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40화 (40/151)

40화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나는데?

장경이 호진의 집을 찾아가고 며칠 후.

필웅은 삼영그룹 계열사들의 재무제표를 쌓아 놓고 검토하고 있었다.

‘1998년, 지금 시기라면 분명 재벌들이 비자금 조성에 한창 열을 올릴 때지.’

필웅이 K를 잡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K에게 이어지는 별다른 단서가 없으니 그 사건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필웅은 대신 최근 자신을 갖고 논 강유라에게 화살을 돌리기로 했다.

‘우릴 갖고 놀았다 이거지?’

필웅이 강유라에게 집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강유라를 그대로 놔두면 분명 앞으로도 사사건건 여러 사건에서 필웅을 방해하려고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요령 없이 대들면 시연이나 장경, 다혜를 해치려고 들 수도 있었다.

그 전에 그녀의 약점을 찾아두고자 하는 것이 필웅의 목적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나영전이었던 시절 품고 있던 악감정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때는 변호사였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적어도 이번에 칼을 쥔 쪽은 나다 이거야!’

필웅은 잠시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가 수상한 점을 억지로 날조하는 것도 아니니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필웅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재무제표를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딱히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필웅은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하긴, 대외적으로 전부 드러나는 수치를 가지고 비리 같은 걸 찾기는 무리인가.’

필웅은 피로감을 느끼며 자료를 정리하고는 주 계장에게 말했다.

“계장님, 혹시 삼영그룹 계열사들 관련해서 사건 들어온 게 있습니까?”

“어디 보자.”

주 계장은 사건 목록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지금 계속 중인 건 없는데요.”

필웅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혹시 종결된 사건들 중에서는요?”

“잠시만요. 아, 예전에 무고죄가 나온 사건이 있는데요.”

“무고죄요? 삼영그룹에서 누군가를 허위로 고발했다구요?”

“아뇨, 삼영그룹 계열사의 한 직원이 자기 회사를 고발했는데 그 직원한테 무고죄 판결이 나온 사건입니다. 이거 한 번 보시죠.”

주 계장이 자료를 뽑아 필웅에게 건네주었다.

필웅은 사건 자료들을 읽어나갔다.

삼영산업은 삼영그룹의 계열사로, 강유라가 사장으로 있는 삼영패션의 자회사였다.

어느 날, 삼영산업의 회계부서 직원인 이시원으로부터 고발장이 접수된다.

회사 내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이 오고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삼영산업이 어떤 회사에게 계속해서 거래대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로부터 받은 제품이나 용역이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거래내역을 확인했을 때, 그는 단순한 착오일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그가 자료를 살펴 보기 시작하자, 그러한 거래내역이 단순히 1회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읽은 필웅은 자세를 바로하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거,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나는데?’

경찰과 검찰은 당시 이시원이 제출한 자료와 이시원의 증언을 모두 살펴보고는, 근거가 없는 자료이거나 위조된 자료라고 결정을 내렸다.

이에 삼영산업은 이시원을 무고죄로 고발했고, 이시원은 그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이시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람, 만나볼 수 있습니까?”

주 계장이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자료를 검색했다.

“아마 수사 당시 받아 둔 인적사항이 있으니까 연락처는 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 여기 있네요.”

주 계장이 이시원의 인적사항을 출력해 필웅에게 건넸다.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군.’

일단 필웅은 인적사항을 출력한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 * *

장경은 애가 탔다.

방금 전 구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부터 구청에서 아이에 대한 보호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아이의 부모와 면담을 요청하고 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라는 것이었다.

한 번은 예고 없이 집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거 뭔가 점점 수상해지는디?’

장경은 문득 자신이 직접 영장을 신청해서 쳐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확인한 것은 모두 정황증거 뿐이었다.

단순히 아이가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영장을 내어줄지 장경은 확신이 없었다.

‘이게 가정 폭력의 문제구만.’

장경은 형사생활 중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정은 극도로 사적인 공간이다.

만일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 공공 장소이거나, 적어도 회사나 학교 같이 공개된 장소이기만 하면 장경은 언제든 들이닥쳐서 조사를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와 달리 보통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집에서 해결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장경은 단지 정황만으로 집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다.

집안 사정이나 교육 방식에 따라 아이들은 얼마든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키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설령 누군가의 가정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더라도, 그에 대한 확신이 없이 무작정 조사를 강행하면 자칫 사생활 침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집안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조사를 하지 않으면 범죄에 대한 확신을 얻을 방법이 없다.

장경은 진퇴양난에 빠진 기분이었다.

‘증거를 찾으려면 집안에 들어가 봐야 하는디, 집안에 들어갈 이유를 만드려면 증거가 있어야 되고. 뭣 같은 경우구만.’

장경은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어봤자 해결될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머리만 감싸쥐고 있는다고 사건이 해결되지는 않아!’

