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 인간이 왜 여기에?
필웅은 지금은 사건 기록들을 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필웅이 최근 다른 사건들을 처리하며 알게 된 사실은, 일단 눈 앞에 떠오르는 미래의 사건 기록은 눈을 한 번 감으면 사라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필웅은 편의상 그것을 ‘크리미널 아카이브’라고 부르고 있었다.
필웅은 떨떠름하게 진우현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보인다는 건, 이 인간이 결국 거물 범죄자라는 뜻인데. 그나저나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사실 답은 간단했다.
이규필 부장은 개인적으로 진우현을 안다고 했고 필웅에게 너무 열심히 수사하지 말라고 했었다.
두 사실을 조합하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면면을 그 사실들과 다시 연결시켜 보면 이 자리가 암시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 친구가 글쎄, 자네 사건을 맡았다지 뭐야! 그래서 내가 살살 하라고 다 얘기해 뒀어.”
“아이고, 그렇습니까? 한 시름 놓았네요!”
필웅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이규필 부장의 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저, 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어, 그래? 뭔데?”
이 부장은 필웅이 이끄는 대로 잠시 진우현이 잘 들리지 않을 마당 한구석까지 필웅을 따라갔다.
“뭔데 그래?”
“저 그게, 저 이번 사건, 시연이한테 넘겼습니다.”
이 부장의 눈썹이 순간 뱀처럼 움찔 움직였다.
“정검한테? 왜?”
“본인이 해 보고 싶은 사건이라고 하더군요.”
“허, 그래?”
필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 사실을 굳이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이 사건을 ‘잘 처리해 보라’는 이 부장의 압박감,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는 압박감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필웅은 그저 왠지 모르게 이 자리가 불편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실을 찾고 싶었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이 부장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이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이내 이 부장은 씩 웃고는 필웅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래! 누가 처리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잘 처리해 보지 뭐.”
그리고 그 순간 필웅은 이 부장의 표정이 전에 없이 순간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날 밤은 이상할 정도로 별다른 사건 없이 흘러갔다.
필웅이 사건을 시연에게 넘겼다고 고백한 이후로, 이 부장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어 필웅을 초조하게 만들지 않았고, 진우현도 자신의 사건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진우현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주도했다.
필웅은 아주 잠시나마 생각보다 사람은 괜찮아 보인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그렇게 셋은 여자 이야기, 술 이야기, 웃기는 사건 이야기 등 쓸데없는 한담을 나누며 왁자지껄 몇 시간이고 술을 마셨다.
필웅은 얼마 전 실수한 것도 있어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는 몰래 술잔을 옆으로 치웠다. 다른 두 사람은 너무 취해 필웅이 술을 먹지 않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밤이 깊어지자 셋은 식당을 나왔다.
진우현과 이 부장은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고 고래고래 고성방가를 하기 시작했다.
필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택시를 불러 둘을 먼저 보내고는 자신도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 고단한 몸을 뉘였다.
필웅은 더 이상 진우현의 사건과 관계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왠지 개운한 기분이 들어 잠이 더 잘 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출근하던 필웅은 주 계장이 박장경과 청사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발견했다.
“박 형사님? 무슨 일입니까?”
평소 같았으면 그냥 보고 지나쳤을 그였지만, 왠지 어제 밤 이후로 기분이 좋았기에 필웅은 먼저 다가가 장경에게 인사했다.
“아, 검사님.”
장경은 대충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하고는 주 계장과의 대화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어제 퇴근한 이후로는 잘 모르신다 이거죠?”
“예예. 어제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늦게 들어가는 참이었는데, 정 검사님이랑 1층에서 만나서 몇 가지 이야기 좀 하다가 약속이 있으시다며 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필웅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계장님? 무슨 일이에요 이게?”
주 계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정 검사님이, 정시연 검사님이 어젯밤 강도들한테 습격당했답니다.”
필웅은 순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구멍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필웅은 그 후에 그가 정확히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은 이랬다. 갑자기 그가 미친 듯이 주 계장에게 소리를 치던 모습, 박장경이 그를 뜯어 말리던 모습, 지금 시연이는 어딨냐며 황망하게 묻던 모습들.
그리고 그는 병원 앞에 서 있었다.
시연이 입원한 병실이 어디였는지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기억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어디 방문하시는 거냐며 물은 듯도 했다. 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필웅은 걱정스럽게 따라 붙는 간호사를 뿌리치며 계단을 올라갔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어딘지는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필웅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계단은 위로만 이어져 있었지만, 계단을 오를수록 필웅은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필웅은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환자복을 입은 시연이 방만하게 침대에 기대 바나나를 먹고 있는 광경이었다.
필웅은 잠시 몸이 경직됐다.
