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34화 (34/151)

34화 난 분명히 얘기했다

필웅의 선배인 유 검사가 필웅의 방에 찾아왔다.

“선배님, 웬일이세요?”

필웅이 반가워하며 자리를 권했다.

유 검사는 소파에 앉았다.

“아니 그냥 뭐, 이번에 부서 옮겼다길래.”

“아, 선배님 강력부셨죠.”

“응, 그렇지. 뭐 궁금한 건 없어?”

유 검사가 어색하게 대답하며 필웅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글쎄요? 뭐 아직은요.”

“그래…….”

유 검사는 우물쭈물하면서 괜히 소파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원래가 유 검사는 그다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필웅은 평소의 그런 유 검사를 알고 있었기에 먼저 물어보았다.

“선배님, 뭐 하실 말 있으세요?”

“응? 아니 뭐, 할 얘기는 아니고…….”

그러고 나서도 유 검사는 한참 뜸을 들였다.

슬슬 필웅이 답답해할 때쯤, 유 검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저기 그, 강준수 사건 하고 있지 않아?”

유 검사가 과거 강준수가 마약법 위반 사건을 저질렀을 때도 수사했던 적이 있다는 것은 필웅도 알고 있었다.

‘뭐 팁이라도 주려는 건가?’

필웅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거 있잖아…….”

“말씀하시죠.”

“음, 뭐랄까. 적당히 무혐의 처리하는 게 좋아.”

“뭐라구요?”

필웅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유 검사는 흠칫 하더니 소심하게 말했다.

“아니, 네 사건인데 내가 뭐 관여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전에도 내가 강준수 사건을 수사한 적이 있는데…….”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사실은, 좀 까다로운 사건이야.”

필웅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까다롭다뇨?”

필웅은 이번 강준수 사건의 증거자료들을 갖고 와 유 검사에게 하나씩 보여주며 물었다.

“이번엔 증거도 확실하고 걸릴 게 하나도 없는데요? 선배님 저번에는 분명히 증거가 부족했다고…….”

유 검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필웅이 입을 열려는 순간, 유 검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증거가 없었던 게 아니야.”

필웅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구요?”

“그거, 증거가 없었던 게 아니라고.”

“아니,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제 말은 증거가 있는데 왜 증거가 없다고 무혐의 처분을 했냐는 뜻입니다.”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유 검사가 평소에는 소심하지만 그래도 나름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필웅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증거가 있는데도 사건을 덮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선배,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멀쩡히 증거가 있었는데 증거가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필웅이 격정적으로 말했다.

유 검사는 주눅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당연히 그런 건 아니지.”

“그럼 뭡니까?”

유 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받은 그 사건, 사실 우연히 너한테 배당된 게 아니야.”

“그러면요?”

“강준수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거 강력부에 웬만한 검사들은 다 알아.

그래서 수사를 하다가도 엎어지고 그냥 놔주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거지.

증거를 덮고 수사를 종결해야 하는 귀찮은 일을 떠맡아야 하니까, 강력부에 이제 막 들어온 너한테 사건을 그냥 떠넘겨 버린 거라고.”

필웅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게 큰 사건이 들어온 게 이상하긴 했지.’

강준수의 사건은 이미 언론에서도 떠벌려져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이 그에게 처음으로 배당되어 필웅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까지는 몰랐기에 필웅은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해 왔었다.

“강준수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아무튼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

유 검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필웅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사무실 방문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설마 그 삼영그룹의 외압 운운이 진짜라는 말인가?’

* * *

덜컥!

필웅의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혼자 남아 일을 하고 있던 필웅은 이제 누군가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와도 짜증을 낼 여력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건 한 젊은 여자와 한 남자였다.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여자의 비서나 보디가드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여자는,

‘강유라?’

분명 필웅이 기억하던 강유라보다는 훨씬 젊었지만, 2020년의 강유라의 모습이 그녀에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명 강유라였다.

필웅은 경악했지만, 평정을 되찾고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강유라는 대답 없이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그대로 그녀의 뒤에 섰다.

필웅은 뭘 하는건가 싶어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강유라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나른하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 왠지 낯이 익은데. 당신이 조필웅이야?”

필웅은 기가 막혔다.

소위 재벌가의 자제들이 안하무인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삼영의 자제들은 하나같이 상식 밖이었다.

‘여기서까지 갑질인가.’

나영전으로 살던 마지막 날 강유라와의 회의를 떠올리며 필웅은 이를 갈았다.

얼마 전 삼영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마주친 것도 떠올랐다.

‘도대체가 악연이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지.’

필웅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죄송한데 누구시죠?”

강유라는 그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며 대답했다.

“나, 강유라야.”

“그렇군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무슨 일이신데 제 사무실에 갑자기 찾아오신 거죠?”

