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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45화 (45/151)

45화 그냥 내가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강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사방이 난장판인 모습을 본 강유라는, 혀를 차며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필웅,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도 머리가 나쁜가 보네?”

필웅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태연하게 강유라에게 반말을 하는 필웅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삼영산업의 직원들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강유라는 뭐라고 말을 더 이으려다가, 이목이 많은 것을 눈치채고 잠시 다물었다.

잠시 후 강유라가 화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자꾸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지 말라고 얘기했을텐데? 내 말이 어렵니?”

“위법한 사실을 발견하면 수사를 하는 건 검사의 의무니까.”

“지랄하지 말, 후……. 좋아. 조필웅 검사님. 이 사건은 예전에 이미 무혐의 처분도 나오고, 고발자도 무고죄로 실형을 받은 걸로 아는데요.

이제 와서 개처럼 주둥이 들이밀면서 킁킁대는 이유가 뭔가요?”

강유라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겉으로는 공손하게 필웅에게 물었다.

필웅은 팔짱을 끼면서 가만히 강유라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콧대 높은 강유라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필웅은 그의 말을 기다리는 강유라의 속이 터질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설명해 드리죠.”

강유라는 어디 한 번 입을 놀려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느릿하게 필웅을 노려보았다.

필웅은 집게손가락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대답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웬일로 존대를 해 주셨으니 저도 예의를 차려 드리죠.

첫째, 이 사건은 당초에 증거가 부족해서 무혐의 처리되었던 사건입니다. 즉 증거가 충분한 상황에서 범죄인지 여부가 판단된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추가적인 증거를 확보하면 결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유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필웅은 좌우로 천천히 왔다갔다 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둘째, 재판에서 판결이 나온 사건을 동일한 죄목으로 다시 수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혐의 결정이란 그저 검사가 내린 결정일 뿐이죠. 다른 검사가 사건을 봤을 때 충분히 혐의가 있어 보인다면 다시 수사를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셋째는?”

“셋째는, 그냥 내가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뭐?”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일 규정에 위반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냥 계속 파 볼 생각이었거든요.”

필웅이 강유라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유라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삼영그룹을 상대로 도발을 하시겠다? 이러고도 정말 무사할 거라 생각해?”

“입 조심하세요. 내가 이래 보여도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검사를 협박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필웅은 일부러 다시 존대말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일손을 멈추고 모두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무실의 사람들에게 확실히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그림대로라면, 강유라는 자기 성질을 못 이기는 버릇 없는 재벌가의 영애로 보이고 필웅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프로페셔널로 보일 것이었다.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 줄 필요는 없지.’

그간 강유라를 상대하면서 필웅이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 사무실의 직원들 사이에서 조금씩 동요한 듯한 속삭임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강유라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인식했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유라의 눈길이 닿자, 직원들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양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주위를 조용히 시킨 강유라가 말했다.

“그래요, 제가 실례했네요.”

“예, 많이.”

“또 볼 일이 있을 겁니다.”

“저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유라는 필웅을 쏘아 보고는 보디가드 김 실장을 대동한 채 사라졌다.

필웅은 태연하게 말했다.

“자, 자료들 다 담았으면 가십시다.”

* * *

이시원의 집.

필웅은 시원과 마주앉아 있었다.

“준비는 다 된 겁니까?”

시원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묻는 시원의 표정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필웅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 시원 씨가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뭐죠?”

“공판에서 증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원은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듯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제가 증언하기만 하면 삼영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 문제가 없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추가로 확보한 자료들에 시원 씨의 증언까지 더해지면 빠져 나갈 구멍따윈 없을 겁니다. 다만.”

“다만?”

“삼영산업의 비리를 공개하는 데 성공하면, 시원 씨는 다시는 삼영그룹에 복직하지 못할 겁니다.”

이시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지금도 희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시원은 말을 마친 후 오래되고 좁은 그의 집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환경을 아내에게 계속 강요해야 한다는 게 조금 걱정이기는 합니다.”

필웅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가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원은 자신의 삶을 걸고 이 재판에 임하고자 하는 것이다.

재판에서 삼영산업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시원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믿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는 작은 만족감 정도가 그가 얻을 수 있는 보상일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필웅은 반드시 증언을 해 줘야 한다고 강하게 설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만일 예전의 나영전 같았으면 오히려 왜 그런 실익도 없는 짓을 하냐며 그를 타박했을지도 몰랐다.

