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확실히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필웅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차를 마시는 지경득 사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강유라, 나아가 삼영산업의 오 사장으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강유라와 오 사장은 곁에 다가서기만 하면 ‘너를 경멸하겠다’라는 분위기를 온 몸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강유라와 오 사장의 외면적인 성격은 달랐지만, 그 본질은 비슷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지경득이 보여준 모습은 뭔가 달랐다.
그는 소위 ‘서민들’을 경멸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기업가로서의 신념이 몸 속에 자리잡은 듯했다.
그래도 필웅은 그를 선뜻 믿어도 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금 바로 답변을 드려야 합니까?”
필웅이 생각 끝에 물었다.
지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제안을 드리러 온 것 뿐입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검사님의 선택이시니 제가 당장 답변을 강요할 이유도 없지요.”
“다행이군요. 좀더 생각해보고 연락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제 비서인 차 실장에게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명함을 건넸다. 그가 바로 차 실장인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 사장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공손하게 자리를 떴다.
강유라나 강준수 같은 부류들만 상대해 오던 필웅은 그 모습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떠나자, 시연이 필웅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할거야?”
“글쎄.”
“쉽게 믿어도 될까?”
시연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연 역시 갑자기 찾아와 호의를 베풀겠다고 하는 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는 사업가에게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도움을 대가로 우리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일단 빚을 지워 두고 나중에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하는 걸 수도 있지.”
“만약 그 도움이 우리가 받아 들여서는 안 되는 불법적인 청탁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우리에 대한 청탁이 아니고, 단순히 내부고발자를 공익적인 면에서 도와 주겠다는 거니까.”
시연은 조금 주저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맞는 건 같은데, 뭐랄까. 나는 그냥 저 사람을 쉽게 신뢰해도 될지 의문이 들어.”
필웅의 표정도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필웅은 얼굴을 펴고 말했다.
“나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냐. 그리고 앞으로도 그를 신뢰해도 될지는, 조금 지켜보면 알겠지.”
* * *
필웅은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살펴 보았다.
필웅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AG 케미컬의 자료들이었다.
AG 케미컬은 과거에도 몇 차례 한국 회사들의 회계 부정이나 배임 사건 등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었다. 심지어 직접 한국 회사들을 고발한 적도 있는 것 같았다. AG 케미컬의 지 사장이 이야기한 대로, AG 케미컬이 한국 회사의 부정부패를 강하게 비판해 온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정말 그게 다인가?’
필웅은 눈 앞의 자료들을 보면서도 고민에 빠졌다.
‘AG 케미컬은 회사지 시민운동단체가 아니야. 단순히 대표가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 실익도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전념할 리가 없지.’
필웅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자료들을 들춰보았다.
AG 케미컬이 고발해 온 회사들. 그 중에는 삼영그룹의 소속회사도 있었고 다른 회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음?’
대부분의 회사가 제약회사이거나 제약회사의 자회사 등 실질적으로 약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회사들이었다.
‘그럼 그렇지.’
필웅은 그제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AG 케미컬은 지 사장이 말하듯 오로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와 시장의 정의 실현을 위해 한국 회사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발하는 대상은 주로 그들의 경쟁회사에 집중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삼영산업이 수입해 국내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는 의약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삼영산업 역시 AG 케미컬의 경쟁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필웅은 들고 보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으면서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오히려 알고 나니까 더 고민이 되네.’
AG 케미컬의 목적이 단순히 이시원을 돕고 싶어서라거나 시장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시원을 다시 사건으로 끌어올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가 찾아가서 본 이시원의 현실은 냉혹했다. 그로서는 이미 무너져 버린 현실을 못 본 척하면서 끝까지 정의를 위해 싸워 달라고 입을 열기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경쟁회사들만을 타겟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 날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 * *
다음 날 이시원의 집.
필웅은 시원과 마주앉아 있었다.
필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시원은 한사코 필웅이 집에 찾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필웅은 잠깐이면 된다고 시원을 간곡하게 설득했고, 시원은 5분만 들렀다 가는 것을 조건으로 마지못해 승낙했다.
시원은 필웅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협박입니까? 회유입니까?”
“…후자입니다.”
필웅은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이게 뭡니까?”
시원이 명함을 들어 살펴 보았다.
차 실장의 명함이었다.
“AG 케미컬?”
“연락해 보시죠.”
“무슨 뜻입니까?”
필웅이 시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시원 씨, 정말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시원은 고개를 돌렸다.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원 씨.”
