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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32화 (32/151)

32화 그 놈만 잡고 가겠습니다

“예? 하하하, 아이구, 아닙니다! 예? 좋은 일이요? 어휴~ 뭐 그런 게 있겠습니까. 다 잘 도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지요.”

필웅은 이규필 부장의 방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요새 골치 썩이던 일이 좀 있어서. 하지만 잘 해결됐습니다.”

이 부장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면서도 유쾌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도 누군가와 전화 중인 모양이었다.

“예,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딸칵 하고 전화기를 내려 놓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은 다시 길을 재촉하며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이 부장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 거지?’

게다가 이 부장의 기분이 묘하게 좋아 보이는 점이 괜히 더 신경 쓰이는 필웅이었다.

* * *

필웅은 청사를 나서다가 윤진을 마주쳤다.

“필웅아!”

윤진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필웅도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법정에서 상대방으로 만나고 나니 왠지 예전처럼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네.’

물론 친한 사이의 법조인들끼리 상대방으로 만나는 일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웅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치명적인 반격을 가한 사람이 윤진이라는 점 때문에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윤진 선배야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지. 하지만.’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굳이 변호하는 걸까?

연수원 시절 윤진은 필웅과 비슷한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연수원을 수료하던 때에도 자신은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던 윤진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작 진우현 같은 사기꾼이나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필웅은 내심 못마땅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런 필웅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진이 다가와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예?”

“같이 밥이나 먹자고 왔어. 우리 같이 밥 안먹은지 오래됐잖아?”

갑작스런 그녀의 접근에 필웅은 조금 당황해서 팔을 살짝 뺐다.

윤진은 그런 필웅의 팔과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필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숙맥같은 건 여전하네! 자, 오늘은 누님이 산다니까? 영감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필웅은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 난처해하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 때 멀지 않은 벤치 쪽에 시연이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선배, 그게 저…….”

“에이, 알았어. 그냥 내가 결정할게. 따라나 와.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윤진은 필웅의 어깨를 탁 치더니 이제는 필웅의 팔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필웅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와 벤치가에 서서 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연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니, 선배. 이건 좀!”

“고기 먹자 고기.”

윤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필웅을 계속해서 질질 끌고 갔다.

‘아니, 뭔 여자가 이리 힘이 세?’

필웅은 저항하다가는 넘어질 판이라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청사를 나섰다.

‘내 주위에 여자들은 왜 다 이리 힘이 센거지.’

필웅은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시연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 * *

필웅은 말없이 잔에 든 술을 비웠다.

윤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필웅이 술 많이 세졌네?”

필웅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술 마실 일이 많아서요.”

“술 마실 일?”

“선배도 아시잖아요.”

필웅은 말하며 도발적으로 윤진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윤진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진우현이요. 선배가 변호한 그 놈.”

“아아, 우현 씨? 정말 안됐지.”

윤진은 슬픈 건지 자조적인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잔에 든 소주를 한 입에 쭉 들이켰다.

“안됐다? 그게 다에요?”

“그러면?”

윤진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필웅에게 물었다.

필웅도 윤진이 막상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고, 의뢰인이 죽은 거에 대해서 뭘 느껴야 하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사고방식이었지만, 필웅은 어쩐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예전 나영전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뢰인은 그저 내가 사건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돈을 지급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사의 희노애락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나영전의 철학이었다.

“그렇네요.”

“나는 네가 더 걱정돼.”

“제가요?”

필웅이 짐짓 놀라며 반문했다.

“응. 너는 우직해 보이지만, 마음 약하잖아.”

“크흠!”

당황한 필웅이 헛기침을 했다. 윤진은 그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우현이 죽고, 수사하던 사건이 중간에 엎어져 버렸으니까 많이 허탈할 것 같아. 물론 나는 변호하는 입장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각자 할 일을 하는 거니까.

그리고 언론에서도 강압수사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는 모양이던데, 혹시 그것 때문에 자책하고 있을까봐 걱정되서 찾아온거야.”

필웅도 오늘 오후쯤 언뜻 뉴스를 본 듯한 기억이 났다.

일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추측성 기사들이 지면과 방송에 간간히 보도되고 있었다.

주로 진우현이 자살한 것이 검찰과 경찰의 강압수사에 못이겼기 때문이라는 추측이었다.

필웅은 피식 웃고는 잔에 고정했던 시선을 거두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책이라뇨? 설마 선배도 우리가 강압수사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윤진이 오늘 처음으로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응?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알아요. 농담한 거에요.”

필웅은 잔에 든 술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술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윤진도 마주 웃고는 잔을 그의 잔에 부딪쳤다.

“그런데, 진우현은 어쩌다 변호하게 된 거에요?”

윤진의 얘기를 듣고나니 필웅은 문득 갑자기 왜 윤진이 진우현 같은 사기꾼을 변호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응? 아, 어쩌다랄 게 있나 뭐. 그냥 회사에서 맡은 사건이니까.”

“아, 선배 로펌 다니세요?”

“응. 법무법인 진화라고 들어봤어?”

필웅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느꼈다.

‘진화라고?’

진화라면 나영전이었던 과거의 그가 근무하던 로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면 진화가 막 설립되고 점차 규모를 불려 나가던 시기였을 것이다.

“’진화’요?”

“응. 아직은 막 크지는 않은데, 요새 많이 규모가 커졌어. 나도 여기서 계속 일하면 파트너도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윤진이 밝게 웃으며 꿈꾸듯 말했다.

