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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43화 (43/151)

43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선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눈만은 여전히 시연을 쏘아보고 있었다.

“피해자는 발견 당시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아니, 아사 상태에 가까웠죠.”

시연은 침착하게 부검 보고서를 꺼내 들고는, 분노에 목소리가 떨렸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피해자를, 아니 아이를 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한 겁니다. 그렇죠?

부검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 추정시간이 마니산에 간 전후라고 하더군요.”

“그건, 그건 시간에 조금 오차가 있을 수도……. 마니산에 갔다 온 직후에 실종된 거니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사인은 명백히 아사라고 적혀 있네요. 아이가 마니산에 갔다온 직후 집 근처에서 실종됐는데, 사체는 마니산에서 발견됐고, 굶어 죽었다?

아이가 마니산에 혼자 갔다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실테고 누군가가 아이를 마니산에 데려간 건데, 누군지는 몰라도 유괴든 납치든 아이를 데려간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아이가 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하고는 암매장하고 달아났다?

지금 이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선영은 입을 다물었다.

시연은 부검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그녀를 주시했다.

“왜 그런 겁니까?”

선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저는…….”

“아, 괜찮아요. 사실 아무 관심 없습니다.”

시연은 기록을 정리하면서 일어났다.

선영의 시선이 일어서는 시연을 따라갔다. 신문실에 들어선지 한시간만에 무척 초췌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구구절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변명 늘어 놓는 거 신물이 나니까요.

어려운 경제적 사정? 남편과의 불화? 시부모의 학대?

왜 그런 것들이 당신에게 면죄부를 쥐어준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다고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나요?”

“그러면, 왜 물어 보신 건가요?”

장선영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시연이 차가운 얼굴로 내뱉듯이 말했다.

“잠깐만이라도 남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진 줄 알았다가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절망하는 걸 보고 싶어서요.”

시연은 그대로 휙 돌아서서 신문실을 나갔다.

밖에서 신문과정을 보고 있던 필웅은 마지막 시연의 말에 조금 놀랐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잔인한 말이었다.

필웅은 신문실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 왜 그렇게까지…….”

필웅은 말을 건네려다가 흠칫했다.

시연의 표정은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한 쪽 눈에서 눈물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시연은 그제서야 얼굴 한 쪽에 눈물이 흐른 것을 깨닫고 창피한 듯 서둘러 스윽 닦아냈다.

“뭐가.”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장선영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나…….”

필웅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필웅은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진 후였다.

“알아. 불필요한 말이였단 거.”

시연이 흐읍 하고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필웅아.”

“응?”

“왜 사람들은 이렇게 못됐을까?

왜 자기 자식까지 죽여놓고는 그걸 변명까지 하려고 할까?”

필웅은 난감해졌다. 그도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이나 지어내 대답하는 대신, 시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시연이 슬픈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시연은 손을 들어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손을 내렸다.

“네가 아니었으면, 네가 없었으면, 나는 이 일 오래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시연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사무실 방향으로 사라졌다.

필웅은 못박힌 듯 자리에 서서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눈으로 쫓고 있었다.

작지만 오랜 의문이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시연이는 생각보다 마음이 여렸어.’

만약 필웅이 원래의 시간대에서 그대로 사망했다면,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시연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이렇게 일에서 쌓인 회의감과 필웅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잊지 못하고 검사직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필웅을 따라 오게 된 법조계라는 세계 자체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정시연 파트너를 만든 게 어쩌면 나였다는 얘기로군.”

물론 그가 말하는 ‘나’는 영전이 아닌 필웅이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세상이야.’

필웅은 생각에 빠진 채로 천천히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삼영그룹의 내부고발 사건이 있었지. 그것도 슬슬 시작해야겠는데.’

필웅은 사무실에 도착해 삼영그룹의 내부고발자인 이시원의 인적사항 자료를 추려냈다.

* * *

“그 분 이사가셨는데요.”

필웅이 인적사항에 나타난 이시원의 주소에 찾아가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럼 혹시 어디로 이사가셨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는 잘. 부동산에 물어보시든가요.”

“잘 알겠습니다.”

필웅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거 뭐 갑자기 어디로 이사를 간 거지.’

필웅은 아파트에서 나와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파트의 앞에 부동산 중개사무소가 여러 군데 모여 있었다.

필웅은 혹시나 해서 집주인이 알려 준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문을 열었다.

“계십니까?”

안에서 사장인 듯한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나와 필웅을 맞았다.

“어서오세요. 방 보러 오셨습니까?”

“아뇨, 그게 사실…….”

필웅은 검사 신분증을 꺼내 보이고는 물었다.

“1동 605호에 사시던 분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 시원 씨요?”

“시원 씨를 아십니까?”

