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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37화 (37/151)

37화 얘 평소에도 이래요?

필웅은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강유라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조금 이상하네요.”

“뭐가?”

“당신이 도대체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계획에 흥미를 느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계획을 흥미진진하게 구경만 할 수 있는 때는, 그게 자신의 적이 아닐 때 뿐이죠.

제가 강준수를 잡아 넣은 시점부터 저는 당신의 적 아닙니까?”

강유라가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필웅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게 이 여자는 왜 대화를 할수록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거야?’

강유라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나랑 준수가 배다른 남매인 건 알아?”

“몰랐습니다. 별로 사건과 관계 있는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필웅아, 필웅아! 사건과 관련 없는 정보 같은 게 어딨어? 그러면 나는 뭐 사건이랑 처음부터 관련이 있었던 사람이야?”

강유라가 놀리는 어투로 말했다. 필웅은 기분이 언짢았다.

“당신이 불법으로 사건에 개입하기 전까지는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죠. 애초에 피고인의 누나가 배다른 남매인지 아닌지가 유죄인지 여부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 물론 그거랑은 상관 없지.”

“그래서요?”

“조금 더 창의력을 발휘해 보라고. 삼영그룹. 젊은 후계자. 배다른 남매. 암투.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아.”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강유라는 강준수와는 배다른 남매였다.

그리고 삼영그룹의 촉망 받는 후계자였다.

아니, 후계자 중의 하나였다.

언론에서는 공공연하게 남자인 강준수가 그간의 불법행위에도 불구하고 차기 총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장녀인 강유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강유라는 강준수를 부를 때 항상 강준수 씨라고 했었지. 나는 그게 비꼬는 건줄 알았는데, 정말로 사이가 안 좋은 거였군.’

필웅은 그제서야 뭔가 조금씩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강유라는 필웅의 반응을 보더니 느릿느릿 설명을 시작했다.

“뭐, 창의력이 없으니 공부만 해서 검사가 됐으려나. 좋아,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도록 하지.

나랑 강준수는 별로 안 친해. 아, 이건 좀 과한 표현이다. 나는 강준수를 존나 싫어해. 물론 걔도 나 별로 안 좋아하고.

근데 꼭 강준수 이 병신이 잡혀 들어갈 때마다 집안에서는 나한테 뒤치닥꺼리를 시킨단 말이야.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이런 부잡스러운 일에 얽혀 들어가면 체면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매번 나만 이 푸닥거리를 해야 되는 거야.”

강유라는 다리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이 새끼가 몇 번 잡혀들어갔으면 이제는 안 그래야 되는데, 내가 매번 꺼내주니까 무슨 검찰청이 호텔인 줄 아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도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네가 나타난 거지. 게다가 내가 손을 쉽게 댈 수 없는 핑계까지 들고서.

완전 흥미진진했다니까? 그리고 그 시나리오의 피날레는 꼴보기 싫은 강준수한테 유죄가 떨어지는 거지.”

강유라가 고개를 잠시 숙이면서 킥킥댔다.

“그 새끼, 그래봬도 결국 부족한 거 없이 자란 온실 속 화초거든. 아마 지금쯤 감옥 갈 생각에 새파랗게 질려 있을걸?”

필웅은 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그와 시연, 다혜가 해냈다고 생각한 것은 스스로 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강유라가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윤허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필웅은 자괴감과 허탈함을 느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있던 강유라는 문득 필웅의 반응을 살피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 야, 실망했어? 너가 만든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필웅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조종하는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아냐 아냐, 난 이번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니까! 너도 잘 했어.”

강유라는 말하며 필웅에게 다가와 필웅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토닥이기까지 했다.

필웅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조용히 일어섰다.

“이제 자랑 다 끝났으면 가 보세요.”

“에이, 자랑 아니야. 너도 뭐랄까 음, 호적수? 같은 거였어. 명판 집어던질 때는 진짜 놀랐다니까? 아, 근데 그건 배상해 줄거지?”

“좀 가라고요!”

필웅은 벌컥 짜증을 내며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거의 밖으로 던지다시피 그녀를 내보내고는 문을 쾅 닫았다.

밖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필웅! 서다혜 기자한테 악감정은 없었다고 전해줘~”

필웅은 그녀가 앉아 있던 애꿎은 소파를 발로 차며 화를 삭혔다.

* * *

필웅의 자취방.

필웅과 시연, 다혜, 장경이 평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사연을 모르는 장경이 그래도 일단 강준수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축하하자며 제안한 자리였다.

이번에는 조촐하게 맥주와 자질구레한 주전부리만 준비된 자리였다.

“어, 건배 할까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장경이 맥주 캔을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제안했다.

필웅과 시연은 별 말 없이 무겁게 맥주 캔을 들어올려 건배했다. 다혜도 뒤늦게 캔을 들어올렸다.

“저, 물론 다혜 씨가 아직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건 하나 잘 해결된 거니 좀 자축해도 되지 않겠슴까?”

뭔가 처진 듯한 분위기에 장경이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다혜 씨는 괜찮을 겁니다.”

“예? 아, 그렇죠! 제가 지켜 드릴 거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강유라로서는 딱히 다혜 씨를 노릴 만한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필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연은 필웅으로부터 이미 강유라가 찾아온 후 들려 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으나, 다혜와 장경은 아직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였다.

