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필웅은 아무 말 없이 장경이 몰고 온 차의 조수석에서 내렸다.
장경은 다행히 교통과 후배를 통해 ‘누군가’가 갖고 간 차량 번호와 행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진우현의 공범인 누군가가 끌고 간 차량은 약 20분 전 서울을 막 빠져나갔다고 했다.
듬성듬성 설치된 CCTV를 통해 동선을 확인해 본 결과, 그는 인천항 근처에 숨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마도 날이 밝으면 바로 배를 타고 국외로 도주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라고 장경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경과 필웅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차를 급히 달려 인천항에 도착했다.
필웅은 장경으로부터 건네 받은 손전등을 켰다.
장경과 필웅은 혹시나 도망자의 주의를 끌까봐 인근에 차를 대강 주차해 두었다.
그 후 둘은 도망자가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 일대를 샅샅히 살피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번화가는 아닌 모양인지 술집도 거의 없었고 오래된 다방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거리는 숨막히게 고요했다.
가로등이 별로 없는 지역이서서 거리는 어두웠다.
길고양이들만 사납게 울며 그들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질색인데.’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 때 필웅은 뭔가를 발견했다.
“형사님, 저기!”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필웅은 처음에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필웅은 자신이 본 것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런 외진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외제차였다.
장경도 다가와 살펴 보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라진 차량 번호가 맞는 모양이었다.
장경은 휘휘 주위를 둘러 보았다.
‘똑똑한 놈이면 이 근처에 방을 잡지는 않았겠지만.
도망가는데 하필이면 눈에 띄는 진우현의 차를 타고 가다니.
게다가 평소 진우현의 집에 자신의 소지품도 깜빡 잊고 놓고 다니는 모양이지?
그다지 용의주도한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겠군.’
장경은 한 블록 정도 더 지나 있는 작고 초라한 여인숙을 발견했다.
“계십니까?”
장경이 건물 문을 조심스레 열고 물었다.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어서 오슈.”
아주머니가 무관심한 얼굴로 들어선 둘을 돌아보더니 갑자기 흥미롭다는 듯 놀라면서 말했다.
“잉? 남자가 둘이네?”
“아, 아뇨. 저희는 묵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그럼요?”
장경은 형사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주인은 돋보기 안경을 끼고 신분증을 받아 살펴 보다가 물었다.
“형사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늘 투숙한 손님 있습니까?”
주인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 남녀 커플 한 쌍이랑, 한 40살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랑, 30대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요.”
장경과 필웅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여인숙의 방은 한 층에 모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면, 도망자는 금방 눈치채고 다시 도주를 시도할 것이었다.
필웅은 고민에 빠졌다.
‘어느 방을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의 방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면 낡은 건물의 구조상 다른 방에도 소리가 모두 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즉, 한 번에 맞는 방에 들어가야 즉시 체포가 가능할 것이었다.
“어디 같습니까?”
장경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필웅에게 물었다.
‘아마도 진우현의 공범이니까 비슷한 나이대일 가능성이 높고, 도망 다니는 와중에 애인을 데리고 다닐 리는 없을테니 마지막 쪽인가?’
필웅은 생각 끝에 장경에게 자신의 결론을 말해 주었다.
장경과 필웅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장경과 필웅은 다시 한 번 서로를 마주보았다.
장경이 앞으로 나서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야.”
필웅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이 살짝 열렸다. 필웅은 다시 한 번 어이없음을 느꼈다.
문에는 걸쇠가 걸린 채였다.
문 안쪽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낡은 검은색 모자를 쓴 30대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남자는 위아래로 그들을 훑어 보더니 황급하게 도망치려는 듯 문을 닫았다. 장경은 발로 걷어차 낡은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 들어!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빼돌린 것들은 어딨지?”
필웅이 뒤에 서 있다가 날카롭게 물었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때 한 구석에 놓인 배낭이 장경의 눈에 띄었다.
장경은 남자의 팔을 뒤틀어 뒤로 잡고는 필웅에게 배낭을 열어봐 달라고 턱짓했다.
필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지이익.
배낭이 오래되어 지퍼가 잘 열리지 않았다. 필웅은 한참을 낑낑대다가 간신히 뜯어대다시피 배낭을 열 수 있었다.
안에는, 각양각색의 여자 속옷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필웅의 사고가 잠시 정지됐다.
장경은 남자에게 수갑을 채워 일으켜 세우고는 필웅에게 물었다.
“검사님? 안에 뭐 들었습니까?”
필웅이 얼떨떨하게 배낭을 들어 그에게 안쪽을 보여주었다.
“어……. 여자 속옷이 있는데요…?”
“예?”
장경은 이 판국에 뭔 헛소리냐는 듯 필웅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배낭 안의 내용물을 뒤늦게 목격했다.
“에?”
장경도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수갑을 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남자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뭡니까?”
필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장경이 갑자기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요새 인근에 여자 속옷 훔치고 다니는 이주남인가 하는 변태놈이 있다더니 그게 너냐?”
남자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우물거렸다.
“그게…….”
그 때 복도 쪽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타다닥 하고 뛰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X!”
장경은 험한 욕설을 내뱉으며 이주남을 밀쳐 놓고 복도로 뛰어 나갔지만, 이미 여인숙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필웅이 언뜻 본 그는 진우현의 집에서 봤던 바로 그 카키색 싸구려 점퍼를 입고 있었다.
장경은 이를 악물고 바로 그를 쫓아 여인숙을 뛰쳐 나갔다.
