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데를 오냐
필웅은 한가로이 펜을 돌리며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들어 보니, 주 계장이 최근 계속 점심에 나간 것은 근처의 증권사에 가서 주식 시장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원래는 스스로 주식에 투자했지만, 대부분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가 그렇게 좌절하고 있던 차에 다른 개인투자자가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주 계장을 진우현에게 소개시켜 줬고, 진우현이 추천한 종목들을 사자 그 동안의 손해를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식에 재미를 붙이게 된 주 계장은 점심 시간에 점점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건 필웅도 최근 알아챈 바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진우현은 주 계장에게 거래소에 상장되지 않은 비상장주식을 추천했다.
주 계장은 처음에 망설였지만, 진우현의 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화될 때 거기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회사라고 했다.
‘닷컴버블 같은 거로군. 그러고 보니 요새 매일 점심시간마다 바쁘고 초조해 보이는 것 같더니 이 일 때문이었나.’
주 계장의 하소연을 들으며 필웅은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진우현의 권유에 넘어가 주 계장은 전 재산에 사채까지 털어 비상장주식을 구매했다.
그러나 얼마 전 그 기업은 도산했고, 그 기업의 사무실까지 찾아갔으나 이미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식 투자 당시 받은 대표의 연락처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처지의 개미 투자자들이 자신 말고도 수십, 수백 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입에서 동일하게 나온 인물의 이름은 단 하나, ‘진우현’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만 들으면 당신도 자산가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여럿을 현혹해 왔다.
실제로 그가 투자한 일부 주식에서 수익이 난 것도 그의 말에 설득력을 더했다.
필웅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분명 사기 사건의 냄새가 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고민하는 것은 사기죄가 성립할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라.’
오히려 사기죄가 성립하면 더 문제였다.
서다혜가 찾아온 것을 보면 이미 사건이 언론에도 알려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명백히 사기죄인 사건을 그가 놔두고 조사하지 않는다면, 분명 누군가가 문제를 삼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덮어 놓고 기소를 하자니, 이규필 부장과의 관계가 영 신경쓰였다.
그 동안 얼떨결에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범죄자들에게 철퇴를 내려온 그였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것이 그의 자의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굳게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직은 출세로 향하는 동아줄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필웅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필웅은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고민에 빠진 채로 다 식은 커피를 집어 들었다.
* * *
장경은 얼빠진 표정으로 사무실에 앉아 줄서서 경찰서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아니, 줄을 선다는 표현은 너무 완화된 표현이었다.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저, 무슨 일로들 이리 오셨습니까?”
장경은 최대한 친절하게 맨 앞의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요새 뉴스도 안 봐!? 지금 사기꾼 한 놈한테 당한 게 몇 명인데, 왜 한 놈도 나서는 놈이 없는 거야?”
장경이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맨 앞의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드높였다.
장경은 답답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는 설명을 해 주시고 이러셔야 할 것 아닙니까.”
“무슨 일? 무슨 일!? 매일같이 신문에 나오는데 왜 당신들만 모르냐고!”
흥분하던 사람들 중 어느 하나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신문 조각을 하나 꺼내들어 그의 눈앞에 두고 흔들었다.
장경은 신문 조각을 낚아채어 읽어 보았다.
삼청동 주식 부자의 실체…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른바 ‘삼청동 주식 부자’라고 알려진 진모씨가 사실은 가치 없는 주식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떠넘기는 수법으로 거액의 금액을 갈취해 온 사실이 알려져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피해자들 중 일부는 대출까지 받아 가며 투자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진모씨에 대한 수사는 아직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한 검찰청의 고위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라고 밝혔다.
서다혜 기자
‘서다혜 기자? 설마 그 때 삼청동 간다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장경은 신문 조각을 내려 놓고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후배 형사들이 민원인들을 어르고 달래며 한 쪽으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장경은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정말이지, 나쁜 놈들은 한도 끝도 없이 다양하게도 나오는구먼.’
장경은 후배에게 손짓해 피해사실을 조사할테니 피해자들을 한 명씩 이 쪽으로 부르라고 일렀다.
“아따 검사님,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사건을 만들어 갖고 왔는데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장경이 흥분해서 필웅에게 대들며 가지고 온 조서들을 책상에 탕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거, 좀 살살 놓으세요.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보강 수사를 좀 더 해보자는 거지요.”
“지금 피해자들 수십 명 진술이 다 일치하는데 뭘 더 보강합니까? 범인 놈이 육성으로 투자 꼬드긴 거라도 발견해 오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뭐 그러면 좋고.”
“검사님!”
장경이 씩씩거리며 그에게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니 둘밖에 없는데 왜이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검사님! 검사님이 좋아하는 대로 증거 딱딱 각 맞춰 챙겨 왔는데 뭔 놈의 보강수사랍니까. 예? 그렇게 안 봤는데 설마 제가 전에 좀생이라고 해서 삐져서 이러는 거에요?”
“아니, 지금 증거라고는 피해자들 증언 밖에 없으니까 좀더 다양하게 증거를 모아 보자 이거죠.”
“당최 이런 사기 사건에서 증거를 뭘 더 어떻게 모읍니까!?”
“수사를 형사님이 하지 제가 합니까?! 알아서 더 모아 오세요!”
필웅은 책상을 탕 치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자신도 억지라는 걸 아는 상황에서 계속 장경과 대면하기가 께름칙했다.
“검사님! 어디 가십니까!”
“아, 약속 있어요!”
장경이 뒤에서 뭐라뭐라 더 말을 하는 것이 들려왔지만 필웅은 모른척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 여름인데도 필웅의 등에는 왠지 모를 식은땀이 흘렀다.