“그, 원래 이런 사건 많이 하나요?”

“우리 회사에서? 응, 우리 회사는 의뢰인을 딱히 가려 받지는 않아.”

물론 변호사의 기본적인 윤리 중 하나는 의뢰인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악독해 보이는 자라도 변호 받을 권리는 보장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득 필웅은 나영전이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 회장의 사건을 수행하던 때였다.

그때 그는, 변호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뢰인의 편에 서야 하고, 절대 의뢰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때 그의 모습과 지금 윤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긴, 내가 지금 윤진 선배한테 뭐라고 할 건 못 되겠군.’

하지만 필웅은 악독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범죄자들을 여럿 맞닥뜨리고 보니 최근 그러한 원칙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필웅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좀, 그래도, 그런 악덕 사기꾼 같은 놈들은 거르는 게 회사 이미지 유지에 좋지 않을까요?”

윤진도 한숨을 쉬며 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은 해. 악당들을 변호하는 거, 나도 좋아하지는 않거든.”

윤진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타다닥 타다닥.

필웅은 말없이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도 알잖아? 모든 범죄자들은 변호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

그리고 나는 실제로 우현 씨가 결백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1%라도 있는 이상, 변호사로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을 들은 필웅은 마음 속에서는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과거 나영전이었을 때는 그랬지.’

“이 사건은 너나 나나 그냥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나한테 서운하게 느끼거나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윤진이 술에 취해 약간 나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하지.’

윤진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잔을 채워 다시 들어올렸다.

“우리, 아직 좋은 친구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필웅도 씩 웃으며 잔을 들었다.

“물론이죠.”

* * *

그날 밤, 필웅은 늦게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오늘 윤진과 나눈 이야기들을 되새겨 보았다.

‘변호사의 윤리, 각자의 역할.’

자신의 역할과 법조인으로서의 철학에 관한 윤진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필웅은 왠지 자신이 예전 나영전으로서 해왔던 일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윤진의 입장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반드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말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은 걸까?’

필웅은 천장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법무법인 진화라니.’

필웅으로서는 진화에서 일하던 나날들이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필웅으로서 깨어나 살기 시작한지 고작 몇 개월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몇 개월 전의 일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들은 이름인데, 뭐지 이 느낌은.’

오랜만에 윤진의 입으로부터 들은 ‘진화’라는 이름은 반가움보다는 오히려 회한 같은 감정을 필웅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가 예전 그렇게 열심히 청춘을 바쳐서 일했던 곳.

그러나 그 이름은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다.

진화라는 이름은 오히려 변호사였던 그가 상대방을 어떻게든 굴복시키기 위해 했던 수많은 파렴치한 행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느새 그에게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필웅은 그렇게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 * *

“이봐, 일어나 봐.”

누군가 필웅의 뺨을 툭툭 쳤다.

필웅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아직 자신의 방 안이었다.

그런데 옆에 어떤 형체가 쭈그리고 앉아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에?”

필웅은 당황했다.

“나 은전차사야.”

필웅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헉!? 아니, 어쩐 일입니까?”

“아, 업데이트 좀 해 줄 게 있어서.”

“업데이트요?”

“야, 너 집에 의자 같은 거 없냐? 무슨 집이 이렇게 휑해?”

“아니, 이 환경은 당신이 고른 그자나요(거잖아요)!”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여전히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차사로군.’

“할 수 없지. 다름이 아니라, 사실 이제 슬슬 너를 돌려 보낼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얘기해 주려고 왔어.”

은전차사는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예? 벌써요?”

은전차사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벌써라니?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럼 짐 싸두고 있어. 아, 아니지. 쌀 짐은 없겠구나.”

은전차사는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요!”

필웅은 그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무서워서 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

“왜?”

“저, 그게.”

필웅은 은전차사에게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가 1998년으로 돌아와 사건들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사건들의 진행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

이미 사건들의 진행 방향이 달라진 이상, 그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런 건 걱정 안해도 돼. 너를 미래로 돌려 보내도 조필웅은 일단 살려 둘거야. 애초에 이 우주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네 맘대로 휘저을 수 있게 대충 만들어져 있지 않거든?”

“아니, 그래도 타임 패러독스라든가 그런 게…….”

“그건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고. 아무튼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은전차사가 그의 말을 끊고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필웅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저, 여기서 조금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뭐?”

은전차사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소리를 높혔다.

“야, 이게 무슨 니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 놀이공원인 줄 알아?”

“애초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서 저를 여기로 보내 버린 게 누굽니까?

제가 처음 죽은 것도 실수지만, 사실 저를 과거로 날려 보낸 것도 실수죠? 상식적으로 저를 그릇에 담으려면 비슷한 연대에 죽은 인간한테 담아야지, 과거로 날려 보내는 게 말이 됩니까?”

은전차사가 순간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필웅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공세를 이어갔다.

“제가 염라대왕님한테 한 마디만 올리면 다 죽는 겁니다. 알겠어요?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저도 여기 천년만년 눌러 살겠다고는 안 할테니까 여기서의 일만 해결하고 가게 해 줘요.”

은전차사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승부의 결과는 뻔했다.

“좋아. 하지만 일이 마무리 되면 진짜 돌아와야 해.”

필웅은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대신, 대강이라도 기간은 줘야겠어. 나도 둘러댈 말이 필요하다고.”

“K.”

“뭐?”

필웅이 희열까지 느껴질 정도로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K라는 놈만 잡고 바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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