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29화 (29/151)

29화 이건 당신의 보험이죠?

“음악 소리요?”

장경이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음악 소리요. 안 들리세요?”

다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이어폰을 들어 장경의 귀에 가져다 댔다.

장경이 집중해서 들어보니 뭔가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장경이 이어폰을 빼면서 말했다.

“뭐가 들리는 것도 같고……. 근데 이런 음악은 커피숍같은데서 다 틀어 주는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커피숍에서 튼 음악이면 이렇게 작게 들릴 리가 없어요. 이건 밖에서 나는 소리에요.”

“그럼?”

“하지만 아예 야외라고 보기엔 인파의 소음이 적어요. 이건 반쯤 개방된 장소, 그러니까 테라스가 트인 커피숍 같은 데서 외부의 소리가 들린 거에요.”

장경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 음악 소리, 저는 들어도 당최 뭔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알아요.”

장경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다혜는 장난스럽게,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내한공연을 온 미국 밴드가 있었어요. 이름은 메탈리카. 이 노래는 올림픽공원에 내한공연을 온 메탈리카의 노래에요!”

* * *

시연은 진범이 이송되어 온 신문실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시연은 진범을 위아래로 차갑게 훑어 보고는 물었다.

“김진범, 맞죠?”

“예.”

“나이는?”

“서른 넷입니다.”

시연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인적사항을 묻고는 조서에 기록했다.

“자.”

시연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모두가 진짜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아볼까요?”

시연은 말하며 도발적으로 맞은편의 김진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김진범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진우현과는 무슨 관계죠?”

“친굽니다.”

“진우현이 하던 사업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요?”

“예, 조금은.”

“그러면.”

시연은 그와 진우현, K의 대화가 담겨진 테이프를 들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카세트에 집어 넣었다.

몇 번을 들어서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인 대화가 좁은 신문실 안에 울려 퍼졌다.

녹취를 듣고도 김진범은 별 말이 없었다.

“이 대화 속의 인물, 다 누구인지 알고 있죠?”

“제 목소리 같기도 하네요.”

“본인이 진우현 및 K와 한 대화, 맞죠?”

시연은 집요하게 물었다.

진범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맞겠죠, 뭐.”

“그러면 대화의 내용처럼 당신이 진우현과 K라는 인물과 합심해서 주식 사기를 공모했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요?”

“이봐요, 영감님.”

진범은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모아쥐면서 비로소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도 그냥 사업하려다가 실패한 거라구요.

영감님은 무슨 주식이 오르고 내릴지 100% 확신할 수 있어요? 사업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거라니까?”

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진범도 말을 마치고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다.

“K는 누구죠?”

“K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대화 속에서 K라고 불린 인물, 당신도 누군지 알고 있잖아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K는 그냥 투자자고…….”

“투자자라구요?”

시연은 다시 테이프를 감아 재생했다.

K: 그래. 내 계획이나 다시 들어 볼까.

시연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계획은 K로부터 나온 게 아닌가요?”

“이미 우현이한테도 들었겠지만, 이 투자 계획이라는 게 누구 한 사람한테 나왔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이 계획해서 나오는 건데…….”

“그러면 왜 K 는 자신의 계획이라고 하는 거죠?”

“그 양반은 원래 생색내는 걸 좋아한단 말입니다. 뭐 어차피 그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게 무슨 상관입니까? 돈만 벌면 되지.”

“K한테 투자금을 받았나요?”

“초기 투자금은 조금 받았죠.”

“얼마나 받았죠?”

“글쎄요? 아니, 근데 그게 지금 사건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저는 무슨 혐의로 체포해 오신 겁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

“싫습니다.”

진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시연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당신과 진우현 씨 중 K로부터 투자금을 실제로 받은 건 누구죠?”

“우현이가 받았죠.”

“그래요? 얼마를 줬다고 K가 이야기 하던가요?”

“동업자끼리 뭘 굳이 그런 걸 이야기합니까?”

“그렇다면 K는 당신을 믿지 않는 거군요.”

“10억원 줬다고 합디다. 됐습니까?”

필웅은 신문실의 매직 미러 너머에 마련된 방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보고 있었다.

‘제법인데.’

시연이 하는 질문들은 모두 일견 중구난방이고 서로 관련이 없는 내용들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시연이 펼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신문기법이었다.

