“아직은 없습니다.”

이규필 차장이 몇 번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얼마 전엔 강준수 사건도 했다면서?”

“예, 마약 사건 하나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초범인 것 같던데 너무 거칠게 다룬 것 아닌가?”

이규필 차장이 눈을 빛내며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필웅은 도전적으로 그의 눈빛을 마주보는 대신 일부러 약간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예전에 실제로 기소되어 실형까지 받은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같은 혐의로 여러 번 조사를 받은 적은 있는 피고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초범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규필 차장은 흐흐, 하고 웃으며 턱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그래, 그래. 조검이 뭐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그런데 그 후에는 삼영산업 사건도 하나 한 것 같던데?”

“그렇습니다.”

“이거이거, 강력부 오더니 아주 날개를 달았구만! 조만간 스타검사 되겠어!”

“과찬이십니다.”

“혹시 뭐 어려운 거 있으면 얘기하라구. 내가 뒤에서 다 밀어줄 테니까.”

필웅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규필 차장의 표정을 살폈다.

이규필 차장은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리송한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이 진담인지 비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예.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참, 그리고 말이야.”

이규필 차장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왜, AG 케미컬이라고 있지 않나? 외국계 제약회사 말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보니까 그 회사에서 나온 신약에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거 한 번 조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필웅은 조금 놀랐다. 이제까지 이규필 차장이 직간접적으로 수사를 막으려고 한 적은 있어도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 보라고 권유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장이 되더니 사람이 변했나?’

필웅은 다시 한 번 이규필 차장의 의중을 살피려고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여전히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규필 차장의 얼굴은 계속해서 모호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필웅은 그의 표정으로부터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포기하고 원론적으로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혐의가 있으면 조사를 해 봐야겠지요.”

“그렇지? 외국계라고 봐 주거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괜히 기자들한테 먹이감만 주게 된단 말이야.”

“그렇지요.”

“한 번 잘 파보라구. 내 감엔 뭔가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아.”

이규필 차장은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에 빠져 있다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필웅을 불렀다.

“필웅아.”

“예?”

“진우현이 사건 때 내가 그렇게 행동해서 너도 많이 실망했을 거 안다. 진우현이가 유서까지 남기고 나서 죽고 나니까 그때서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걸 알았지.”

이규필 차장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잘 안다. 이놈아, 나도 진우현 같은 놈 뒤 봐주고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필웅은 말하면서 혹시 거짓말이 들통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이규필 차장은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필웅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그 때의 일에 대한 사죄의 뜻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나도 이제는 조직 안에서 힘이 좀 생겼으니 네가 수사하는 건 적극 도와주마. 진심이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이규필 차장은 잠시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십니까?”

“선배가 오래 있어봤자 불편하기밖에 더 하냐. 얼른 퇴근해라.”

이규필 차장이 손을 흔들며 필웅의 사무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필웅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규필 차장님을 오해한 건가?’

분명 진우현 사건 당시 이규필 차장은 은근슬쩍 진우현을 보호하려고 들면서 필웅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했었다. 필웅은 당시 그가 예전에 선배로서 해 준 조언들까지 사실은 모두 자신의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 만난 이규필 차장은 완전 딴판이었다. 필웅이 처음 그를 만나 좋은 상사라고 생각했을 때의 모습을 다시 되찾은 것 같았다. 필웅은 대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됐든, 혐의가 있으면 수사를 해야겠지.’

생각해 보면, 필웅은 이규필 차장이 시키든 시키지 않든 돕든 도와주지 않든 AG 케미컬의 사건은 수사해 볼 생각이었다. 이규필 차장이 뭐라 하든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필웅은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내심 이규필이 허튼 소리를 하면 나중에 써먹기 위해 녹음해 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별 쓸모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필웅은 일단 AG 케미컬의 신약과 관련된 기사와 자료들을 수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혜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최근 들어 다혜는 장경이나 필웅, 시연에 대한 묘한 미안함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왠지 자신은 중요한 사건이라면서 야단법석을 떨어 놓고 정작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장경이나 필웅, 시연에게 떠넘기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내 일은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취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사건 조사에 밤을 새우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필웅이나 장경을 보며 뭔가 더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사건만 해도 그렇지.’

다혜는 한숨을 쉬며 스크랩해 둔 AG 케미컬의 신약 관련 기사들을 내려다 보았다.

AG 케미컬 신약의 부작용과 관련해서 한 번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에 전문적인 분야여서 심층 취재가 이뤄지지 못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기자도 어느 샌가 다른 사건에 매달려서 추가적으로 보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혜는 이 사건에 이대로 잊혀지거나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응?’

다혜는 이리저리 신문들을 살펴 보다가 광고란에 작은 모집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AG 케미컬이 낸 신약 임상 테스트에 관한 공고문이었다.

문제의 진통제는 아니었지만 AG 케미컬이 유사한 효과를 가진 다른 신약을 개발 중인 모양이었다. 새로운 신약에 대한 임상 테스트를 실행하기 위해 테스트 참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다혜는 천천히 광고를 읽어나갔다.

‘가만, 이 제품도 비슷한 내용의 신약이니까 이 테스트에 참여해 보면 AG 케미컬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다혜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리스크는 있지만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다혜는 광고에 나온 연락처를 살펴 보고는, 테스트 참여를 위해 제출해야 하는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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