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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24화 (24/151)

24화 영장없이 이래도 됩니까?

김포 공항에 차 한대가 미끄러지듯 도착했다.딱히 눈에 띄지 않는 국산 세단이었다. 도색도 마침 회색이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사람들이 한창 공항에 몰리는 아침 시간대였다.그런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여 회색 차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내렸다.그의 짐은 단촐했다. 캐리어도 없었고, 손에 든 서류가방 같은 것이 다인 듯했다.

“흐읍!”

남자는 새벽공기를 깊게 한번 들이쉬었다.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듯 천천히 그러나 힘을 주어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출국 티켓을 끊기 위해 잠시 창구 번호를 살펴 보다가 조심스럽게 창구로 향했다.그는 창구에 늘어선 줄의 맨 뒤에 다가가 섰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그의 행색은 평범했고,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중 얼굴을 가리는 선글라스 빼고는 모두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옷들이었다.그리고 이미 여행에 들떠 미리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여행객이 워낙 많아 선글라스 자체도 사실 그렇게 유별나 보이지도 않았다.

줄이 차례로 줄어들었다. 이윽고 남자의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차례가 되었다. 항공사 직원이 수속을 위해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 때 여자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검은색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였다.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그의 부인이 자리를 맡고 있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의 관심은 뒤에 서 있던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 있었다.

“진우현 씨?”

서류 가방을 들고 있던 남자의 손이 흠칫 하고 떨렸다.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의 눈이 그런 그의 손과 갑자기 앙다문 입술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가 재차 물었다.

“진우현 씨, 맞잖아요?”

진우현이라 불린 남자는 여전히 짐짓 모르는 척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는 하,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진우현 씨. 얼굴도 다 팔린 마당에 피차 복잡하게 하지 좀 맙시다.

나 박장경 형사구요, 사기 혐의로 긴급체포하겠습니다. 아, 참.”

장경은 건조하게 말하다가 잠깐 뜸을 들이고 말했다.

“진우현 씨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구요, 지금 하는 진술은… 뭐더라? 아무튼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으니 알아두쇼. 난 분명히 얘기 했습니다?”

우현은 궁시렁거리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장경은 그를 바라보다가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 허리춤에서 방금 꺼낸 은빛 수갑을 그의 손에 채웠다.

그제서야 우현은 당황한 듯 장경을 올려다 보았다.

“어?”

“어,는 뭐가 업니까. 자, 갑시다.”

갑작스런 소란에 주변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경은 귀찮아하며 재빨리 우현의 팔을 잡아 끌고 자신의 차에 그를 밀어넣다시피 집어 넣은 후 시동을 걸고 공항에서 사라졌다.

* * *

장경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필웅은 쾌재를 불렀다.

이상하리만큼 비굴했던 우현의 태도. 그를 향해 좁혀가는 수사망. 그의 행동을 지시하는 배후의 존재. 그리고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확인한, 사건 직후 그의 행적.

필웅은 그가 도주하리라고 직감했고 출국금지명령을 받기에는 다소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웅은 일단 먼저 급하게 장경에게 공항에서 잠복해 달라고 요청했다.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이 있어 최소한의 체포사유는 소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를 놔두면 어딘가 국외로 떠날 것이 분명했기에 긴급체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행히 그의 직감은 적중했고, 장경은 의기양양하게 진우현을 체포해 경찰서로 복귀했다.

“박 형사님, 긴급체포했으니 진우현 집도 한 번 압수수색 하시죠.”

“예? 영장 없이 그래도 됩니까?”

“긴급체포한 뒤 24시간 이내에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할 수 있습니다. 한 번 털어나 보죠.”

장경은 콧노래라도 부를 듯이 신나게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우현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48시간.’

형사소송법에 따라 긴급체포한 범인은 체포한 때부터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이 청구되지 않거나, 구속영장이 발급되지 않는 경우에는 범인을 석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석방한 범인은 다시는 같은 범죄사실로 체포하지 못한다.

만일 이번에 진우현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진우현은 어떻게든 도주해 버릴 것이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필웅은 장경에게만 수사를 맡겨 두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웅은 마음을 굳게 먹고 일전 가 본 적이 있던 우현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햐, 이 새끼 이거 아무 것도 없는디요.”

장경이 낭패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뒤늦게 도착한 필웅에게 말했다.

장경이 다른 형사들과 우현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우현의 집은 이미 깨끗하게 청소된 뒤였다.

그의 집에서는 아무런 범죄의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공항에서 진우현 잡았을 때 소지품에는 특별한 게 없었습니까?”

“없었죠. 진짜 여권이랑 현금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해외에 협조자가 있는 게 분명해요.”

협조자라는 말을 듣고 필웅은 지난 밤 우현의 집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집에 찾아와서 술을 마시고 옷까지 두고 갈 정도로 친분 있는 자가 있는 듯했지.’

