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31화 (31/151)

31화 이건 내 기억과는 다른데?

필웅은 조금 들떠 있었다.

‘드디어 K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건가?’

비록 진우현과 김진범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필웅은 배후의 흑막인 K의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에 여전히 초조했다.

진우현과 김진범을 조사하거나 신문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은근슬쩍 K의 정체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항상 차가운 침묵이었다.

다른 모든 사실은 이야기해 줘도 그가 누구인지만큼은 알려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목격자는 누굽니까?”

장경은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 커피숍의 사장입니다. 사실 그 날, 메탈릭인가 뭔가 하는 외국 밴드가 와서 근처에서 공연을 한 날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 사장도 밴드의 팬이었는데 가게 일 때문에 공연에는 못 갔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 날은 비교적 한산한 날이었는데, 남자 셋이 오더니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더랍니다.”

“대화 내용을 들었답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 나이가 젊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전부 다 명품으로 옷을 휘감고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 한 사람이 TV에도 몇 번 나온 진우현이어서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K의 인상착의는 기억한답니까?”

장경이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슴다. 사장 말로는 김진범과 진우현 외의 한 사람, 즉 K가 머플러랑 선글라스 같은 걸로 얼굴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었다고 하던디요.”

“그 정도로는 별로 특정이 안 되겠는데요.”

시연이 약간 실망한 눈초리로 필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필웅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게요.”

“아! 그러고 보니 다른 특징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뭔가요?”

장경이 잠시 뭔가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사장도 그 날 손님도 없고 해서 그 쪽을 흘끔흘끔 계속 쳐다봤나 봅니다. 그렇게 훔쳐보다가 발견한 건데, 왼쪽 손에 흰 점이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흰 점이요?”

“예. 아마 그 거리에서 눈에 띌 정도면 꽤 큰 점이겠죠?”

“흠, 그렇겠네요.”

필웅은 그래도 그나마 낫다는 생각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는 한 번 혹시 근처에서 입수할 수 있는 CCTV 자료 같은 게 있나 확인좀 해 볼까 합니다.”

“좋습니다. 혹시 더 알게 된 사실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예,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장경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사무실을 떠났다.

시연도 곧이어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필웅은 점점 더 진우현, 그리고 그 뒤의 K에게 접근해 간다는 생각에 한껏 의지를 불태웠다.

‘전부 다 정의의 철퇴를 내려쳐 주지!’

* * *

다음 날.

다혜는 망연자실하게 진우현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 기자님?”

어느새 다가온 장경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형사님?”

“예, 알고 오신 거죠?”

“네. 형사님도?”

“예.”

그들 각자 다른 기자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따로 우현의 집 앞에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참이었다.

물론, 그들만이 우현의 집 앞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 외에도 수많은 경찰, 기자 및 할 일 없는 구경꾼들로 진우현의 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혜와 장경은 마주보며 굳은 표정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뗐다.

“잠깐, 현장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폴리스라인을 지키고 있던 순경이 그들을 제지하자 장경이 귀찮다는 듯 형사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순경은 말없이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근처에 몰려 있던 기자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갑자기 몰려 들었다.

다혜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가 다른 기자들의 눈에 띄면 안 될 것 같아 슬금슬금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정장을 갖춰 입은 TV 방송국 기자가 미처 들어가지 못한 장경에게 마이크를 먼저 들이대며 물었다.

“사건 관계자 분들이신가요?!”

옆에 서 있던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왜소한 기자 하나도 마이크를 들이댔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후 봇물이 터지듯 질문의 홍수가 쏟아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진우현 씨는 어떻게 석방된 거죠?”

“경찰이신가요? 검찰과 경찰의 감독 실패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경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자세한 건 오늘 오후에 저희가 브리핑해 드릴 겁니다. 인터뷰 안 합니다.”

장경은 말을 마치고 우현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집에 들어선 다혜가 여전히 표정은 긴장한 채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멋있네요.”

장경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뭣이요?”

“신분증 탁 보여주고 사건 현장 들어오는 거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데 이걸 다 해보게 되네요.”

다혜는 별 생각 없이 말하고는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아, 카메라는 안 됩니다.”

“에에?”

“사건 현장 사진은 위에서 허락 나기 전에는 민간에 막 뿌릴 수가 없어요. 이해해 주십쇼.”

“음, 알겠어요~”

다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메라를 다시 카메라 가방에 넣었다.

장경은 전에 들어온 적이 있던 우현의 집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예전에 압수수색을 위해 진우현의 집에 들어섰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장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우현의 방 쪽으로 향했다.

‘이 광경을 빼면 말이지.’

방에는 우현이 넥타이로 화장실 쪽 문에 목을 맨 채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나름 형사생활을 꾸준히 해 온 장경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장경이 그럴진대 다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호기롭게 우현의 저택에 발을 들여놓던 모습과는 달리, 우현의 시체를 본 다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장경은 침착을 되찾고 옆에 서 있는 감식반 경찰에게 물었다.

