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증인은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필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내용이 AG 케미컬의 제품에 관한 기사라는 거군요.”
“네. 하지만 아직은 약품과 부작용 간에 명명백백하게 관계가 규명된 단계는 아니긴 해요.”
필웅은 신문을 접어 책상에 내려 놓고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꼿꼿이 일어섰다.
“여기도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다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입증된 건 아니래요. 취재한 기자가 제 친군데, 사실 근거자료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1면에 실으려다가 8면에 실은 거거든요~”
“설마 민주일보에서 근거도 없이 기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필웅이 장난치듯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다혜가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 이 기사의 내용은 말씀드릴까 말까 조금 고민했어요.”
필웅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다혜가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검사님 요새 너무 바쁘시잖아요. 저도 사건을 파는 건 좋아하지만, 정작 해결은 전부 다 다른 분들한테 떠넘겨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필웅이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게 저와 기자님의 역할이지 않습니까? 기자님은 저희한테 영감을 주고, 저희는 수사를 하는 거죠. 반대면 이상하잖아요?”
“그건, 맞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다음에도 다른 사건이 있으면 꼭 저한테도 이야기해 주세요. 물론 사건 청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눈여겨 볼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바래다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고맙죠!”
다혜도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는 필웅을 따라나섰다.
* * *
삼영산업의 공판 기일.
필웅은 새로 알게 된 AG 케미컬의 사건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은 현재 진행 중인 삼영산업의 사건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최창칠 판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검사 측, 같은 증인을 신청한 겁니까?”
필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최 판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리저리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뭐, 좋습니다. 변호인 측이 새로 신청한 증인이 있으니, 변호인 측 증인부터 증인신문 시작하겠습니다.”
한 남자가 증인석으로 걸어나와 증인 선서를 마쳤다.
변호인이 걸어나와 물었다.
“증인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죠.”
“저는 예전 이시원 씨와 함께 근무했던 최정운 팀장이라고 합니다.”
필웅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증인을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 건지 한 번 볼까.’
“그렇군요. 평소 이시원 씨의 근무 태도에 대해서 증언해 주시겠습니까?”
“이시원 씨는…….”
최 팀장은 흘긋 필웅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시원 씨는 평소에도 근무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한테 오더니 회사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면서 이런 저런 자료를 보여주더군요.
제가 걱정이 되서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스스로 수집한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 되서 이런 기밀자료들을 함부로 뽑아 보면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시원 씨가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갑자기 화를 내더니, 자기는 이 자료들을 터뜨리겠다면서 이 자료들이 공개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임원진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나게 해 주었나요?”
“제가 간곡히 부탁 드려서 재무이사님을 만나뵙긴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죠.
그 후로도 이시원 씨의 근무실적이 계속 좋지 않아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징계를 내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시원 씨가 해고당한 건 근무실적이 좋지 않아서지 내부고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필웅은 그제서야 갑자기 회사가 새로운 증인을 신청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증인의 신빙성을 공격하려는 거로군.’
필웅은 혀를 찼다. 이렇게 되면 결국 최정운과 이시원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귀다툼으로 변질되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검사 측, 증인신문하세요.”
필웅은 생각에 빠진 채로 증인석으로 걸어갔다.
필웅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증인, 증인은 이시원 씨의 직속 상사였죠?”
“그렇습니다.”
“이시원 씨가 제시한 자료들을 봤습니까?”
“봤습니다만, 원래 재무 자료라는 게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어느 쪽으로 빠져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계속 그렇게만 생각하게 되는 거죠.”
최정운 팀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이미 말을 대충 맞춰 왔군.’
재판에 참여하는 어느 일방이 자신이 신청한 증인과 사전에 말을 맞춰 오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재판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보통은 사전에 증인과 접촉하면서 어떠어떠한 방향으로 증언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엔 아예 어떻게 증언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침을 준 것 같이 보였다.
필웅은 고심 끝에 물었다.
“만약 증인 본인이 실제로 삼영산업의 비리를 알아냈다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최정운 팀장이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내용까지 사전에 답변을 준비해 오지는 않은 듯했다.
“글쎄요, 일단은 좀더 신중히 알아봤겠죠.”
