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옳은 일에는 대가가 필요 없다
안 그래도 소란스러웠던 재판정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을 뚫고 오 사장의 변호인이 이시원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증인이 오늘 한 말과 지난 기일에서 한 말은 완전히 양립불가능한 내용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증인은 지난 기일이나 이번 기일에 위증을 한 것입니다!”
최 판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호인을 바라보았다.
“계속하세요.”
“한 기일이 종료되기 전까지 증언이 취소되지 않은 채 다음 기일에서 증언을 번복하면 이는 위증입니다! 여기 계신 재판장님이나 검사님 모두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시원 증인은 지난 기일에서는 자신이 삼영산업을 고발한 것은 모두 돈을 타내기 위한 공갈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일에 와서는 그런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위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변호인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최 판사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필웅을 바라보았다.
“검사 측, 변호인의 주장에 일리가 있군요. 증인을 위증의 죄로 기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시원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최 판사와 변호인, 필웅을 차례로 연달아 돌아보았다.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시원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필웅이 최 판사와 변호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들을 하고 계시는군요. 이시원 증인은 단순히 증언을 철회했을 뿐 위증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최 판사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일갈했다.
“검사 측, 지금 말장난하는 겁니까? 증언을 번복했다면 그게 바로 위증 아닙니까?”
변호인도 그것 보라는 듯 으스대며 필웅에게 최 판사와 똑같은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니까, 증언의 내용을 바꿨지만 위증은 아니라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저기 검사님, 그게 그거지 대체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변호인이 더 이상 못참겠다는 표정으로 대들듯이 필웅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필웅이 그를 돌아보고는 도전적으로 그에게 더 다가섰다. 덩치가 좋은 편인 필웅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자 변호인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변호사님께서는 법전을 제대로 읽지 않으시나 보군요. 형법 제152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제가 그것도 모르고 위증 이야기를 꺼냈겠습니까? 법률에 의해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한다면 위증의 죄로 처벌한다는 것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도 차이점을 모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변호인은 콧방귀를 뀌고는 팔짱을 끼면서 턱을 들어올렸다.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잠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필웅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알려 드리죠.”
필웅이 도전적으로 최 판사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지난 기일에서 이시원 증인이 한 증언은 불법한 절차 하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니 위증죄를 범할 수도 없습니다!”
최 판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필웅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들으셨지 않습니까. 이시원 증인은 지난 기일에 법률에 따른 선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공판조서를 읽어 보시면 될 것 아닙니까?”
공판조서란 공판이 이뤄질 경우 공판의 현황과 진술 내용들을 기록해 두는 일종의 회의록 같은 문서였다.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이나, 증인이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한 모든 정황은 공판조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그럴 리가?”
최 판사는 황급히 서기관으로부터 지난 공판기일의 공판 조서를 건네 받고는 뚫어지게 조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증인은 지난 기일에 선서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선서는 했습니다.”
“조 검사,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필웅이 책상을 짚고 최 판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재판장님, ‘법률에 따른’ 선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법률에서 정해진 선서문을 읽고 선서를 해야 한다는 의미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에 더해, 법률에 따른 선서란 선서를 하는 방법과 절차 또한 모두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절차에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필웅은 자신의 자리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이시원의 앞에 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불안해하는 이시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형사소송법 제148조에 따르면, 만일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탄로날 수도 있는 사안에 대해 증언을 요청 받을 경우 증인은 그러한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선서하는 증인에게 증언거부권도 고지해야 하지요.
그런데 지난 번 기일에서 변호인이 증인에게 뭐라고 질문했습니까?
삼영산업을 공갈협박하기 위해 사실을 꾸며낸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었죠?”
필웅이 갑자기 변호인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변호인은 자기도 모르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원 증인은 이미 무고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갈협박과 무고죄는 엄밀히 별개의 사건입니다. 만약 이시원 증인의 증언 내용 자체가 스스로 공갈협박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라면, 그러한 증언이 이뤄지기 전에 증언거부권이 있다는 점을 먼저 고지해 줬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증인에게는 증언거부권이 고지되지 않았고, 따라서 증인이 한 선서와 증언은 형사소송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모두 무효입니다!”
소란스러웠던 재판정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모두 필웅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있거나, 곱씹은 후 이를 갈고 있는 중이었다.
오 사장의 변호인은 후자였다.
“그런 얄팍한!”
“얄팍하다뇨? 제가 뭘 어떻게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 때 증언거부권을 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증언거부권을 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그 사실을 말해 줘야 합니까?”
“그만!”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는 필웅과 변호인을 보고만 있던 최 판사가 신경질을 내며 책상을 두드렸다.
“검사 측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군요. 지난 증인신문 당시 증언은 법률에 따라 선서한 상태에서 한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위증의 대상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좀 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요.”
