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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36화 (36/151)

36화 그냥 재밌어서 그랬어

필웅은 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시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필웅이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듯 조금 표정이 누그러졌다.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필웅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 됐어.”

* * *

필웅은 다혜가 이야기를 엿듣고 도망가던 날, 간신히 다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간신히 그녀를 잡은 필웅은 헉헉대며 다혜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다혜 씨, 헉헉, 잠깐만요. 어디 가려는 겁니까?”

“기사 쓸 거에요.”

“그러면 안 됩니다.”

다혜가 휙 돌아섰다.

“왜 안되죠?”

“다혜 씨가 위험해집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필웅은 기가 막혀 하면서 뭐라 말하려 했으나 숨이 차서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필웅과 함께 뛰쳐나온 시연이 간신히 그때서야 그들을 따라잡아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후, 다혜 씨. 잘 생각해 보세요.

물론 이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렇지만 지금 당장 다혜 씨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요?

그러면 저희가 걱정되서 어떻게 강준수를 잡아 넣을 수 있겠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누가 기사 쓰면 저희를 죽이겠다고 하면 다혜 씨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사 쓸 수 있어요?”

“그건…….”

의지에 차 있던 다혜의 표정에 순간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필웅은 시연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연은 다혜의 표정에 잠시 드러난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혜 씨, 기사를 쓰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다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단순히 강준수를 풀어주라는 요구였지만 만약 무죄를 받게 해달라고 강요하면요?

그러면 결국 강준수가 무죄 선고를 받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기사를 쓰지 못하게 되잖아요.

강준수가 무죄 선고를 받아서 풀려 나와 버리면 그 때는 너무 늦고.”

이번엔 시연이 할 말을 잃었다.

다혜의 지적은 타당했다. 비록 처음에는 강준수를 풀어 주라는 간단한 요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강유라의 요구는 점점 더 집요해질 것이었다.

아마도, 강준수가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도록 재판에 집중하지 말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미 협박이 통한다는 것을 안 이상, 강유라로서는 그러한 짓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잠깐만.”

생각에 잠겨 있던 필웅이 입을 열었다.

시연과 다혜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만약 이미 다혜 씨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떨까?”

시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댔다.

“넌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봐봐. 내가 강준수를 풀어주기로 한 건 다혜 씨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그런데 만약 다혜 씨가 이미 해를 입었다면 내가 그런 거래에 응할 필요가 있을까?

협상에 응하는 건 상대방한테 받아낼 게 있을 때 뿐이야. 이 경우 강유라가 줄 수 있는 건 다혜 씨의 안전이지.

그러니까 만약 다혜 씨의 안전이 보장 받지 못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강유라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어지는 거야.”

다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멀쩡한데요?”

“그래.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먼저 다혜 씨를 습격이라도 하자는 거야?”

“바로 그거야!”

“엥?”

필웅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방금 말했지. 만약 다혜 씨가 이미 해를 입었다면 나로서는 협상에 응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그러니까 다혜 씨가 이미 습격을 당해서 병원에 입원한 것처럼 꾸미는 거야. 그럼 나는 강유라가 먼저 약속을 깼으니까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재판을 계속할 수 있잖아.”

시연이 잠시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가 필웅에게 질문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러다가 그 놈들이 다혜 씨의 병실에 찾아와서 멀쩡한 걸 보고 진짜로 해꼬지하려고 하면?”

필웅은 말문이 막혔다.

“음, 그건…….”

“습격이 아니라 납치 당한 걸로 하면 어떨까요~?”

다혜가 손을 들고 해맑게 말했다.

필웅과 시연은 그녀를 돌아보며 동시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납치요?”

“네, 납치요. 납치라고 하면 저한테 다시 찾아와서 해꼬지할 생각은 하지 못할걸요?”

시연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는 필웅에게 말했다.

“아니, 이렇게 복잡하게 할 게 아니라, 그냥 박 형사님한테 부탁해서 어디 며칠 숨겨 놓으면 안돼?”

“그건 안돼. 만약 다혜 씨가 어디에서든 무사하게 있다는 걸 알면 분명히 쫓아가서 해치려고 할 거야.”

“아! 그러면 박 형사님한테 부탁해서 어디엔가 숨어 있을 테니, 검사님이 제가 납치됐다고 하면 어떨까요?”

“에?”

“혹시라도 제가 어디에 숨어 있다는 의심을 못하게, 되려 검사님이 강유라를 찾아가서 저를 어디로 납치했냐며 진상을 부리는 거죠~

그러면 적어도 제가 어딘가에 무사하게 있으니 해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하지 않을까요?”

필웅이 들어보니 그럴싸했다.

필웅은 시연을 돌아보았다. 시연도 다혜의 말을 듣고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연극’의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 * *

필웅은 흡족하게 웃었다.

“강유라 사장실에 들어가서 명판까지 깨부수면서 난리를 피우고 왔지. 강유라는 적어도 잠시 동안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하지 못할거야.”

시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 삼영그룹의 정보력은 장난이 아니잖아. 알아보기 시작하면 금방 거짓말인 게 다 들통날텐데.”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판사님한테 최대한 빨리 결심을 해달라고 요청할 거야. 어차피 제대로 재판을 하기만 하면 강준수가 유죄인 건 확실해.”

“흠.”

“너무 걱정하지마. 어렵게 잡은 기회니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필웅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드디어 선고기일이 잡혔다.

