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형사님이라면 든든하죠
“엄마!”
호진이가 후다닥 엄마에게 달려갔다.
다혜는 꺼내들었던 수첩을 재빨리 가방에 집어넣었다.
엄마는 경계의 눈빛으로 다혜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호진이는 엄마의 발치에서 안아달라고 보채고 있었지만 엄마는 그런 호진이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아, 저, 아이가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길래요~”
“엄마, 저 누나가 사탕 줬어.”
“그런 걸 왜 받아 먹어 거지도 아니고!”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호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호진의 엄마는 표독스럽게 호진을 바라보다가 홱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다혜를 쏘아보았다.
“우리 애랑 무슨 얘기 했어요?”
“저는 방금 와서 별 이야기는 안 했어요.”
“…호진아, 가자!”
호진의 엄마는 호진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몇 번이고 뒤돌아 다혜를 노려보며 아파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다혜는 마음이 심란했다.
‘형사님한테 상담해 봐야겠어.’
다혜는 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떠났다.
* * *
“그러니께, 애 엄마가 애를 학대하는 거 같다는 말이죠?”
다혜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는 장경이 일하는 경찰서에 와 있었다.
다혜가 처음 찾아오자, 강력계장은 이런 미인 분이 너 같은 놈을 왜 찾아오냐 어쩌고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는 장경의 타박을 듣고 멀찍이 떨어져서 신문을 읽는 척하기 시작했다.
김도율 계장이 신문을 보는 척 하면서 힐끔힐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장경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말했다.
“아동학대 사건은 저도 별로 해 본적이 없어서 좀 조심스럽긴 하네요.”
그 때 멀리서 신문을 보고 있던 김 계장이 슬쩍 곁으로 다가왔다.
장경이 짜증을 냈다.
“아, 지금 사건 조사 중이니까 저리로 가십쇼 좀.”
“임마,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계장님이 뭘 안다고 도와줍니까?”
“이놈이? 내가 예전 파출소 있을 때 허구헌날 처리한 게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건인데 내가 모르긴 왜 몰라?”
‘그러고 보니 계장님은 강력계에 오기 전 상당히 오랜 시간 파출소에서 근무했었다고 했지.’
장경은 퍼뜩 김 계장이 예전 넋두리처럼 늘어 놓던 파출소 근무 시절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장경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옆의 빈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크흠, 거, 뭐, 한 번 얘기나 들어보죠.”
“지금 내가 도와 주는 거냐 네가 도와 주는 거냐?”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시고.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김 계장이 장경을 쥐어박을 듯 팔을 들어올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후,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김 계장이 다혜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해 아동이 몇 살이나 됩니까?”
“한 네다섯살 정도인 것 같아요~”
“학대 정황은?”
“제보자 말에 따르면 구타도 있었을 것 같고, 몸에 할퀸 상처도 잔뜩이에요.”
“눈에 보이는 곳에 상처가 있습니까?”
“아뇨, 주로 다 옷으로 가려진 곳에만 있어요.”
김 계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장경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 무게만 잡지 말고 말을 좀 하세요.”
김 계장은 그런 그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다혜에게 말을 건넸다.
“상황이 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보통 육아 스트레스 때문에 애들을 학대하는 부모들이 간혹 있기는 한데, 그런 경우는 우발적이어서 보통 상처도 눈에 보이는 데 남고 상처 개수도 많지 않아요.
그런데 애가 외관상으로는 멀쩡하면서 옷으로 가려진 데에만 학대의 흔적이 있다는 건 의도적으로 애를 괴롭혀 왔다는 겁니다.
애 옷 입은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혜는 문득 계절에 안 어울리게 두껍고 낡은 옷을 입은 호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뭔가 계절에 안 맞게 겨울옷을 입고 있었어요. 별로 깨끗해 보이지도 않았구요.”
“옷을 스스로 찾아서 골라 입을 수 있는 나이대가 아닌 어린애가 옷을 함부로 입고 돌아다닌다는 것 역시 학대의 징후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엔 구청 아동복지과랑 같이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김 계장은 진지하게 말을 마치고 장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장경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물었다.
“뭐냐, 그 표정은?”
“아니, 계장님이 이렇게 청산유수로 똑똑한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이 가짜놈! 우리 계장님을 어떻게 한거냐!”
“내가 이딴 놈을 위해 시말서를 썼다니……. 휴, 기자님, 이 놈 빌려 드릴 테니까 일단 이 놈이라도 한 번 써보시겠습니까?”
“그럼요~ 형사님이라면 든든하죠~”
“든든하다뇨? 제가 아니라 이 놈을 빌려 드린다고 했습니다만.”
“아오 좀! 나갔다 옵니다!”
장경이 성질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혜는 김 계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배시시 웃어보이고는 서둘러 장경을 따라나갔다.
“형사님, 구청 가실거죠? 저도 같이가요~”
장경이 따라나오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기자님. 같이 가 보시고 싶으시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저 혼자 가야 할 것 같슴다.”
“왜요?”
“기자님은 이미 애 엄마를 보시지 않았슴까. 물론 뭐 잠깐 본 거니까 애 엄마가 기억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만에 하나 기억이 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요.
애 엄마 입장에서는 얼마 전 놀이터에서 돌아다니던 수상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구청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다혜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내가 너무 의욕만 앞서는 걸까? 지난 번 조 검사님한테 진우현 사건 조사해 달라고 했을 때도 그렇고.’