최 판사가 씹어뱉듯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가며 말했다.
필웅의 주장에 일견 틀린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사실 필웅의 주장은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었다.
1998년 당시 법원은 증언거부권을 고지하지 않고 선서해도 불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한 판결이 뒤집어진 것은 빨라 봐야 2010년경이었다.
그러나 필웅의 주장이 갑작스러웠기에 변호인과 판사는 그만 당황해 버렸고, 필웅의 지적도 워낙 조리 있었기에 최 판사도 얼떨결에 필웅의 주장을 인정해 버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필웅은 미래의 판결례를 가져와 과거의 사건에 적용을 시도했고,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변호인, 이제 좀 사건과 관련 있는 신문을 부탁합니다.”
필웅이 최 판사에게 가볍게 목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실 그도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판사와 변호사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그도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변호인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시원에게 향했다.
“이시원 증인,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증언은 번복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증언하면 그걸로 끝이란 말입니다. 회사가…….”
“지금 이게 질문입니까?”
이시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끊고는 필웅 쪽을 돌아보았다. 필웅이 손을 들고 외쳤다.
“재판장님, 변호인이 사건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증인을 회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변호인, 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을 질문하세요.”
최 판사는 안 그래도 위신이 떨어져서 짜증이 나 있었기에 변호인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며 까칠하게 말했다.
변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잠깐 뒤로 물러났다.
“좋습니다. 증인은 회사의 내부 자료들을 어떻게 손에 넣은 겁니까? 어떤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원래 재무팀이었기 때문에 재무 관련 자료를 열람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그래도 재무팀이라고 모든 자료를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볼 수 없죠. 하지만 제가 본 자료들만 가지고도 회사가 비정상적인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점을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안정을 되찾은 이시원은 초연한 목소리로 따박따박 변호인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변호인은 이미 위증으로 걸고 넘어지려다가 실패하고, 이시원이 냉담한 태도로 조리에 맞게 대답을 이어가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면, 음, 증인은 사건을 회사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왜 이를 굳이 공론화시킨 겁니까? 증인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어떤 대가를 노린 것은 아닙니까?”
이시원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보세요, 변호사님. 이미 저는 회사 내부에서 좋게 좋게 사건을 해결하려고 팀장님한테 먼저 상의도 드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회사는 오히려 저를 괴롭히다가 해고해 버렸구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회사에서 나왔으니 이미 회사와 관계 없는 사람이 됐으면서, 왜 굳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 일을 폭로한 겁니까?”
변호인이 이제는 거의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시원은 이에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변호사님은 누군가 돈을 주지 않으면 옳은 일을 해야겠다는 자각 자체가 없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안 그래도 이미 당황과 분노로 벌겋게 익어 있던 변호인의 표정이 더 달아올랐다.
변호인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상이라고 우물거리고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오 사장은 자리로 돌아오는 변호인에게 질시와 경멸의 눈빛을 보내왔다.
‘한심한 인간, 돈값도 못하는군!’
그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웅은 나영전이었을 당시 사건이 잘 안 풀리면 재벌 회장님들이 보내 오던 눈빛과 그 눈빛이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기일 종료하겠습니다.”
최 판사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재판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듯 빠르게 재판의 종료를 선언했다.
* * *
“검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2회 공판기일의 다음 날 시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닙니다, 감사는요. 아직 판결도 나지 않았는데요.”
“아직 결과야 모르는 겁니다만, 그래도 재판에서 제가 할 말을 다 할 수 있어서 속이 시원했습니다.”
“무고 사건도 잘 풀려야 할 텐데요.”
“맡아 주신 변호사님이 이번 사건 결과가 잘 나오면 무고죄 재심도 유리하게 갈 수 있답니다.”
“이런. 이번 사건 결과가 정말 중요하겠네요.”
“잘 되겠지요. 모두 검사님 덕분입니다.”
“모두 시원 씨가 용기를 내 주셔서죠.”
필웅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공판기일에서 시원이 마지막으로 한 말에 필웅도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필웅도 사실 살짝은 도대체 왜 시원이 그렇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삼영산업의 비리를 고발하는 일에 몰두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시원 본인에게는 끝없이 손해만 안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원은 그 이유에 대한 대답으로 필웅까지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미 아주 오랜 옛날 잊어버린 것 같은 중요한 원칙이 갑자기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필웅, 아니 영전도 어렸을 때는 그랬다. 남을 도와주고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는데 대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그가 자라면서 대가 없는 도움만을 끝도 없이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고, 어렸을 적의 원칙은 점점 흐려져갔다.
‘옳은 일에는 대가가 필요 없다.’
필웅은 전화를 끊고는 시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피곤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아무런 대가 없이 옳은 일을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