그리고,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리자 시연은 잠시 놀라 필웅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뭐야? 출근 안 했어?”
필웅이 멍하니 서있자 시연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바나나를 베어 물었다.
“아, 나는 이게 제일 맛있더라. 평소에도 맨날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하, 제가 또 사다 드릴게요.”
필웅은 그제서야 시연이 누워 있는 병상 옆의 간이의자에 서다혜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너?”
필웅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입을 열었다.
“나 뭐?”
“강도한테 습격, 당한 거 아니었어?”
시연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말했다.
“뭐야, 습격 당했는데 너무 멀쩡해 보인다 이거야?”
필웅은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춰서 머리를 한 번 거세게 휘저었다.
“괜찮은거야?”
“그냥 좀 찰과상인데.”
“그런데 입원은?”
“다혜 씨랑 같이 있다가 당해서 찾아왔는데, 병원에서 경위를 듣더니 혹시 다른 다친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깐 있어보래잖아. 오후에 나갈거야. 바빠 죽겠구만.”
시연은 궁시렁거리면서 옆에 놓인 짐을 뒤졌다. 입고 갈 옷을 찾는 듯했다.
다시 봐도 시연은 강도에게 습격 당한 사람치고는 너무 멀쩡했다. 팔에 몇 군데 긁힌 자국이 다였다.
“어떻게 된거야?”
필웅은 답답해하며 옆에 놓인 간이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서다혜는 눈치를 보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둥 이야기를 둘러대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되다니?”
“아니, 강도한테 습격 당했다며. 그런데 뭐 이렇게 멀쩡해?”
시연이 두 개째 바나나를 뜯으며 실실 웃었다.
“필웅 씨, 필웅 씨! 나 전국체전 출신 유도선수인 거 잊었어?”
“응?”
“나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한 10명은 끌고 왔어야지. 한 두세 놈이 칼 들고 덤비길래 다 아작을 내줬어. 아, 바나나 먹을래?”
그녀가 들려준 무용담(?)은 이랬다.
시연은 진우현 사건의 수사 파일을 보다가 서다혜가 진우현의 사건을 취재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시연은 대변인실을 통해 서다혜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 후 시연은 사건에 대해 더 확인할 만한 내용이 있을까 하여 퇴근 후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시연은 여러 차례 사고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가는 길에 갑자기 자신을 치고 갈 듯 달려드는 차량을 만나기도 했고, 자신을 미행하는 듯한 수상한 행색의 인물들이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것도 느껴졌다고 한다.
시연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서다혜를 만나 사건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만났던 다방에서 나와 함께 차를 타러 골목길을 내려가던 도중, 칼을 들고 덤비는 괴한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연은 침착하게 먼저 다혜를 뒤로 물러서게 한 후, 달려드는 괴한들을 하나씩 엎어치고 팔목을 꺾어 놓았다.
이내 괴한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놀란 서다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시연을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수속을 마친 후, 서다혜는 당연히 그녀가 오래 입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어디선가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시연이 눈을 빛내며 그 과일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집어들던 순간 필웅이 병실에 들이닥친 것이다.
필웅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놈들은 뭐였는데?”
“글쎄? 골목길에 여자 둘 있는 거 보고 달려든 거 보면 강도 아니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든 강도가 나타난다고?”
“우리가 맨날 잡아 넣는 게 그런 놈들인데 그게 뭐가 이상해?”
“그래도.”
필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다쳐서 다행이네.”
시연이 배시시 웃으며 필웅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뭐야? 걱정했어?”
“아니, 뭐 딱히.”
시연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들이닥치는 거 보니까 아닌 게 아니던데?”
“그, 그냥 조금 놀란 거 뿐이야!”
시연은 별말 없이 침대에 일어나 앉고는 필웅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웃음이 새나오는데 참고 있는 듯, 그녀의 입술이 계속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왠지 좋네?”
필웅은 그녀의 말을 듣고 흥,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멀쩡한 것 같구만. 나 먼저 들어간다.”
“응. 나도 금방 돌아갈거야~”
필웅은 그녀를 뒤로 하고 나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절대 사고일 수가 없다.’
시연이 말한 다방 근처라면 그도 잘 아는 곳이었다.
그 근처에 골목길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다방은 번화가에 위치한 다방이었기 때문에 밤에도 항상 사람이 들끓는 곳이다.
제 정신인 강도라면, 그런 곳에서 누군가를 습격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녀가 다방에 도착하기까지 겪은 일련의 사건, 사고들까지 고려해 보면, 이 모든 일은 계획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 순간, ‘잘 처리하겠다’던 이규필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 좋아 보이던 진우현의 얼굴도.
‘설마?’
필웅은 청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