“신중히 알아본 후에 100% 확신이 들었을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최 팀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오 사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 사장은 최 팀장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최 팀장이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공론화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본인이 회사의 비리를 100% 확신할 경우에도 고발을 주저했을 텐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면 당연히 저지하려고 하겠군요?”
“그건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자신이 100% 확신하는 불법에 대해서도 입을 다무는데, 자신의 부하가 단지 불법을 주장하는 데에 불과할 때에는 더더욱 입을 다물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최 팀장은 거의 울상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필웅은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거기서 그치지는 않았다.
필웅은 자리로 돌아와 자료들을 갖고 와 최 팀장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증인, 이 자료들을 보세요.
삼영산업에서 매년 거액의 자금이 로터리 컨설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경영컨설팅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 회사가 삼영산업에 제공한 리포트라고는 대학생들이 과제로 내기도 창피할 법한 1장짜리 보고서가 다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거래라고 생각합니까?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는 자료라구요? 팀장님 같으면 이런 보고서 한 장에 수억 원씩 쓰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다면 검사 그만두고 제가 하고 싶네요.”
말하며 필웅은 오 사장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오 사장은 여전히 구경 온 방청객인 마냥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상입니다.”
필웅은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어찌 됐건 모두 자신의 일자리와 생활이 걸린 일이었다. 필웅은 매섭게 최 팀장을 몰아붙이기는 했지만, 최 팀장도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 저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잘못인데 밑에 있는 사람들만 서로 눈치를 보고 칼로 등을 찔러대는군.’
신문을 마친 것을 확인한 최 판사가 손을 들어 이시원을 증인석으로 오라고 불렀다.
“이시원 증인, 증인석으로 나오세요.”
이시원이 굳은 표정으로 증인석에 섰다.
“증인, 선서하세요. 선서 마치면 검사 측에서 먼저 신문하세요.”
이시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선서문을 읽어내려갔다.
선서문 낭독이 끝나자, 필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증인, 일전 기일에서 진술한 내용, 즉 금전적 이득을 위해 오 사장을 고발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이시원은 잠시 묵묵히 침묵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재판정이 크게 술렁였다.
웅성거림은 주로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삼영산업의 임직원들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작은 소리지만 욕설을 내뱉는 소리도 분명히 들려왔다.
필웅은 소란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증인, 증인이 과거 내부고발을 한 이후 삼영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었죠?”
이시원은 과거 필웅에게도 해줬던 이야기를 다시 조용히 반복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선후배의 백안시, 대기발령, 그리고 해고까지.
그리고 해고를 당한 이후 어려워진 가정 형편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어졌다.
매일 일용직 근로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는 이시원의 고백이 끝나자, 필웅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군요.”
“과거 증인이 삼영산업을 고발한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시원은 잠시 긴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했다.
“저는 삼영산업의 재무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다른 회사에 지속적으로 용역대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그 회사로부터 받은 게 없다는 걸 깨달았죠.
형식적으로 1장짜리 보고서가 오고가곤 했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보고서들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거래처를 들여다 보니,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회사들이더군요.”
이시원은 잠시 말을 끊고 옆에 놓여진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래서 그 후로 몇 달 동안 그런 유사한 자금 흐름이 있는지 조사해 봤습니다. 한 두 군데가 아니더군요. 그리고 그 회사들의 지분 관계를 들여다 보니 저희 회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두 어떤 개인들이 소유하는 회사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개인들이 누군지는 확인하기 어려웠죠.
저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직감하고 저기 계신 최정운 팀장님에게 이를 보고했습니다. 팀장님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색이 새파래지더니 혹시 다른 사람도 이 일을 아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죠.”
시원은 뭔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목이 메인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때부터였습니다. 팀원들도 알게 모르게 저를 따돌리기 시작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더군요. 하루는 잠시 밖에 나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저를 흉보는 소리를 듣고는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저는 그래서 계속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충분히 자료가 모였다고 생각한 저는 회사의 비리를 고발했죠. 그런데…….”
이시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힘들게 모은 자료를 경찰이나 검찰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신은 회사에서 배척당하다가 결국 해고 당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이시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결과는 아시는 대로였고, 저는 다시 제 억울함을 풀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증언에 감사 드립니다.”
그 때 오 사장의 변호인이 갑자기 일어섰다.
“위증입니다! 이시원 증인은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필웅은 미간을 구기며 오 사장의 변호인을 돌아보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