필웅은 장경의 분노한 표정과, 거의 죽을 사람처럼 핼쓱해진 주 계장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필웅은 서둘러 청사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예. 아, 그럼요. 잘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이규필 부장의 사무실을 지나가려던 찰나, 안에서 숨죽인 이규필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에 소근소근 이야기해서 잘 들리지 않았기에, 필웅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규필 부장의 방문에 찰싹 붙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예, 예. 진 사장 사건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이규필 부장은 굽실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 사장? 설마?’
“아이구, 사업하다 보면 손해 보는 사람도 생기고 그러는 거지요. 제가 다시 잘 말해 놓겠습니다.”
‘진우현 얘기가 맞는 것 같은데. 누구랑 통화를 하시는 거지?’
필웅은 찜찜함을 느끼며 누가 볼까봐 서둘러 길을 다시 재촉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이 사건, 그냥 넘겨 버려도 괜찮은 건가?’
* * *
“진우현 사건 맡게 됐다며?”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필웅에게 시연이 갑자기 다가와 물었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지?”
“다시 할까?”
“됐다. 맞아.”
시연은 필웅이 앉아 있던 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필웅은 왠지 모를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기소 안 할거야?”
“증거 모이는 거 봐서.”
“피해자 녹취록만 한 트럭이라던데?”
“피해자들이야 언제나 있지. 그렇다고 피해자 말만 듣고 기소하냐?”
시연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꼈다.
“최근에 네가 한 사건들도 결국 피해자 진술에서 시작된 거잖아. 피해자 말을 듣고 뭔가 더 파야 각이 나오지. 그냥 손 놓고 있을거야?”
“그럼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잡아 넣어야지!”
“무죄 추정의 원칙 모르냐?”
시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판사면 몰라도 검사가 무조건 다 무죄라고 믿으면 나쁜 놈은 누가 잡아넣냐?”
필웅이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목된 사람을 무조건 유죄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되겠지만, 검사의 입장에서 용의자를 그냥 놔 주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필웅은 피곤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 사건, 나한테 넘겨.”
“뭐라고?”
“얼마 전 네가 내 사건 도와줬잖아. 이번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넘기라고.”
“야, 이게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 마음대로 주고 받고 하게?”
“네가 안 넘겨주면 내가 가서 나한테 배당해 달라고 한다?”
필웅은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들고 있다가 기소를 하든 안 하든 욕 먹느니 이규필 부장님한테 따로 얘기 안 들은 시연이가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
“좋아. 그럼 내가 얘기해 둘 테니까 사건 기록 갖고 가.”
“진작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필웅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냐?”
“주 계장님도 피해자라며? 몰랐어?”
“아니, 알았는데.”
시연은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원칙주의자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사무실에 주 계장님이 피해자인데도 남의 사건 처리하듯 하냐? 너무하는 거 아냐?”
“내 지인 사건이라고 더 열심히 처리하는 거야말로 검사로서의 신념을 저버리는 일 아냐?”
필웅이 볼멘 소리로 대꾸했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래. 내가 무슨 죄 없는 놈 잡아넣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거잖아.”
“그래, 그래. 정의의 검사 정시연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시연은 필웅의 비꼬는 말투도 들은 척 만 척하며 필웅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필웅은 오히려 홀가분해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서 이규필 부장과의 회식 장소로 향했다.
이규필 부장이 부른 곳은 서울 시내의 고급 일식집이었다.
“어, 들어와.”
점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마치 동양화에 나올 듯한 정원의 한 가운데에 별채가 있었다.
이규필 부장은 마치 이 대궐의 주인이라도 되는 마냥 반갑게 그를 맞았다.
“굉장히, 으리으리한 곳이네요.”
필웅이 신발을 벗고 올라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응. 오늘 만날 사람이 워낙 거물이거든.”
이규필 부장이 장난스럽게 낄낄거리며 술이 든 옥색 주전자를 집어 들고는 필웅의 잔에 술을 따랐다.
“손님이 또 오십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돈이 나서 이런 집을 오겠냐.”
이규필 부장은 술을 따르려는 필웅을 만류하고는 자신의 잔에 직접 술을 채워 들었다.
“손님 오기 전에 딱 한 잔만 맛만 보자고. 이 술이 진짜 안동 장인이 만든 안동 소주라는 거 아니냐.”
필웅도 이규필 부장보다 잔을 높게 들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낮게 들어 부딪혔다.
술을 한 모금 넘기자, 청아하면서도 독한 향이 코 끝과 입 안을 차례로 맴돌고는 불이 달리듯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좋은 술이네요.”
“그렇지? 야, 우리 이거 주전자 먼저 마셔 버리고 아직 술 안 나온 척할까?”
이규필 부장은 뭔가 신난듯 다시 잔에 술을 채우며 마치 음모를 꾸미는 악동처럼 속삭였다. 필웅은 피식 웃고는 정중히 잔을 다시 받아 들었다.
“오늘 오실 분은 누구십니까?”
“아, 자네도 아는 사람일텐데. 직접 본 적은 없겠지만.”
“…?”
필웅이 의아해하는 찰나, 마당 쪽에서 점원이 손님을 안내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마침 오는구만. 진 사장!”
이규필 부장이 먼저 들어오는 손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도 얼떨결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구, 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허우대가 좋아 보이는 남자가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고 필웅과 규필이 앉은 마루 위로 올라서며 붙임성 좋게 인사했다.
“그러게 말이야! 참, 조검? 인사해. 진우현 사장이야.”
“조 검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투자 쪽 일하는 진우현이라고 합니다.”
필웅은 경악해 순둥이 같은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돌아보았다.
‘진우현!?’
진우현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진우현과 관련된 사건 기록이 김태현이나 이영혜를 볼 때처럼 필웅의 눈 앞에 끝도 없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