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말해
강준수의 제1회 공판기일이 열리고 며칠 후.
필웅의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조필웅 검사.”
“예?”
“나야, 강유라.”
“또 무슨 일이죠?”
“아주 제법이네? 언론에 기사 흘린 거, 당신이야?”
“무슨 기사요? 아, 그 재벌가 자제의 기사가 그쪽 이야깁니까? 뭐 그런 사건이야 워낙에 비일비재해서 말이죠.”
“너 진짜 봬는 게 없구나?”
“알았으면 쓸데 없는 전화 좀 하지 마세요.”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으으으으, 하며 으르렁대는 소리가 났다.
‘시연이랑 다르게 이 여자는 원래부터 싹수가 노랬군.’
그럴 때가 아니란 걸 알지만, 필웅은 막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 이번에 기사 쓴 민주일보 서다혜 기자랑 아는 사이지?”
필웅은 순간 긴장하며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시치미 떼도 소용 없어. 삼영그룹이 고스톱 쳐서 만든 건 줄 알아? 네 주변인물 조사는 이미 다 끝났어.”
“뭘 하려는 겁니까?”
“뭐겠어?”
“검사를 협박하다니 협박죄까지 추가되고 싶은가 보군요.”
강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하! 지금 돌아가는 상황 보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나를 협박죄로 잡아 넣으면? 그럼 이 모든 게 끝날 것 같아?”
필웅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뭐든 들춰내서 괴롭히겠지.’
필웅의 침묵이 이어지자 의기양양한 강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10시까지 시간을 줄게. 당장 강준수 씨 풀어줘. 물론 풀어준 후에라도 행여나 강준수 씨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알지?”
필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온 몸을 급습하는 무력감에, 필웅은 널부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 * *
다음 날 아침.
서다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필웅의 사무실을 찾았다.
“검사님?”
“아, 다혜 씨. 웬일이세요?”
“강준수 사건, 어떻게 된 거에요?”
필웅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소식이 들어갔습니까? 이거 참, 기자님 정보망은 정말 굉장하네요.”
다혜는 필웅의 말을 들은 듯 만 듯 의혹이 역력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강준수가 왜 풀려난거죠?”
“증거도 확보됐고, 딱히 체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져서요.”
“진짜요? 저대로 놔두면 다시 미국으로 도망갈지도 모르잖아요?”
“출국금지는 걸어놨으니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그치만…….”
필웅은 안심하라는 듯 다혜의 어깨를 토닥였다.
잠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혜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검사님, 설마.”
“설마라뇨?”
다혜는 뭔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고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강준수, 예전에도 몇 번 무혐의로 풀려난 적 있다고 들었어요.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나 회유가 있었다고도. 검사님도 혹시…….”
다혜는 슬픈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수사기밀이라 여기까지밖에 말해 드릴 수가 없군요.”
“검사님, 검사님 그런 데에 타협하시는 분 아니잖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다혜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필웅도 별다른 할 말이 없었다.
다혜는 조용히 일어섰다.
필웅은 그녀를 눈으로 배웅했다.
다혜는 눈인사만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필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그녀의 신변이 걱정되서 강준수를 풀어줬다고 하면 다혜가 뭐라고 할지는 불보듯 뻔했다.
전날 시연과 습격당했을 때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던 그녀였다.
오히려 왜 그런 뻔한 협박에 넘어갔냐며 필웅을 타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습격이 있을지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강유라 같은 미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다혜 씨를 또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어.’
그가 미래에서 알던 강유라라면 능히 상상도 못할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위인이었다.
그녀는 선물 꾸러미를 주면 조심히 풀어보는 대신 갈기갈기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 보고는 마음에 안 들면 집어 던지고 갈 여자였다.
언제나 보다 직접적이고, 때로 폭력적인 방법에 기대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강유라였다.
그 때 시연이 들어왔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필웅은 피곤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도 강준수 때문에 온 거야?”
“응.”
필웅은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는 준비해 둔 변명을 풀어놓을 준비를 했다.
필웅이 입을 열려는 순간,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했어.”
필웅은 귀를 의심했다.
“응?”
“잘했다고. 그래봐야 마약사범 한 명이잖아. 마약사범 하나 놔준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상대니까 너무 무리해서 몰아 붙이면 위험하기도 하니까.”
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없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필웅은 충격을 받았다.
‘이건 예전의 내가 하던 생각이랑 똑같은 거잖아?’
필웅은 예전 토스트 집 아주머니를 습격했던 강도 사건을 떠올렸다.
‘범죄자 한 명 정도는 괜찮겠지.
한 명 정도 풀어놔 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그리고 그 결과는 그가 익히 아는 대로였다.