“혹시 집에 진우현 말고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의 흔적이라고 하시면?”

“다른 사람이 살았다거나, 적어도 자주 방문한 것 같은 흔적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청소가 아니라 숫제 집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턴 다음에 나오는 건 전부 태워 버린 것 같더라니까요.”

장경의 설명에 의하면, 옷장, 서랍, 캐비닛, 찬장, 그 외 뭔가를 숨기거나 감출 수 있는 곳은 전부 다 뒤져봤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장경의 비유처럼 집 채로 탈탈 털어내기라도 했는지 놀라울 정도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일단 진우현의 사무실도 다시 한 번 둘러보죠. 진우현 사무실에서 일하던 경리는 소재 파악 됐나요?”

“소재 파악은 됐는데, 자기는 진우현 사무실에서 일한지 한 달도 안 됐다고 합니다. 사무실에 진우현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자기는 그냥 시키는 서류 정리만 했다구요.”

“그래도 일단은 진우현의 사기행각과 가장 접점이 있는 인물이니 뽑아낼 수 있는 건 최대한 뽑아내 봐야 합니다.”

“예, 안 그래도 일단 집 돌려 보내고 혹시나 해서 집 근처에 한 놈 잠복시켰습니다.”

필웅은 집을 슥 둘러보았다. 형사들이 이미 이잡듯 한바탕 헤집어 놓았으니 그가 다시 살펴 보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일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뭐 발견한 거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 후로 하루 종일 장경은 사무실 및 진우현이 즐겨 찾던 장소들을 탐문했다. 필웅은 피해자들을 불러 다시 한 번 사건을 정리했다.

하지만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필웅은 피해자 조사를 하면서 옆에서 주 계장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밤이 깊어졌다.

진우현을 체포한지 18시간이 넘은 시점이었다.

벽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필웅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아직은 30시간 남았으니까.’

그리고 밤에는 어차피 누굴 불러다 조사할 수도, 진우현이 즐겨 찾던 가게를 찾아가 보기도 어렵다.

필웅은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며 의자에 누워 쪽잠을 청했다.

21시간이 또 지났다. 이제 더 이상 필웅에게는 여유로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경과 필웅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새로운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9시간 후면 긴급체포 기간이 만료되고 진우현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게다가 지금은 이미 밤 11시였다.

필웅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다시 장경이 보내온 압수수색 현장들의 사진을 살펴 보았다.

사진 속의 진우현 저택과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마치 증거만 먹는 벌레 떼가 있어 한 차례 휩쓸고 간 듯한 모습이었다.

필웅은 한숨을 쉬며 몇 번이나 살펴 본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그 때 시연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잘 되어 가?”

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긴급체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시연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지 않네.”

필웅은 쩍쩍 말라 붙은 입술을 핥으며 힘들게 대답했다.

“증거들이야? 봐봐.”

시연은 필웅으로부터 사진 자료들을 건네 받았다.

시연은 꼼꼼히 사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사진의 작은 디테일까지도 머리 속에 각인시키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때 시연이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 찾아?”

“얼마 전에 그, 서 기자가 쓴 후속 기사! 그 신문 있어?”

며칠 동안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서 그간의 신문이 선반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시연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신문을 보고 넌덜머리를 내며 정리와 청소의 필요성을 강변하기 시작했다. 필웅은 시연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 보내면서, 그 중 서다혜 기자가 후속기사를 쓴 신문을 찾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없어!”

“뭐가?”

“차가 한 대 없어!”

시연이 외치며 필웅의 눈 앞에 사진을 들이밀었다.

진우현의 차고를 찍은 사진이었다. 차는 총 8대였다.

“어?”

“진우현의 차는 원래 9대라고!”

시연은 말하며 이번에는 서다혜가 쓴 기사를 내밀었다.

… 이와 같이 피해액수가 늘어가는 와중에 진모씨의 삼청동 자택에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슈퍼카’ 9대가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또 한 차례 공분을 사고 있다.

필웅은 흥분해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예, 박장경입니다.”

“박 형사님? 차가 한 대 없어요!”

잠시 후 들려온 장경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전해져 왔다.

“예?”

“진우현이 갖고 있는 차는 9대입니다! 사진의 차고에는 8대밖에 없어요! 누군가가 차를 갖고 간 겁니다!”

장경이 놀라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증거자료들을 꺼내 보는 모양이었다.

“어?”

“집에 들어와 차를 꺼내서 갖고 갈 수 있을 정도면, 누군가가 훔쳐 간 게 아닌 이상 그 놈은 진우현과 친분관계가 있는 자, 공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놈을 잡아야 해요!”

장경은 알겠다면서 사라진 차가 어떤 차인지 그리고 교통감시 시스템에 잡힌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앞으로 8시간!’

필웅의 낡은 손목시계가 어느새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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