“그럼요. 워낙에 매너도 좋고 성격도 좋으신 양반이라 단지 상가에 사람들은 다 알죠.”

필웅은 반색을 보이며 사장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았다.

“혹시 시원 씨가 어디로 이사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아, 그러고 보니 나중에 정산할 게 남아 있으면 연락하라고 연락처 같은 걸 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잠시만요.”

사장은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뭔가를 찾아보는 듯하더니 메모지를 한 장 꺼내들고 나왔다.

“워낙 정산을 깔끔하게 해 놓고 가셔서 딱히 연락 드릴 일도 없을 것 같아 버릴까 했는데, 갖고 있기를 잘했네요.”

“저 좀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요.”

사장은 선선히 메모지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필웅은 다른 메모지를 꺼내 적혀진 주소를 받아 적었다.

그런데 주소지가 뭔가 익숙했다.

‘이거 우리 집 근처잖아? 그 동네는 엄청 허름한 동넨데.’

원래 이시원이 살던 집은 나름 근처에서 규모가 큰 신축 아파트였다.

그런데 갑자기 필웅이 살던 달동네로 이사를 간 것이다.

필웅은 이것이 그가 삼영산업을 고발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웅은 인사를 하고 부동산을 나와 황급히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이시원의 집으로 가는 중에도 묘한 긴장감이 멈추지 않았다.

* * *

이시원의 집은 필웅의 집 근처 언덕의 아래에 있었다.

필웅은 굽이굽이 길을 따라 마침내 이시원의 집에 도착했다.

필웅은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필웅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현관 대문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필웅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필웅이라고 합니다.”

“그게 누군데요?”

“서울남부지검에서 왔습니다.”

안에서 두려움과 분노가 반반쯤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뭔데요?”

필웅은 간곡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최근 어려운 일 겪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해서 선생님의 억울함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필웅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예?”

“꺼지라고, 이 새끼야!”

갑자기 필웅이 반응할 사이도 없이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한 남자가 대야에 담긴 물을 필웅에게 끼얹었다.

촤악!

“앗 차가!”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마도 이시원은 이가 갈린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너희 같은 새끼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당장 꺼지라고!”

이시원은 쾅 하고 대문을 닫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필웅이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이거 어떡하지.’

이시원은 삼영그룹의 비리를 파헤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비협조적이라면 이 수사도 또다시 진전이 없게 된다.

필웅은 마음을 굳게 먹고는 다시 외쳤다.

“선생님, 문 열어주실 때까지 저는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겁니다!”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필웅은 자세를 잡고 오랜 기다림을 준비했다.

* * *

필웅이 찾아온 것은 밤이었고, 어느새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필웅은 거의 선 채로 졸다가 새소리에 잠을 깼다.

그 때 끼이익, 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온화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문을 연 부인은 문을 열자마자 한 키 큰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나!”

부인은 잠시 후 겨우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필웅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울남부지검에서 온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세요?”

“남편 분이 이시원 씨, 맞으시죠?”

“예, 그런데요.”

“이시원 씨를 좀 만나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족히 10시간은 넘게 서 있었을 필웅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서 계세요? 왔으면 들어오시지 않고…….”

필웅은 자초지종을 부인에게 설명했다.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화가 난 듯한 부인이 이시원을 잡아 끌며 나타났다.

“당신,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이게 무슨 행패에요?”

“이딴 놈이 무슨 손님이야.”

“이 분이 뭘 어쨌는데요?”

“아, 그 놈들이랑 한패잖아!”

“그럼 당신도 삼영산업 사람들이랑 한 패에요?”

이시원이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디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

부인도 지지 않고 당차게 대답했다.

“그렇잖아요? 검찰청에서 왔다고 다 한패면, 당신도 삼영산업에서 왔으니 한 패 아니에요?”

“이…!”

이시원은 뭐라고 할 듯이 언성을 높이다가, 이내 풀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부인이 필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만 들어와서 앉아 계세요. 얼마나 밖에 서 계셨던 거에요?”

“얼마 안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었기는. 일단 좀 쉬고 계세요. 당신은 나 좀 봐.”

부인은 이시원의 등짝을 철썩 두드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이시원이 필웅이 앉아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미안하게 됐수다.”

“괜찮습니다.”

이시원의 마지못한 사과에 필웅은 흔쾌히 대답했다.

필웅은 갖고 왔던 자료를 꺼내 보였다.

“사실, 제 사건이 아니라서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 삼영산업을 고발하신 사건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 건 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이시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다 설명했을 때는 듣지도 않더니 이제와서 갑자기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하는군.”

“죄송합니다.”

이시원은 고개를 젓고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검사님이 뭘 잘못한 건 아니죠. 그냥 제가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필웅은 말을 꺼냈다.

“대답하시기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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