보통 이러한 지능범죄에 가담한 범죄자들은 핵심 사실들을 질문할 경우 쉽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럴 때 신문하는 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 바로 이렇게 산만한 질문들을 늘어 놓는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질문들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보면 감추고 싶은 진실이 드러날 때가 있는 법이다.

또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대답하다 보면 앞에서 한 거짓말과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뱉은 말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거짓말로 사이를 짜맞추기는 점점 더 어렵게 된다.

그래서 범죄자들이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들수록 거짓말을 간파하기는 오히려 더 쉬워지는 것이다.

필웅은 다시 시연의 신문에 집중했다.

“K는 누가 소개해 준 거죠?”

“원래 우현이가 아는 분입니다.”

“그래요? 그럼 김진범 씨와 K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지는 않겠네요?”

“몇 번 같이 술도 먹고 했습니다.”

“둘이서요?”

“…우현이랑 셋이서요.”

“이 테이프의 대화 녹음은 누가 한 건가요?”

“제가 한 겁니다.”

“왜죠?”

“중요한 내용이니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대화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대화에서 말하는 계획은 이미 여러 번 반복적으로 ‘암기’된 내용들이에요.

K는 진우현에게 계획을 들려달라고 하지 않아요. ‘내 계획’을 다시 들어보자고 하고 있죠.”

시연은 잠시 호흡을 고르기 위해 말을 끊었다.

“즉, 이미 당신들은 그 계획을 전에 들었고, 이 대화는 그 계획을 되새겨 보는 것에 불과해요.

당신들 셋이 계획에 관한 대화를 한 건 이 때 한 번 뿐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굳이 ‘이 대화’만 중요할 이유가 없어요.”

김진범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이미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당신이 이 대화를 녹음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에요.

당신도 불안했죠?

당신은 우현처럼 처음부터 K를 알던 사이도 아니고, K처럼 이 계획에 댈 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죠. 진우현이나 K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먹기만 하면!”

시연이 왕년의 유도선수답게 거칠게 손을 뚜둑 꺾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연이 흥분할 때 가끔 나오는 버릇이었다.

진범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실 너머에서 둘을 지켜보던 필웅은 진범이 확실히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범은 책상 밑에서 한 쪽 다리를 조금씩 떨고 있었다.

시연은 책상에 가려져 진범의 그와 같은 행동을 보지는 못했지만 진범이 뭔가 초조해한다는 점만은 인식할 수 있었다.

“김진범 씨.”

“…?”

“이 녹음 테이프, 당신의 보험이었죠?”

“그게 무슨!”

“당신도 불안했기 때문에 혹시나 문제가 생기거나 버림 받았을 때 쓰기 위한 패로 이 녹음 테이프를 준비한 거, 맞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요?”

시연은 다시 한 번 테이프를 되감아 대화를 재생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김진범을 응시했다.

“김진범 씨. 진우현은 재판에서 이 대화가 녹취된 사실조차 모른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대화가 녹취된 걸 알게 되겠죠.

대화를 녹취한 게 누구라고 생각할까요? 진우현 본인은 당연히 아니고, 신분조차 불분명한 K가 했을까요?

게다가 테이프는 당신이 갖고 있었죠. 대화를 녹취한 건 당신일 수밖에 없는데, 진우현은 당신이 이 대화를 녹취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당신을 가만 둘까요?”

시연은 은근히 김진범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김진범은 입을 닫았다. 하지만 아까의 침묵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김진범은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시연은 그의 기색을 눈치채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우현이 구속에서 풀려 났으니, 어떻게든 K에게 그동안의 정황을 보고할 가능성이 높겠죠?

아마도 둘은 당신을 배신자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아니면 이 대화를 녹음할 이유가 없으니까.”

진범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외쳤다.

“전 배신하려고 그 대화를 녹음한 게 아니에요!”

시연은 잠시 딱하다는 듯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저한테 이야기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과연 그들이 믿어줄까요?”

시연은 김진범이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김진범 씨, 잘 생각하세요.

상대방은 힘도 있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에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죠. 그건 당신이 아마 더 잘 알거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겠죠?”

“저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김진범이 눈에 띄게 풀이 죽어 대답했다.

시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재판에 나와 증언하세요.”

고개를 떨구고 불안하게 시연의 눈치를 보던 김진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증인으로 나와 증언하고, 그들을 잡아 넣으면 당신은 안전해집니다.

우리를 도와 진우현의 범행을 증언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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