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여기가 어딘지 모르십니까
필웅의 말에 이시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짐작하시다시피 그 후로 한동안 회사에서 대기발령을 받았습니다. 말이 대기발령이지, 책상을 화장실 앞에 가져다 놨으니 사실상 나가라는 얘기였죠.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해야하니 악착같이 버텼는데, 결국 해고 통지서가 날아오더군요. 해고에도 불복해서 노동청도 가보고 별 짓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지금은 아내도 나가서 청소부 일을 하고 저도 간간히 일용직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도 일하러 나가봐야 해요.”
필웅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왠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이 한 사람을 파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필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바쁘시니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 혹시 삼영산업을 고발하셨을 때 제출하셨던 자료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왠지 모르게 검찰에서는 자료들을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시원은 방에 잠시 들어가더니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꺼내갖고 왔다.
그 일 때문에 회사에서 잘리고도 아직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나중에라도 제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 해서요.”
이시원이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필웅은 반갑게 자료들을 건네 받고는 갖고 온 가방에 자료들을 집어 넣었다.
“혹시 자료 살펴보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 드려도 될까요?”
“뭐 이미 이렇게 된 거, 좋습니다.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필웅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시원의 집을 나왔다.
* * *
“내부고발 자료라고?”
“응.”
“이미 무고죄로 판결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하지만 내가 자료를 살펴 보니 무고가 될 이유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시연은 필웅의 설명을 듣고는 미간을 좁히며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두서없이 쌓여 있는 자료에 시연이 움찔움찔하며 다시 자료를 정리하고 싶다는 눈빛을 간곡하게 보내왔지만, 필웅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낚아챘다.
필웅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호진이 사건은 어떻게 됐어?”
시연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곧 선고 잡힐 거야.”
“어떻게 될 것 같아.”
시연은 자료들을 뺏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마지못해 내려놓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유기치사를 살인죄로 변경하긴 했는데…….”
“그런데?”
“형량이 그렇게 세게 나올 것 같진 않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할 땐 형량이 높지만,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면 일반 살인죄가 적용되니까.”
“그렇지.”
시연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난 이 나라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 이상으로, 부모가 무력한 자식을 죽이는 건 더 끔찍한 일 아니야?”
필웅은 그녀의 의기소침한 태도에 다시 난감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건넸다.
필웅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연은 잠시 그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도록 내버려 두다가, 짐짓 기운이 난 것처럼 밝게 웃으며 다시 자료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시연이 잠시 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많아?”
“응. 굉장히 꼼꼼하게 모아 놨더라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무고가 나온 거야?”
필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도 정상적인 조사가 이뤄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은?”
“저번 강준수의 사건때처럼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얘기지.”
시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괜찮겠어?”
필웅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고는 말했다.
“기소가 되는지 마는지는 결국 일선 검사에게 달린 거잖아?
아무리 외압이 들어와도 기소를 해 버리면 이미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 버리는데 뭘 더 어떻게 하겠어?
법원으로 넘어가 버리면 보는 눈이 많아져서 노골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거야.”
“그치만.”
“그리고, 이번엔 이시원 씨 혼자가 아니잖아?”
필웅은 말하며 시연의 두 어깨를 잡았다.
“나도 있고, 너도 있어. 박 형사님도 있고, 다혜 씨도 있지.
이번에야말로 강유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는 거야.”
시연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결국 강유라한테 복수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닌 거야?”
“그건 부수적인 수입이랄까?”
“왜 이렇게 강유라한테 집착하는 거야? 난 생각보다 나이스해 보이던데.”
“넌 강유라를 몰라.”
필웅은 말하며 문득 강유라가 집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강유라는 필웅의 주변 사람을 들먹이며 필웅을 협박해 왔다.
‘생각해 보니 내 행동이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게 아닐까?’
필웅은 갑자기 두려움에 빠졌다.
이제까지는 강유라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 때문에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뛰어왔지만, 시연의 앞에 서니 갑자기 그녀는 물론 박 형사나 서다혜 기자가 모두 걱정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필웅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자 시연이 놀라면서 물었다.
필웅은 고개를 흔들며 털썩 소파에 주저 앉았다.
“그 날 강유라가 찾아온 날 기억나?”
“응, 당연하지.”
“강유라가 떠나면서 또 협박을 하고 갔어.”
“뭐!? 너한테? 왜 얘기 안했어?”
“괜히 얘기 꺼내봤자 혼란스럽기만 할 테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얘기를 해 둬야겠어. 그 날, 강유라는 내 신상을 가지고 협박한 게 아냐.