가뿐하게 사무실로 돌아온 필웅에게 장경이 찾아왔다.

“형사님, 다혜 씨는 잘 지냅니까?”

필웅은 장경에게 부탁해 형사들이 사용하는 안전가옥에 다혜를 당분간 숨겨 두기로 한 참이었다.

“좀 답답해 하시긴 하는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나요?”

필웅이 긴장하며 물었다.

“얼마 전부터 안전가옥에 수상한 놈들이 기웃거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삼영 쪽 애들이 아닌가 싶은데.”

“그럼 장소를 옮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안 그래도 오늘 오전에 다른 안전가옥으로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잘하셨네요. 조만간 판결이 선고될 겁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어떻게 넘어간다고 쳐도, 다혜 씨가 다시 나타나면 또 해꼬지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필웅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혜 씨가 마약 사건 관련 기사를 쓰긴 했지만 어차피 특정이 되게 쓴 것도 아니고, 애초에 강유라는 다혜 씨한테 그렇게 원한을 품을 만한 이유가 별로 없어요.

이미 강준수가 유죄 선고를 받은 후에는 다혜 씨를 괴롭혀 봤자 득될 게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디…….”

장경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소파에 철푸덕 주저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형사님께서 다혜 씨 신변을 좀 지켜 주시죠.”

“그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필웅은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저도 사실 다혜 씨를 이렇게까지 끌어들이는 게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혜 씨가 원한 일이어서…….”

“저도 뭐 검사님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걱정은 되네요.”

* * *

강준수의 선고일이 다가왔다.

결과는 유죄였다.

“야! 너 내가 누군줄 알아! 너 내가 가만 안둬! 야!”

“누님에게 안부나 전해 주시죠.”

필웅은 경쾌하게 대답하고는 법정을 나섰다.

필웅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쾅!

필웅의 뒤에 이어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강유라였다.

필웅은 짐짓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능글맞게 강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문이 부숴지겠습니까?”

놀랍게도 강유라는 생각보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게. 다음엔 유의할게.”

“이미 판결은 선고 됐습니다.”

“판결에는 항소하면 돼.”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고등법원에는 너 같은 꼴통이 없을 테니까. 뭐, 사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강유라의 말투는 어울리지 않게 시종일관 평온했다. 필웅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뭡니까 이 태도는?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군요?”

강유라는 피식 웃고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고 보니 늘 따라 다니던 그녀의 보디가드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별 말 없이 갑자기 소파에 앉아 옆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필웅이 어처구니없어 하며 언성을 조금 높여 물었다.

“보디가드는 어쩌고 혼자 온 겁니까?”

“어?”

“또 협박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화를 내러 온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러 왔습니까?

여긴 제 사무실입니다. 강유라 씨는 따로 사무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냥 뭐하나 궁금해서 와 본 건데.”

“우리가 그럴 사입니까!?”

필웅은 평정심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과거 지긋지긋하게 나영전을 괴롭히던 강유라의 기억과 이 사건을 수행하면서 보여 준 강유라의 태도가 겹쳐 보이면서 필웅은 거의 인내심을 잃어 버렸다.

“이봐, 어차피 사건도 끝났는데 뭘 그렇게 열을 올려?”

강유라가 한심하다는 듯 쯧쯧대며 말했다.

“아니, 지금 제가 이상한 겁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대말해?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

필웅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강유라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서다혜인가 하는 기자는 잘 지내?”

“뭐라구요?”

“서다혜 빼돌린 거, 모를 줄 알았어?”

필웅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강유라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필웅과 시연, 다혜가 짠 계획이 전부 간파당했다는 의미였다.

필웅은 어떤 변명을 할까 궁리하다가 포기하고는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아, 얼마 안 됐어. 처음 네가 사무실 쳐들어왔을 때는 나도 경황이 없어서 눈치 못 챘는데, 생각해 보니까 뭔가 이상하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납치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걔를 납치할 수가 있겠어?

그리고 나는 손 봐주는 방식으로 납치는 별로 선호하지 않거든.”

강유라가 조금 간격을 두면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필웅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잠시 후 필웅은 진심으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왜 가만 놔뒀습니까?”

나영전의 세계에서 강유라에게 삼영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물론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괴팍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끔 그녀가 보여 주는 알 수 없는 눈빛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그녀를 독대한 변호사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왠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삼영의 마녀’라는 별명은, 신비로울 정도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여 준 일종의 경외의 표시일 수도 있었다.

강유라가 여전히 비웃음인지 정말 웃음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재밌어서.”

필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밌다구요?”

“응. 너희들이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이 짓을 하고 있는 게 재밌더라고.”

강유라는 신문을 덮어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이제까지 검사들은 대부분 대충 윽박지르기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기었거든.

그런데 너는 안 그러더라? 게다가 요령 없이 뻗대기만 하던 몇몇 검사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서다혜 납치 운운하면서 기발한 반항까지 보여줬지.

그래서 한 번 냅둬봤어. 왜 그, 고양이한테 장난감 던져주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웃기는 반응 보여주잖아? 그런 생각이 나더라고.”

강유라는 말하고는 정말 웃기는 장면이라도 생각났다는 듯이 깔깔 웃기까지 했다.

필웅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기분 나쁜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강유라가 그냥 두고보자고 마음을 먹었기에 이렇게 순탄하게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웅은 그렇게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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