“잘 알고 있을텐데.”

강유라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쏘아붙혔다.

필웅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뭘 말입니까?”

“내 동생.”

“강준수 씨요?”

“그래. 모르는 척 좀 그만할래? 짜증나니까.”

“강준수 씨가 뭐 어쨌다는 말입니까?”

강유라가 표독스럽게 필웅을 쏘아보며 내뱉었다.

“빨리 풀어주라고. 이 정도 놀아줬으면 됐잖아?”

필웅이 보던 기록을 탁 내려놓고 말했다.

“정말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강준수 씨가 검찰청에 놀러 왔다는 말입니까?”

“뭐?”

“그런 것 치고는 별로 재미 있게 놀아주지는 않던데요. 저는 아직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고요.”

강유라가 이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하, 너 뭐야? 그렇게 안 보였는데 선수네?”

“선수요?”

강유라가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눈짓을 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유라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필웅에게 던졌다.

“뭡니까, 이게?”

“너 강력부 초짜라며? 선배들이 팁 좀 줬나보네. 그 정도면 놀아볼만 하겠어?”

필웅은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살펴 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액수의 현금이었다.

필웅은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내려 놓았다.

강유라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놀기엔 충분하지? 자, 빨리 강준수 씨나 내보내 줘. 언제 내보낼거야?”

“안 내보낼 건데요.”

강유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너 지금…….”

“강유라 씨도 뇌물죄로 사이 좋게 구치소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라면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습니까. 처음부터 똑바로 얘기했으면 피차 쓸데 없는 대화도 안 했을텐데.”

강유라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필웅을 노려보았다.

필웅은 그녀의 눈길을 무시하면서 봉투를 다시 강유라에게 던지듯이 돌려주었다.

강유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뭐야? 너 뭐 검찰총장 아들이라거나 그런 거야?”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근데 왜 이래?”

“뭐가 왜 이럽니까?”

“너, 이렇게 뻗대던 검사들이 다 어떻게 끝났는지 못 들었어?”

필웅은 비로소 유 검사가 했던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게 이런 얘기였나.’

강유라의 태도를 보니 필웅은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일전 강준수를 수사하던 선배들은 뇌물을 받고 알아서 편의를 봐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입김으로 보복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강유라는 씩씩거리며 계속 필웅을 쏘아보고 있었다.

필웅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선배들이 뭐 어떻게 됐는지 저는 알 바 아니고, 말씀 끝나셨으면 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일할 게 있어서요.”

“뭐야?”

“뭐가 뭔지 그만 좀 물어 보시죠. 알아 듣게 여러 번 설명했지 않습니까”

강유라는 부들부들 떨며 한참이나 필웅을 노려보았다.

분명 화가 나서 못 참겠는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필웅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아도 보였다.

“하, 참내.”

그렇게 서서 필웅을 노려보던 강유라는 결국 코웃음을 치더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필웅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 * *

주 계장이 어디선가부터 전화를 받고는 조심스럽게 필웅을 불렀다.

“검사님.”

“예?”

“저, 검사장님이십니다.”

필웅은 전화를 당겨 받았다.

“예, 조필웅입니다.”

“어, 조검? 잘 지냈나?”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강력부 일은 좀 어떤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거기서도 잘 하겠지.”

“과찬이십니다.”

잠시 수화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데, 조검.”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맡은 강준수 사건 말이야. 좀 더 유연하게 처리할 수는 없나?”

필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벌써 강유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검사장까지 순식간에 움직이다니, 필웅은 생각보다 만만찮은 상대에 맞닥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장님.”

“음, 그래. 이야기 하게.”

“오늘 오전에 강유라 씨가 찾아왔었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얘기가 좀 쉽겠구만.”

“그렇습니다. 저를 뇌물로 매수하려고 시도하더군요.”

“그래…?”

수화기 너머에서 검사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유라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왔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필웅에게 놀란 걸지도 몰랐다.

“큼, 크흠. 그래서 어떻게 했나?”

“정중하게 거절했고, 신문사에도 제보했습니다.”

“뭐라고!?”

필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건을 특정한 건 아니고, 요새 재벌가에서 검찰을 매수하려고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식으로만 익명으로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정도면 쓸데 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

검사장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태연자약하게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필웅이 문득 돌아보니 주 계장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검사님? 이래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필웅도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웅은 이미 진우현의 사건과 강준수, 강유라의 연이은 도발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게다가 어차피 K만 잡으면 나야 돌아갈 몸이고.’

조금 무책임한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옳지 못한 일을 하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영전은 그가 떠나고 남겨질 필웅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원래의 조필웅이라도 이렇게 행동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계장님, 걱정 마시고 강준수 공소장 전달해 주세요.”

필웅은 경쾌하게 이야기하며 자리에 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