그로서는 시연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웅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강유라한테 전화를 받았어.”
시연이 고개를 들고 놀라서 물었다.
“강유라라면 강준수의 누나?”
“응. 전화해서 협박하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다혜 씨를 언급하면서 당장 강준수를 놔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했어.”
시연이 격분해서 외쳤다.
“뭐?! 검사를 그런 식으로 협박했다고?”
“응. 그 얘길 들으니 어쩔 수가 없었어. 내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는데, 다혜 씨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잖아.”
그 때 문 밖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누군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은 아차 싶었다.
“이런!”
다혜가 떠나지 않고 근처를 배회하다가 문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필웅은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다혜 씨!”
그러나 서다혜는 벌써 저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다혜 씨! 멈춰요!”
그러나 다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쉼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필웅은 끊임없이 그녀를 쫓아가면서도 혹시라도 그녀를 놓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이 대화를 들은 다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 *
며칠 후.
필웅은 삼영패션의 본사 빌딩에 도착했다.
“흐으읍~”
필웅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결연하게 성큼성큼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1층에 방문객들을 위한 컨시어지 데스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서오세요, 어디 방문하시나요?”
데스크의 직원이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필웅에게 인사했다.
“삼영패션 사장실.”
직원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예의 그 직업적인 미소를 되찾고는 말했다.
“네, 혹시 따로 예약하신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뇨.”
“손님, 사장님께서는 별도로 예약을 하시지 않은 손님은 만나 주시지 않는데요. 약속 일정을 알려 주시겠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약속 일정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필웅은 더 이상 직원과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판단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사장실이면 최고층이겠지.’
필웅은 데스크를 떠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손님, 함부로 사장실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필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침 1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닫혀가는 문 틈 사이로 저 쪽에서 낭패한 얼굴로 달려오는 경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필웅은 그대로 최고층인 20층을 눌렀다.
-띵.
경쾌한 소리를 내며 20층에 도달하면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20층에는 사장실만 있는 모양이었다.
사장실의 앞에 비서인 듯한 직원이 또 한 명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조필웅 검사.”
필웅은 대답하고는 방문자 명단에 필웅이 없는 것을 눈치 챈 비서가 그를 제지하기도 전에 사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손님, 잠시만!”
사장실에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에 올려진 명판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 강유라]
책상 너머의 강유라가 방만한 자세로 안락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필웅?”
필웅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가 앉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무슨 짓이야? 여긴 왜 왔어?”
“일하러 왔지 춤이라도 추자고 왔겠습니까?”
필웅이 위협적으로 책상에 두 손을 짚은 채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뒤에서 어쩔 줄 모르고 그를 따라 들어온 비서가 힘겹게 그를 불렀다.
“손님, 여기 이렇게 들어오시면…….”
강유라는 짜증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들어오기 전에 막았어야지 다 들어와서 뭐 어쩌자는 거야? 나가.”
비서는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강유라는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필웅을 올려다 보았다.
잠시 그렇게 필웅을 바라보던 강유라는 어이가 없어하며 말했다.
“진짜 너 미쳤구나?”
“미친 건 너지.”
강유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뭐?”
“분명 내가 강준수를 풀어 주면 서다혜 기자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이었을 텐데.”
강유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하잖아?”
“서 기자가 그저께부터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강유라는 이제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뭐? 하지만 난…….”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이건 명백히 계약 위반이지. 안 그래?”
필웅이 다시 한번 거칠게 강유라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을러댔다.
강유라가 필웅의 얼굴을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있는 필웅에게 위치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강유라는 초조하게 몇 번 사무실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휘젓고는 말했다.
“아니, 나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니까?”
“이제와서 멍청이처럼 굴거야? 아니면 내가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
강유라는 서슴없이 반말을 내뱉는 필웅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필웅의 기세에 눌려 그의 태도를 지적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미치겠네. 내가 한 적이 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럼 서다혜 기자에게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민주일보에서도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네가 서다혜 기자의 신상을 가지고 협박질을 한 직후에 서다혜 기자가 실종됐는데, 네가 모르면 네 비서한테라도 물어봐야 하나?
아, 요인 납치는 공식 스케줄에는 안 넣어 놓으셨나?”
강유라가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필웅이 지적한 대로, 갑자기 서다혜가 실종됐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강유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로 몰라.”
필웅이 강유라의 이름이 적힌 명판을 들어다가 바닥에 집어 던졌다.
-와장창!
“꺄악!”
강유라가 비명을 지르며 방어하듯 두 팔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필웅이 그래도 분이 삭지 않는다는 듯 이를 악물고 강유라에게 다가가며 씹어뱉듯 말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말해! 서다혜 기자한테 무슨 짓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