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협죽도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검사님, 고생하셨는데 많이 아쉬우시겠습니다.”
필웅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전, 진우현의 구속적부심사의 결정이 나왔다.
결과는 구속을 취소한다는 것. 즉, 진우현을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진우현은 굳이 필웅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것도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꽃다발까지 들고서.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주 계장은 노골적으로 적개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필웅이 꽃을 마지못해 받아들고는 잠시 살펴 보다가,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닌 것 같아 물었다.
“이 꽃은 도대체 뭡니까?”
“아, 협죽도라는 꽃입니다. 손으로 만지지는 마세요! 독이 있거든요.”
필웅은 넌덜머리를 내며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사건 수사한 검사한테 독이 있는 꽃다발을 선물하다니, 협박이라고 보면 됩니까?”
“어휴, 제가 뭐 검사님을 독살이라도 하려고 그랬겠습니까? 실제로 꽃집에서 파는 꽃이니 제가 사 오지 않았겠어요?”
필웅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 보세요.”
“오해를 직접 풀어 드리고 싶었는데 유감입니다! 하하.”
진우현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으며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검사님.”
그가 나가자 주 계장이 이를 갈면서 필웅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협죽도의 꽃말이 뭔지 아십니까?”
필웅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그를 마주보았다.
“글쎄요?”
주 계장은 분을 삭이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중요한 건, 저 놈이 꽃다발을 들고 온 의도겠죠.”
“그게 뭔가요? 저를 독살이라도 하려고 했나?”
“그럴 리야 없겠죠. 이건 조롱입니다.”
주 계장은 시선으로 진우현을 따라가기라도 할듯 문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협죽도의 꽃말은… ‘방심은 금물이다’ 입니다.”
* * *
진우현은 그렇게 유유자적 청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외제차를 타고 떠났다.
“누가 데리러 온 것 같더라.”
마침 청사 입구 근처에 있어 그 광경을 지켜 본 시연이 필웅에게 말해 주었다.
“이런 개 같은!”
필웅은 사무실 책상을 손으로 쾅 치며 분노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즐비했지만, 정작 범인은 투자 실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가 고의로 사기를 쳤음을 증언해 줄 수 있는 그의 공범은 어딘가로 잠적한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K라는 인물도 과연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필웅은 답답함을 느끼다가, 문득 피로감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김진범을 잡으러 인천에 다녀온 이후 사무실에서 몇 번 쪽잠을 잔 것 빼고는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자둘까.’
이미 진우현이 구속으로부터 풀려난 상황이다.
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를 당장 잡아 넣을 수 있는 방법도 없는 이상,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필웅은 한숨을 쉬고는 집에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필웅으로 깨어나서 처음 맛보는 짙은 패배감이 그의 입안을 쓰게 맴돌고 있었다.
* * *
“힘내, 그냥 구속에서 풀려난 것 뿐이잖아? 무죄라고 나온 것도 아니라고.”
시연이 힘이 빠져 있는 듯한 필웅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필웅은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김밥을 입에 넣었다.
필웅은 진우현이 풀려난 뒤로 한시가 아깝다며 밥도 거르기 일쑤였다.
이에 시연이 보다못해 김밥을 사온 참이었다.
“밥은 좀 제대로 먹고 하자 우리. 응? 아니 애초에 공판검사는 나라고.”
사실 그랬다.
일반적으로 수사검사는 수사를 마치고 사건을 공판검사에게 넘긴 후에는 공판절차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웅은 달랐다.
필웅은 공판검사에게 사건이 넘어간 이후에도, 공판이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찾아와 훈수 비슷한 것을 두고는 했다.
시연은 필웅이 그럴 때마다 그러려니 했지만, 모든 검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필웅의 태도에 사실 시연을 제외한 많은 검사들이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주장이 별로 없기로 유명한 선배 유 검사도 한 번은 필웅에게 적당히 좀 하라며 화를 낼 정도였다.
그만큼 필웅의 집착이 시작되면 끝이 없었다.
‘이거, 나도 유 검사님처럼 성질이라도 한 번 내야 하나.’
진우현의 사건은 확실히 쉬운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 사건을 필웅이 발벗고 나서 도와주겠다는데 시연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고 할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말 한다고 듣기나 할 리가…….’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때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필웅이 걸어가 전화기를 들었다.
“예, 조필웅입니다.”
“검사님? 저 박장경입니다.”
“아, 형사님!”
“검사님, 김진범이 잡았습니다!”
“뭐라구요?”
필웅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시연은 펄쩍 뛰는 필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래?”