다혜는 결국 조금 의기소침해 하면서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다녀와서 바로 경과 말씀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다혜가 기운이 빠진 것이 단순히 같이 가지 못해서라고 오해한 장경이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 * *
장경은 구청에 들러 상황을 설명한 뒤 아동복지과의 공무원 한 명과 삼영아파트로 향했다.
구청에서 파악한 집 주소를 통해 아이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낡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자 호진의 집이 나타났다.
복도 왼편 마지막 집이었다.
문 앞에 서자 장경은 왠지 모를 기분 나쁜 기운을 느꼈다.
이 문을 열고 나면, 이제껏 그가 알지 못한 어떤 심연을 마주 보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경은 애써 침착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뚜둑, 하고 꺾고는 함께 파견 나온 공무원에게 확인차 물었다.
“여기가 그 집이 맞나요?”
“예. 맞는 것 같은데요.”
“들어가 봅시다.”
장경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메마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의 엄마인 듯했다.
“아, 예. 구청에서 잠시 나왔습니다. 장선영 씨 맞으시죠?”
“…맞는데요.”
구청에서 나왔음을 알렸지만 호진의 엄마, 장선영의 목소리에 깔린 경계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공무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예, 이번에 구청에서 아동복지수당 지급 관련해서 몇 가지 안내 드릴 사항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철컥!
걸쇠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슬쩍 열렸다.
선영이 문틈으로 공무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뒤에 분은 누구시죠?”
“아, 저희 동료입니다.”
만일 형사라고 하면 불필요하게 부모를 자극할 염려가 있으므로, 일단 실태가 파악되기 전까지는 모두 공무원인 척 하자고 말을 맞춰 둔 참이었다.
장경은 혹시 몰라 쓴 마스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얼굴을 가렸다.
당연히 호진이나 장선영은 장경을 모르지만, 혹시 나중에 추가로 수사를 하러 올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스크는 왜 쓰신 건가요?”
“아, 제가 감기가 심해서 실례가 될까봐 부득이하게 마스크를 좀 썼습니다.”
장경이 조금 긴장하며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장선영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했지만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집은 아이가 있는 집 치고는 휑했다.
거실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도 없었다. 아이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몇 개 없었다.
어렸을 적 호진이 타고 놀았을 법한 보행기는 망가져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는 빈 소주 병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장경은 공무원을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공무원이 친절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 댁 아이 이름이 호진이죠? 호진이 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왜요?”
“아, 아동복지수당 대상자 확인하기 전에 먼저 아이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제가 대답하면 되잖아요.”
“그게 절차상 아이를 직접 봐야 해서…….”
물론 거짓말이었다. 장경이 처음 아동복지과를 찾아가 경위를 설명하자 아동복지과에서는 일단 원래 지급되기로 되어 있는 복지수당을 설명해 주면서, 그 핑계로 한 번 상황을 보고 오자고 제안해 왔던 것이다.
“호진이 지금 자는데요.”
선영이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집은 기분 나쁠 만큼 고요했다.
“그러면 저희가 다음에 찾아 오는 건 어떨까요?”
“…잠시만요.”
선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칭얼대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선영이 호진의 팔을 붙잡고 나왔다.
장경은 호진을 슬쩍 내려다 보았다.
‘어? 얘는 걔잖여?’
장경은 처음 필웅과 김혜진의 사건을 수사하면서 찾아갔던 미술학원을 떠올렸다. 미술학원에서 제일 먼저 그들을 맞아 준 아이, 바로 그 아이였다.
장경은 오랜만에 아이를 봐서 반갑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더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호진은 척 보기에도 비쩍 말라 있었다. 옷도 며칠을 입은 것인지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호진은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고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호진이, 혹시 어디 아픈가요?”
공무원이 앉아서 호진이를 바라보다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선영에게 물었다.
“아뇨. 건강해요.”
“조금 또래 애들에 비해서 야윈 것 같아서요.”
“지금 트집 잡으려고 오신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고.”
“다 보셨으면 됐죠?”
“잠시만요.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선영이 호진을 다시 데리고 들어가려고 팔을 잡았다가 공무원의 말을 듣고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팔을 휙 놓았다.
공무원이 대신 호진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들고는 물었다.
“호진아. 몇 살이야?”
“네 살이요.”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니?”
호진이 물끄러미 선영을 올려다 보았다.
선영은 왜 날 보냐는 듯 호진이에게 눈을 크게 떴다.
호진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니요…….”
“밥은 골고루 잘 챙겨먹고?”
호진은 다시 선영을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떨구고는 대답했다.
“네…….”
공무원은 뭔가를 더 물어보려다가 선영의 눈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협조 감사 드립니다.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영은 차갑게 말하고는 거의 떠다밀다시피 공무원과 장경을 밖으로 내보냈다.
단지 앞까지 걸어 나온 장경이 공무원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공무원이 고개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은데요. 말씀하신 대로 외관상 학대의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요?”
“아까 팔을 잡아 봤을 때 팔 뒤에 살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어요. 보통 팔 뒷부분에 살이 모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이 나이대 애라면 적어도 팔 뒤에는 살이 잡혀야 하거든요. 머리에 부스럼도 좀 있는 것 같고, 가정 위생환경도 좋지 않아요. 뭔가 조치를 강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예. 잘 좀 부탁드리겠슴다.”
“예, 혹시 협조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서로 돌아가 봐야 해서.”
“아, 예.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경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갔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 호진의 집에 들어설 때 느꼈던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