“저도 가정을 생각해야지요. 제 욕심 차리자고 아내한테 언제까지고 이런 삶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필웅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처음에 그는 단순한 정의감에서 이 일을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가정이 무너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부인에게 부채감을 느껴왔을 그를 상상하며 필웅은 딱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서도 그의 행동에 경악했지만 쉽게 분노하지 못했다. 그 역시 삼영그룹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료들은 그래도 괜찮다고 필웅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었지만,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라도 물러나서는 안 돼. 현실에 타협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웅이 어제 AG 케미컬의 목적을 깨닫고는 쭉 해왔던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필웅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돌리는 시원의 눈을 억지로 마주보았다.
“시원 씨. AG 케미컬에서 시원 씨를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눈을 피하던 이시원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시원은 천천히 필웅에게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움을요?”
“예. 시원 씨가 AG 케미컬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AG 케미컬이 왜 그런 일을 합니까?”
“AG 케미컬은 한국 회사들이 편법으로 부를 늘려 나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사건에서 노동자의 편을 든 적도 있구요. 이것 좀 보십시오.”
필웅은 준비해 간 자료를 내밀었다.
필웅도 일찍이 살펴봤던 AG 케미컬이 한국의 회사들을 고발한 내용에 관한 기사들이었다. 물론 필웅은 AG 케미컬의 진정한 목적을 얼추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이시원에게 이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시원은 눈을 부릅뜨고 꼼꼼하게 필웅이 준비해 간 자료들을 읽어내려 갔다. 필웅은 입을 닫은 채 초조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침내 자료를 모두 읽은 시원이 자료를 내려 놓고 긴 한숨을 쉬었다.
필웅이 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시원이 필웅을 돌아보며 좀더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증언하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겁니까?”
* * *
필웅은 다시 이시원을 증인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필웅은 남의 손을 빌려 일을 해결한 느낌이 찝찝했지만, 한편으로는 강유라에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통쾌하기도 했다.
필웅이 사무실에 돌아오고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AG 케미컬의 지 사장이었다. 그는 예의 예절 바른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필웅에게 말을 건넸다.
“검사님, 안녕하십니까.”
“예, 사장님이셨군요.”
지 사장은 필웅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필웅은 주 계장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하고, 손수 차를 끓여 지 사장의 앞에 놓았다.
지 사장은 맛있게 향을 맡고는 차를 한 입 마셨다.
“맛있군요. 허허, 저는 아무리 좋은 찻잎으로 차를 끓여 봐도 이 녹차 티백만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감사 인사를 들으러 오신 거라면,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지 사장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필웅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필웅은 지지 않고 그 눈빛을 맞받아치며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지 사장이 딸각 하고 찻잔을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검사님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아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럼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말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좋은 일을 하게 된 거니까요.”
지 사장은 쿡쿡 웃으며 차를 한 입 더 마시고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 사장은 사무실을 떠나면서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필웅은 지 사장의 담백한 태도에 오히려 혼란에 빠진 기분이었다.
지 사장이 떠나고 필웅만 혼자 남은 사무실에 또다시 누군가가 찾아왔다. 서다혜였다.
“검사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필웅은 다혜를 반기며 일어섰다.
“아, 서 기자님. 웬일이세요?”
다혜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까 AG 케미컬의 지 사장을 본 것 같아서요~ 혹시 여기 왔었나요?”
필웅이 놀라 물었다.
“서 기자님이 지 사장을 어떻게 압니까?”
“역시 왔던 게 맞았군요.”
다혜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필웅도 그 앞에 앉으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서 기자님이 지 사장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리고 그가 왔다는 게 왜 그렇게 조심해야 할 일이죠?”
다혜가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신문 한 부를 꺼냈다.
“어제 나온 기산데 아직 못 보셨나 보네요.”
신문은 어제 일자의 민주일보였다. 필웅은 무슨 소린가 싶어 일단 1면부터 찬찬히 기사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아뇨, 1면에는 없고 8면쯤 있을 거에요~ 원래는 1면에 실으려고 했던건데 최종 편집 과정에서 밀려나서.”
다혜가 아쉽다는 듯 필웅이 쥐고 있는 신문을 넘겨 주었다.
8면의 한 구석.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닌 것 마냥 눈에 띄지 않는 한 귀퉁이의 자리였다.
‘이래가지고는 열심히 신문을 읽었더라도 그냥 모르고 지나갔겠는걸.’
손바닥만한 크기의 기사 하나가 지면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형 진통제, 정말 안전한가?
최근 한 외국계 기업에서 생산하는 신형 진통제를 복용한 환자들에게서 정체불명의 부작용이 발생하는 사태가 늘어나 논란을 빚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해당 제품을 조사하여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각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기업의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신형 진통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질환들은 실제로는 해당 제품과 무관하며, 이러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경우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
‘이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