“예, 예. 알겠습니다.”
필웅은 통화에 집중하느라 미처 시연의 질문을 듣지 못한 듯했다.
결국 시연은 필웅이 전화기를 내려 놓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뭔데? 박 형사님이야?”
“응. 김진범을 잡았대.”
필웅의 눈이 이상하리만큼 빛나고 있었다.
“잘됐네!”
시연은 같이 희색을 띄며 좋아하다가, 잠시 말을 끊고는 필웅에게 말했다.
“김진범 신문은 내가 할게.”
“뭐?”
“조필웅. 내가 공판 검사야. 너 충분히 많이 도와줬어. 이제 내가 하게 해줘.”
“하지만!”
“너 지금 이 사건에 너무 빠져 있어. 잠깐 한 발 뒤로 빠져서 머리 좀 식혀.”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필웅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시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긴장한 나머지 심장도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시연은 속이 한결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필웅이는 지금 너무 무리하고 있어. 같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필웅은 누가 봐도 무리하고 있었다.
짜증도 많아졌고, 모든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런 필웅의 모습을 보며 시연은 더 이상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배려라고 볼 수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너도 참관하고 싶으면 참관해도 돼. 그렇지만 공판 검사는 나니까, 네가 혼자 다 하지 않아도 돼. 날 조금만 믿어 주면 안될까?”
필웅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사실 이건 깊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필웅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격한 감정이 그를 사건에서 한 발 멀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패배감이었다.
그가 필웅으로 살아가게 된 뒤, 그가 이기려고 마음 먹은 사건에서 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진우현은 처음으로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눈 앞에 물고기를 다 잡아 놓고도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 때의 무력감.
필웅이 진우현이 풀려나오던 날 느낀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후 필웅은 분한 나머지 잠을 잘 때도 눈 앞에 진우현의 빙글빙글 비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지금은 좀 진정해야 할 때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싸운다고 쉽게 굴복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필웅은 깨달았다.
“알았어. 나는 서포트만 할게.”
“좋아. 김진범은 언제 이송한대?”
“1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아.”
“알았어. 신문 준비 하고 있을게.”
시연은 자료를 챙겨서 일어섰다.
필웅은 떠나는 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장경이 필웅에게 연락하고 30분 정도가 흐른 후.
다혜는 장경과 함께 경찰서 근처의 한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아, 진짜 이런 거 들려 드리면 안 되는디…….”
장경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어 올렸다.
“정말 기사화 안 한다니까요~ 이거 봐요! 각서도 썼잖아요~”
다혜는 장경의 눈 앞에서 방금 전 자신이 서명한 각서를 들어올려 보여줬다.
각서
본인(서다혜)은 박장경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기사화하거나 타인에게 누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를 어길 시, 박장경에게 5천만원을 배상하기로 합니다.
장경은 각서를 읽으면서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래도 5천만원 준다 이런 건 너무 정 없는 거 아닙니까?”
다혜가 배시시 웃었다.
“그 정도는 돼야 이게 진지한 각서라고 믿을 거 아니에요~ 만약 애들 하듯이 무슨 소원을 들어준다, 뭐 이런 걸 쓰면 형사님이나 저나 그게 진지한 약속이라고 믿을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한데…….”
장경은 종이를 꾸깃꾸깃 접어 대충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뭐, 어쨌든 제가 이 각서 때문에 보여 드리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가 기자님을 믿기 때문에 들려 드리는 겁니다?”
“예~ 예~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다혜는 손을 저으며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냅다 누르고는 이어폰을 꼈다.
그것은 진우현과 K, 김진범의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였다.
다혜는 집중하면서 대화 내용을 들었다.
장경은 앞에서 가만히 앉아 쌍화차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다혜는 한 번 다 듣더니, 테이프를 다시 뒤로 감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볼륨을 더 높이고는 몇 번이고 녹음된 대화를 신중하게 청취했다.
장경은 슬슬 지루함을 느끼며 쌍화차를 한 잔 더 시킬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혜가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장경이 메뉴판을 보고 있다가 반색을 하며 카세트 플레이어와 이어폰을 건네 받았다.
“뭐, 별 내용 없죠?”
장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혜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혹시 어디서 녹음된 건지 아세요?”
장경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아뇨, 저희도 그걸 알아 내려고 했는데 이 놈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서요.”
“아뇨, 이 테이프.”
다혜는 이어폰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테이프 뒤에 녹음된 소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어요.”
“예?”
다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음악 소리! 저 이게 어디서 언제 녹음된 건지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