지난 번 서 기자님을 노릴 때처럼 너나 박 형사님, 서 기자님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협박하고 갔어.”
시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시연은 도대체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강유라의 막강한 힘이 두렵기는 했다.
또 한편으로는, 시도때도 없이 대한민국의 검사를 협박해 대는 이 버릇 없는 악녀를 혼쭐내 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필웅이나 장경, 다혜가 다치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다.
시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말대로 이건 박 형사님이나 서 기자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응. 다같이 만나서 생각해 보자. 오늘 피곤했을 텐데 일단 들어가 얼른 쉬어.”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시연이 떠나자 필웅은 사무실의 불을 끄고 집으로 향했다.
* * *
필웅, 시연, 장경과 다혜는 청사 앞 토스트집 2층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토스트집은 장사가 잘 되서 가게를 2층까지 확장한 참이었다.
원래는 따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2층에는 테이블이 많아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다만 오늘은 시간이 일러 그들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필웅이 다시 한 번 강유라의 마지막 메시지를 장경과 다혜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장경과 다혜는 이야기를 다 듣고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다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검사님~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필웅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무겁게 말했다.
“역시 위험하겠죠? 이시원 씨한테는 죄송하지만 이 일은 여기서 그만 두는 걸로…….”
“아뇨~ 검사님이 저한테 이런 걸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거에요.”
필웅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다혜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검사님,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제가 이 일을 택한 건 검사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에요.
그런 일의 결과가 무서웠다면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고, 시작했더라도 금방 발을 뺐겠죠.
애초에 강유라를 상대하는 게 무서웠다면 지난 번 강준수를 기소할 때부터 그만둬 달라고 말했을 거에요.
저는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제 의사를 물어보려고 부르신 거 아닌가요?”
“그건 맞습니다만.”
“제 의사는 확실하니, 검사님은 검사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필웅은 장경을 돌아보았다.
“다혜 씨는 그렇다고 하지만, 형사님도 꼭 똑같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누구 하나도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형사님이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 둘겁니다.”
필웅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과거의 나영전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가 다칠까봐 두려워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해를 끼치는 인간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변화가 낯설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장경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언제 저 한 몸 다칠까봐 그만두자고 한 적 있습니까?
처음 혜진이 사건 할 때도 제 맘대로 검사님을 끌어들였었는데, 이제 와서 저만 발을 뺀다면 치사한 놈이죠.
저도 합니다.”
필웅은 어떤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시연과 장경, 다혜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모두 의지에 찬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습니다.”
필웅이 결연하게 말했다.
“강준수 때 저희를 이용해 먹은 이용료는 받아낼 수 있겠군요.”
* * *
필웅은 심호흡을 하고, 청사의 로비로 향했다.
청사의 유리문 너머로 구름같이 모여든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필웅은 짐짓 태연한 듯 유리문을 열었다.
“조필웅 검사님 맞으십니까?!”
“이번 사건은 이미 무혐의로 처리가 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시 기소하게 된 경위가 어떻게 되십니까?”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나요?”
구름같이 모여든 기자들이 연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필웅은 별 말 없이 성큼성큼 장경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검사님!”
“한 말씀만 해주시죠, 검사님!”
필웅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
필웅은 기자들을 어렵게 뿌리치고 장경의 차에 올랐다.
장경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삼영산업으로 바로 갑니까?”
“그러시죠.”
필웅이 손에 든 압수수색영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싹다 쓸어담아!”
압수수색을 위해 모인 경찰들과 수사관들에게 주 계장이 소리쳤다.
삼영산업의 사무실을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서 뭣들 하시는 겁니까?”
지위가 조금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다가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압수수색영장도 이미 발부됐고, 책임자 분한테 영장도 보여 드렸는데 뭐가 문제죠?”
중년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반항적으로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십니까?”
필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삼영산업 기획팀 사무실 아닙니까?”
“삼영그룹 사무실에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와도 됩니까?”
필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삼영그룹 사무실이 청와대라도 됩니까?”
중년 남자는 할 말을 잊은 듯 끄응, 하는 신음소리만 내며 못마땅한 눈초리로 자료들을 쓸어담기 시작하는 수사관들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이시원의 자료들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지난 번 조사한 경찰과 검찰의 누군가가 조사를 대강 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자료가 불충분한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필웅은 좀더 적극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필웅은 삼영이 뭔가를 인지하고 전에 신속하게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해 그렇게 삼영산업으로 들이닥쳤다.
필웅과 장경은 자료들을 담는 박스가 하나씩 채워지는 것을 배부르게 바라보았다.
그 때 사무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강유라였다.
필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