“정말 성공할 수 있는 거지요?”

시원이 재차 물었다.

필웅은 이미 그가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해 보죠.”

시원은 필웅의 손을 굳게 잡았다.

* * *

삼영산업 비리에 대한 공판 당일.

삼영산업의 대표인 오 사장이 사내변호사를 대동하고 기일에 출석했다.

오 사장은 비록 삼영그룹을 지배하는 강씨 일가의 직계는 아니었지만 먼 친척 중 한 명이었다.

오 사장은 법원 로비에서부터 공손하게 기자들에게 인사하며 조용히 말했다.

“오해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성실하게 해명하겠습니다.”

필웅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가 찼다.

‘오해는 뭔 오해고 성실은 무슨 성실이야?’

법정 앞에서 필웅은 오 사장과 마주쳤다.

오 사장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영감님 먼저 들어가시지요.”

“사장님 먼저 들어가시죠.”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오 사장은 문을 열고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오늘의 재판장은 또 최창칠 판사였다.

‘아, 하필이면 또 이런 때.’

사실 최창칠 판사가 아예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을 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최 판사는 동시에 관행상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희한한 부분까지 전부 다 꼬투리를 잡는 사람이었다.

사건이 복잡한 만큼 최 판사가 이상한 데서 시비를 걸어 올 가능성이 있었다.

‘긴장 좀 해야겠군.’

“검찰 측, 무슨 공소사실이 이렇게 많습니까? 간략하게 요약해 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최 판사가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까칠하게 일갈했다.

필웅은 일어나 대답했다.

“그만큼 이 사안의 위법성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봐도 적용 법률이 몇 개나 되는지도 모르겠군요.”

“맞습니다.”

필웅은 옷매무새를 여미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만큼 피고인, 그리고 삼영산업이 수많은 불법행위를 저질러 왔기 때문입니다.”

필웅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잠시 후 필웅은 쏟아내듯 외쳤다.

“공갈협박! 횡령! 배임! 법인세법 위반! 조세특례제한법 위반!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외국환거래법 위반! 근로기준법 위반! 상법 위반!

피고인과 피고인의 회사에 걸린 죄목들입니다.

왜 이렇게 많을까요? 그건, 피고인이 불법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그 불법을 은폐하기 위해 다시 불법을 저지르고, 그 불법을 덮기 위해 또다시 불법을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불법의 고리를 끊어낼 때가 왔습니다. 부디, 재판장님의 공정한 판단을 부탁 드립니다.”

필웅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최 판사는 기록을 들춰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요 증인인 이시원 씨는 이미 무고죄로 판결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증인의 진술에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겠는데요.”

“당시 무고죄 판결은 충분하지 못한 증거에 입각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저희는 추가적인 압수수색을 통해 이시원 씨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확보해 두었습니다. 이시원 씨도 곧 무고죄 판결에 대해 재심 청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무고죄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는 필웅이 제안한 것이었다.

분명, 대부분의 판사라면 기존에 이미 동일한 사실에 대해 무고죄 판결을 받은 증인의 증언이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무고죄 판결 역시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최 판사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증인신문은 오늘 바로 진행합니까?”

“그렇습니다.”

“증인, 앞으로 나오세요.”

이시원이 어디선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초췌하고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뭔가 상태가 평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필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잠자코 있었다.

“변호인 먼저 신문하시죠.”

최 판사가 손을 들어 오 사장의 변호인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오 사장의 변호인이 일어섰다. 40대 중반 정도의 말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역시 법무법인 진화에서 나온 듯했다.

변호인이 증인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말을 건넸다.

“증인, 증인은 피고인의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지요?”

시원은 그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호인은 이시원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재차 물었다.

“증인, 증인은 과거 피고인이 회사 자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피고인을 고발한 바 있습니다. 맞지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허위로 밝혀져 무고죄 판결을 받은 바 있구요?”

“그렇습니다.”

“증인.”

변호인이 이시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증인은 사실 관심을 얻기 위해 내부고발을 꾸며냈으며, 실제로는 피고인이 비리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요?”

이시원이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초조함을 드러냈다.

‘왜 저러지? 아니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데?’

필웅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가 급히 이시원을 제지하려고 하는 찰나, 이시원이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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