장경은 분연히 일어났다.

체포영장이든 압수수색영장이든, 되든 안 되든 일단 집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장경은 잠시 영장 없이 일단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구청 공무원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집이었다.

형사인 그에게는 더더욱 경계심을 높이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문이라도 뜯어내지 않으면 억지로는 호진의 집에 들어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장경은 생각을 마치고 서둘러 필웅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아동학대요?”

필웅이 놀란 눈으로 묻자 장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계에서 그런 일도 합니까?”

필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장경이 손을 내젓고는 대답했다.

“아뇨, 보통 하는 일은 아닌데, 다혜 씨가 제보를 받아온 걸 조사하다 보니 아동학대 정황이 강력하게 의심되더라구요.”

“그랬군요. 뭔가 증거는 있습니까?”

장경이 쩝 하고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것이 문젠데요. 여러 정황상 아동학대 사실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슴다.

증거를 찾으려면 집을 한 번 뒤져야 될 것 같은디, 집을 뒤지려면 증거가 있어야 되는 야리꾸리한 상황이라.”

필웅은 팔짱을 끼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쉽지는 않겠네요. 제가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자료 좀 놓고 갈 테니 한 번 살펴봐 주세요.”

장경은 인사하며 필웅의 사무실을 나섰다.

‘어떻게든 영장을 받아 내서 밀고 들어가 봐야지!’

하지만 장경의 예상 외로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다.

호진의 삼촌으로부터였다.

원래 호진의 집에는 얹혀 살던 삼촌, 그러니까 호진 아버지의 동생이 있었다.

삼촌이 집에 있을 때는 아기인 호진을 무척 귀여워해서 많이 챙겨 주고 놀아주고는 했었는데, 몇 년 전 삼촌이 결혼을 해서 분가해 나가게 되면서 호진과의 왕래가 뜸해졌다.

그런데 1년여 전쯤, 삼촌은 우연히 호진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호진은 너무 야위고 발육상태도 좋지 않았다.

삼촌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형과 형수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남의 일에 신경 끄라는 차가운 냉대였다.

그 후로도 호진이 걱정된 삼촌은 호진이를 자주 만나게 해달라고 꾸준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호진의 부모는 계속해서 호진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이에 호진의 삼촌은 생각하다 못해 예전에 갖고 있던 예비 키를 가지고 얼마 전 몰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호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집에 들어간 삼촌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집에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다.

4살의 아이가 있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각종 가재도구, 장난감, 아이의 옷,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삼촌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한참이나 집을 뒤지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그 길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실종사건은 그 후 관할서인 장경의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갑자기 실종사건이라니.”

장경은 사건 파일을 받아들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장경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하지만 장경은 한 편으로는 다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필웅으로부터는 영장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지금 상황이라면 집에 들어가 볼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한 번 집에 찾아가 볼까.’

장경은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삼영아파트로 향했다.

* * *

“들어오세요.”

형사라고 하자 호진의 어머니인 선영이 의외로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장경이 들어서자 선영은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뵌 분 같은데…….”

“예? 아니, 그럴 리가요. 흔하게 생긴 타입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슴다.”

“별로 흔하게 생긴 타입은 아닌데…….”

선영은 여전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안으로 장경을 안내했다.

장경과 선영은 부엌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장경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아이의 삼촌으로부터 실종신고가 접수되서 말이죠. 아이 이름이 호진이죠?”

“예.”

“정말 실종된 거 맞습니까?”

“예, 뭐…….”

장경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애초에 아이와 함께 살지도 않는 삼촌이 실종신고를 하는 것도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작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부모란 자들은 마치 그러고 보니 방금 깨달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호진이, 언제부터 사라진 겁니까?”

“한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아요.”

“일주일 정도면 6월 13일이요? 어떻게 잃어버리신 겁니까?”

선영이 어색하게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잠시 집을 비우고 나갔다 와보니 애가 사라져서 저희도 경황이 없네요.”

“아니, 그럼 그 때 실종신고를 안 하고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몰상식한 선영의 태도에 장경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졌다.

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아이 아버지가 계속 찾고 있어요. 저희도 하려고 했지만 애초에 실종된지 3일인가가 지나지 않으면 실종신고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겨우 4살 아이가 사라졌는데, 그걸 실종신고도 안 하고 계시는 게 말이 됩니까?”

“실종신고를 안 한 게 무슨 죄인가요? 저희도 가뜩이나 심란한데 왜 찾아와서 화를 내시죠?”

선영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장경은 아차 싶어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동학대 조사가 아니라 실종 아동의 부모와의 대화여야 했다.

장경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안을 휙 둘러보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이의 물건이 없었다.

일전에 찾아왔을 때보다도 아이의 물건이 더 줄어 있었다.

‘이건 마치… 마치…….’

장경은 순간 소름이 쫙 끼쳐오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치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미리 정리해 놓은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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