장경의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말했다.

“예? 하지만 분명히 강준수한테 문제가 생기면 다혜 씨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랬었죠. 그런데 강유라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필웅이 강유라가 찾아와 해 준 이야기를 다시 간략하게 장경과 다혜에게 들려주었다.

장경과 다혜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소화하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던 장경이 먼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강유라는 일부러 강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 계획을 눈치챘으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는 말입니까?”

“그런 거죠.”

장경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하 하고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야, 재벌가 어르신들은 참말로 굉장하네요. 결국 어린애 장난 보듯 뭐하고 노나 보자고 지켜봐 줬다는 거 아닙니까.”

필웅은 굳이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리는 장경의 무심함에 약간 짜증이 났지만, 사실이다 보니 뭐라 대꾸할 말도 없었다.

다혜가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결과적으로 강준수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저도 무사하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장경도 짐짓 기운을 끌어올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아니, 그 마녀 같은 양반이 뭘 어찌했든 결과는 우리가 바란 대로 된 거 아닙니까? 이게 그 뭣이냐, 윈윈인가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시연도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필웅도 생각했다.

‘하긴, 강유라한테 놀아난 꼴이 되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거잖아? 오히려 다혜 씨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잘 됐다고 해야 하나?’

강유라의 말에 필웅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결과만 생각해 보면 사실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필웅은 자신의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들어올렸다.

“기분은 좀 나쁩니다만 말씀하신 것도 맞네요. 건배하시죠.”

“잉? 저는 방금 다 비웠는디.”

“어? 저도요~”

다혜와 장경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빈 캔을 흔들어 보였다.

“에에~ 더 없어요?”

“갖고 온 거 다 마신 것 같은데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어색한 분위기에 장경이 옆에서 홀짝홀짝 맥주를 하나씩 주워 마시더니, 갖고 온 맥주를 이미 다 마신 모양이었다.

“그럼 뭘 좀 더 사갖고 올까요?”

“안 그래도 돼.”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천천히 필웅의 옥탑방에 위치한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강유라였다.

뒤에는 보디가드를 대동한 채였다.

보디가드는 아이스박스 같은 것을 짊어진 채였다. 여기까지 직접 들고 올라왔는지 온 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당신!”

“당신은 부부끼리 부르는 말이고. 조필웅 빼고 나머지는 초면이네? 강유라라고 해요.”

강유라는 필웅을 가볍게 무시하며 보디가드에게 턱짓을 했다.

보디가드는 아이스박스를 내려 놓더니 주섬주섬 아이스박스를 열기 시작했다.

아이스박스를 풀자, 당시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외국 맥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 육포라든가 치즈같이 희귀한 안주들도 함께였다.

강유라는 선글라스를 벗어 보디가드에게 넘겨 주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다들 이번 사건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내가 신경 좀 써봤어.”

“당신, 아니 강유라 씨!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겁니까?”

필웅이 화를 냈다. 필웅은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부분에 화가 난건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우와아~”

장경은 아이스박스의 내용물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다혜도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시연은 경계의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종이 박스의 내용물에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강유라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킬킬대며 말했다.

“조필웅, 여기서 열내는 건 너뿐인 것 같은데.”

필웅은 배신감을 느끼며 장경과 다혜, 시연을 쏘아보았다.

장경은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손에는 맥주 캔을 하나 든 채였다.

“아니, 그래도 저 신사분이 고생하면서 갖고 오신 거니께.”

“저 여자가 다혜 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잊었습니까!”

“야, 잠깐만. 나는 겁만 줬지 진짜 뭘 할 생각은 없었거든? 납치한 건 너잖아.”

강유라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제지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며 말했다.

필웅은 여전히 적대감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대한민국에 삼영그룹이 알지 못하는 건 없어.”

“좋습니다. 왜 온 겁니까?”

“말했잖아? 이번에 사건도 잘 해결됐고. 위로차 온 거지.”

“이렇게 사람 놀리는 게 재밌습니까?”

“에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여? 기껏 선물도 사갖고 왔구만. 김 실장, 맥주 하나 줘봐.”

강유라가 평상에 아무렇게나 앉으면서 보디가드에게 말했다.

과묵한 보디가드는 말없이 맥주를 한 캔 들어다 강유라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조필웅 너는 이사 좀 해야겠더라. 차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동네에 사냐 어떻게?

가만 있어. 이 분이 서다혜겠고, 이 여자분이 정시연 검사인가? 형사님 성함이?”

“박장경입니다.”

“아, 반가워요.”

강유라는 밝게 웃으며 장경이 들어올린 맥주 캔에 가볍게 자신의 캔을 부딪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필웅은 복장이 다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필웅이 이를 박박 갈면서 말했다.

“왜 나한테만 반말합니까?”

강유라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뭐야아~? 필웅이 질투하니?”

“이런 미친!”

“와, 얘 말하는 것 좀 보게. 시연 씨, 얘 평소에도 이래요?”

필웅이 시연을 돌아보니 시연의 입가에도 씰룩씰룩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들 실제로 강유라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고, 단지 악명만 들어와서 악감정이 사무치지는 않았다는 건가. 그렇지만…….’

필웅은 망연자실하게 서서 왁자지껄하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는 강유라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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