“사망 경과 관련해서 나온 것 있습니까?”

시체의 소지품과 넥타이 등을 조사하고 있던 감식반 경찰이 비로소 그를 발견하고 인사하며 대답했다.

“사망추정시간은 어젯밤 정도고 사인은 질식사인 것 같긴 한데, 구체적인 건 부검해 봐야 알겠죠.”

“자살인 겁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딱히 침입 흔적도 없는 것 같고, 정황도 그렇고.”

“정황이라뇨? 구속됐다가 어제 신나게 풀려 나온 사람인데 자살할 정황이 어딨습니까?”

“아, 뭐랄까. 유서라고 해야 되나? 사망자의 방에서 편지 같은 게 나왔거든요.”

감식반은 말하며 비닐팩에 갈무리한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반성문

제가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꼭 사죄 드리고 싶습니다.

급하게 노트 같은 것을 뜯어서 쓴 글 같았다. 위의 몇 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여백이었다.

장경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이거 사망자가 쓴 것 맞습니까? 서명 표시 같은 것도 없고.”

“아, 안 그래도 집에 남아 있던 피해자의 필적들 수집해서 대조해 봤는데 대략 일치한다고 합니다.”

“예…….”

장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구속당했다가 풀려 나오면서 갑자기 반성을 하겠다? 그러고는 자살을 해?’

다혜도 심각한 표정으로 옆에서 편지를 함께 읽었다.

“갑자기 자살이라니, 이상하긴 하네요.”

“예. 뭔가 심상치 않네요.”

하지만 감식반에 의하면 현장에서는 타살과 관련된 별다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서도 진우현 본인이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혹시 뭐 새로운 거 나오면 알려 주세요.”

“예~”

감식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조사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조 검사님한테 연락해 봐야겠어.’

집을 나서며 장경은 생각했다.

* * *

“진우현이 죽었다구요?”

“예.”

장경은 아예 조필웅의 사무실에 찾아가 진우현의 소식을 전했다. 장경의 예상대로 필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요? 아니, 왜요?”

“목을 매서 죽었다고 하고, 현장에서 유서 비슷한 것도 발견됐다고 합니다. 뭐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 그런 내용이더라구요.”

“그 미친 놈이 석방되던 날 저한테 협죽도 꽃까지 선물하고 갔는데요?”

“협죽… 뭐요?”

“협죽도요. 꽃인데, 꽃말이 방심하지 말라인가 뭐 그렇답니다. 제가 그걸 받고 얼마나 열 받았는데. 그런 놈이 자살을 했다구요?”

장경이 쩝 입맛을 다시고는 대답했다.

“저도 의심쩍긴 한데, 감식반 의견으로는 유서도 진우현이 쓴 게 맞다고 하고, 딱히 타살 정황도 안 보인답니다.

새로운 거 발견되면 알려 달라고는 했는데…….”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안 되죠. 그런데 어쩝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필웅이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입막음 당한 것 아닙니까?”

“입막음이요?”

“K라든가 김진범 같은 놈이 자신의 범행이 탄로날까봐 진우현을 죽인 것 아닐까요?”

장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능은 한 얘긴데…….”

“그렇죠?”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장경이 맞장구를 치자 필웅은 반색했지만, 그에 이은 장경의 지적에 필웅도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배후의 흑막이고, 거대한 음모고 모두 아직은 필웅의 가설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은 그 거대한 배후가 무엇인지 그 스스로도 구체적으로 예상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아무튼 검사님 말씀대로 진우현이 죽어 버려서 당분간은 수사 진전이 어렵겠는데요.”

장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경이 떠나고, 필웅은 주먹을 꽉 쥐면서 부르르 떨었다.

‘서민들 피나 빨아먹고 사는 놈들이 이렇게까지 악독하다니!’

실체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는데도, 이렇게 눈앞에서 가로막히자 필웅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몰입하게 된 스스로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의 그라면 애초에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는 일이니 이런 일은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이 시대인지, 혹은 이 시대에 속한 다른 사람들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바로 그 자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점점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필웅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필웅의 마음 속에서 한 줄기 의혹이 솟아올랐다.

‘잠깐, 크리미널 아카이브 내의 자료에 따르면 진우현은 이 사건에서 죽지 않았는데?’

처음 진우현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보았을 때, 진우현이 사건이 모두 종결되고 기고만장하게 인터뷰를 한 자료를 본 사실이 떠올랐다.

‘역사가 이렇게까지 바뀌게 되는 건가?’

필웅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단순히 사건뿐만 아니라, 역사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의 관여로, 주변 사람들의 운명까지 바뀌고 있다?’

필웅은 좀처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기 혼란스러웠다.

‘진우현이 죽었으니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야 하지? K를 잡을 방법은 이제 없는 건가?’

그렇게, 어두운 사무실에 남아 필웅은 풀리지 않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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