홀로 남겨진 필웅은 어안이 벙벙해져 복도를 둘러 보았다.
복도 마지막 쪽에 있는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 틈새로는 화장을 요란하게 한 젊은 여자가 빼꼼히 나와 복도 쪽을 살피고 있었다.
“누굽니까?”
“힉!”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문을 붙잡는 필웅이 더 빨랐다.
“방금 저 사람, 여기서 나간 거 맞죠?”
“네, 네…….”
“누굽니까? 둘은 무슨 사이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돈 줄테니까 자기랑 같이 들어만 갔다가 나가라고 해서……. 전 그냥 옆에 다방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에요! 저 사람은 오늘 처음 봤다구요!”
필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자 혼자 다니면 의심을 받을까봐 연막을 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남자였다.
“비켜 보세요.”
필웅은 그녀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구석에 남자의 것인 듯한 가방이 하나 보였다. 열어 보니 약간의 현금과 몇 장의 영수증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음? 잠깐.’
필웅은 문가 근처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하나 발견했다.
도망자가 급하게 도망가느라 뭔가를 흘리고 간 모양이었다.
급히 비닐봉지를 열어 보려던 필웅은 문득 손을 들어 손목시계의 시간을 보았다.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연은 초조하게 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벌써 7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긴급체포 기간이 만료되기까지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필웅은 전날 밤 중요한 증인을 찾겠다며 뛰쳐나가더니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시연은 필웅의 안부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냥 박 형사님한테 혼자 가라고 하지 자기가 거길 왜 따라가? 싸움도 못하는 게.’
시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시연은 영장전담판사에게 잘 말해 둬서, 일단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최대한 빨리 심사해 주겠다는 약속은 받아 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판사가 구속영장 청구서를 읽을 시간은 줘야 하니 적어도 7시 30분까지는 구속영장 청구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시연은 반가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필웅과 장경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떻게 됐어!? 잡았어?”
필웅과 장경은 피곤해서 붉게 핏발이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시연은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못… 잡았어?”
“어. 도망쳤어.”
필웅은 찌그러지듯 시연의 방에 있는 의자에 널부러졌다. 장경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 구속은 못 시키겠네? 괜찮아, 불구속 기소하지 뭐! 꼭 구속해야 유죄 나오는 건 아니니까!”
시연은 애써 밝게 웃으며 필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시연도 불안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미 도주를 시도한 인물인데, 구속을 하지 못한다면?
분명 진우현은 남은 증거마저 인멸하고 국외로 도주해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구속을 시키기 위해서는 혐의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아무리 그가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도, 그가 범죄를 저질렀을 개연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재판부는 구속영장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시연은 이런 일련의 생각을 떠올리며 쉽지 않을 사건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구속은 시킬건데?”
필웅이 말하며 손에 들려 있던 꼬깃꼬깃한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시연이 재빨리 종이들을 받아들고는 물었다.
“뭔데 이게?”
“녹취록이야.”
“무슨 녹취록?”
장경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공범은 못 잡았지만 그 놈이 급하게 도망가느라 흘리고 간 자료는 발견했습니다. 김진범이라는 놈인데, 진우현과 김진범이 누군가의 지시로 판을 크게 짜고 주식 사기를 벌였다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더라구요. 녹음테이프에서 녹취 따갖고 오느라 좀 늦었는데, 그 녹취록 정도로도 구속은 시도해 볼 수 있겠죠?”
시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제서야 시연은 급히 손에 든 녹취록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K: 준비는 잘 되고 있지?
우현: K 님, 오셨군요. 예, 걱정 없습니다.
K: 꼬리 안 밟히게 조심하고.
우현: 기름칠은 다 해 놨습니다.
K: 그래. 내가 알려준 계획이나 다시 얘기해봐.
우현: 비상장주식을 하나 팔 겁니다. 별로 유명한 회사는 아니죠.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주식들 몇 개 추천해서 저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두면 아마 다들 믿고 살 겁니다.
K: 다른 주식들?
우현: 저희들이 기존에 투자해 놓은 주식이 몇 개 있으니 그런 것들로 맛만 보여주면 됩니다.
K: 그렇지. 그 다음은?
우현: 회사 신주를 싸게 판다고 광고해서 투자를 유치하는 거죠. 곧 상장할 회사라서 이제 주주 수를 늘려가는 중이라고 하면 될 겁니다. 진범이가 이미 밑밥 깔러 다니고 있습니다.
진범: 이미 한 40명 가량 확보해 놨습니다.
K: 개미들 40명 해봐야 얼마나 되겠어?
진범: 다시 없는 투자 기회라고 하면 집 담보까지 끌어다 넣을 사람들 꽤 됩니다.
K: 뭐, 좋아. 확실히들 숙지한 것 같으니 진행해 보자고.
우현: 감사합니다.
“K가 누구야?”
“뭐 이니셜이나 그런 거 아니겠어? 우리도 잘 몰라. 아무튼 확실한 건 이게 진우현이 단순 투자 실패가 아니라 고의로 사기를 쳤다는 정황을 입증할 자료라는 거지.”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구속영장 청구하고 올게!”
시연은 준비해 뒀던 서류들에 녹취록까지 끌어안고 허겁지겁 사무실을 나섰다.
밤새 김진범을 추격하다가 포기하고 차를 달려 막 검찰청사로 돌아온 장경과 필웅은 피곤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한 숨 잘까요?”
“그러시죠.”
잠시 후,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무실에 두 남자의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