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20화 (20/151)

20화 그 친구, 내가 아는 친구야

시연은 오늘도 필웅의 사무실에 놀러와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너 일 없어?”

필웅이 참다 못해 그녀에게 물었다.

잠깐 졸고 있는지 시연은 대답이 없다가, 잠시 후 화들짝 깨며 놀라 물었다.

“어? 뭐?”

“됐다. 짜장면 왔어.”

시연은 잠시 잠이 덜 깼는지 휘휘 주위를 둘러보다가 탁자 위에 올려진 짜장면을 발견했다.

“오? 금방 왔네!”

“아니, 너는 어떻게 세팅 다 끝날 때까지 깨지도 않고 자냐. 잠깐! 너 애초에 안 자고 있었던 거 아냐?”

“무, 무, 무슨 그런 소릴! 내가 겨우 짜장면 그릇 놓는 게 귀찮아서 자는 척이라도 했다는 거야?”

“응.”

“마지막 3분 정도는 그랬을지도.”

“그릇 놓는데 3분도 안 걸렸거든?!”

“짜장면 불겠다. 빨리 먹자~”

시연은 갑자기 말을 돌리며 서둘러 짜장면의 비닐을 벗기기 시작했다.

문득 필웅은 비닐을 벗기는 그녀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오랜 운동의 결과로 보이는 잔근육이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운동은 왜 그만뒀어?”

시연은 전국체전에서도 우숭한 적이 있었던 유도 유망주였다. 대학교도 체육인 특별전형으로 합격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밤낮으로 틀어박혀 지금은 검사가 되어 있다는 것이 필웅은 매번 놀라웠다.

“응?”

“너 원래 1학년때만 해도 운동했잖아. 갑자기 왜 그만둔거야?”

필웅과 시연은 같은 학교 출신이었고 둘이 처음 만난 것도 시연이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그, 글쎄? 이제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하진 않지.”

필웅은 쉽게 수긍하며 단무지의 비닐을 벗겼다.

시연은 필웅의 눈치를 보며 젓가락을 빨았다. 필웅은 자신이 몇 입을 먹을 때까지 시연이 뭔가 어정쩡하게 젓가락만 빨고 있자 핀잔을 줬다.

“아, 여기서 살거야? 안 먹어?”

“너 때문이었는데.”

“뭐?”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시험 본 거.”

시험이란 당연히 사법시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물론 원래도 변호사나 검사, 판사 일에 관심이 있기는 했는데, 네가 공부하는 걸 보니 왠지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와, 그냥 재밌어 보이네~ 하면서 사법시험을 통과했단 말이야? 굉장하네.”

“아, 몰라! 묻지 마!”

시연은 쑥스러운 듯 갑자기 말을 돌리며 짜장면을 퍼먹기 시작했다.

필웅은 이미 불기 시작해 떡같이 뭉치기 시작한 짜장면을 그냥 퍼먹으려고 애쓰는 시연을 잠시 딱하게 바라보다가 물잔을 건넸다.

“물이나 마셔 가면서 먹어라.”

“고마워.”

시연은 기다렸다는 듯 물을 건네받고 벌컥벌컥 마셨다.

시연은 뭉쳐져 버린 면발들을 뒤적이며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에휴, 근데 막상 와보니 박봉에 일은 어렵고 끝도 없고.”

“후회해?”

“그런 건 아닌데. 돈 잘 버는 친구들 보면 부럽긴 하더라.”

시연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내 친구가 누구한테 주식을 추천받았는데, 엄청 떼돈을 벌었대. 그런데 그 주식 추천해 준 사람이 되게 유명한 사람인 것 같던데? TV 프로그램에도 몇 번 나왔다더라.”

“TV 프로그램? 어디, 증권 뉴스 같은 거?”

“아니, 듣기로는 무슨 막 연예 프로그램 같은 데서 게스트로도 나오고 그랬다는데? 친한 연예인이 많은가봐.”

“주식 투자자 같은 사람이 연예인이랑은 왜 친한데?”

“나야 모르지. 가위 있어?”

시연은 가위를 받아 들고 몇 번 면을 자른 뒤 배가 고팠는지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식부자? 연예인? 어디서 본 얘기 같기는 한데…….’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역시 배가 고파 허겁지겁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1주일 뒤.

“검사님, 식사하셨어요?”

서다혜가 한 손에 비닐봉지 같은 것을 들고 반갑게 웃으며 필웅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PC방 살인사건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필웅도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서 기자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저기,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다혜가 웃으며 봉지를 들어 보였다.

“뭡니까, 그건?”

“토스트 좋아한다고 하셔서, 요 앞에서 토스트 사 왔지요~ 어때요?”

“좋죠.”

필웅은 서류가 가득 쌓인 탁자를 치우며 다혜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혜는 자리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필웅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검사님~ 이번에도 굉장한 거 한 건 하셨다면서요?”

“예? 뭐요?”

“시치미 떼시긴! 나현동 폐공장 살인사건이요! 가해자들이 학생인데도 중형을 이끌어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고등학생 살인범이라니……. 진짜 요샌 애들이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아, 그거요. 별 거 아닙니다.”

“겸손도 하셔라~ 사회정의를 위해 힘쓰고 계시니 오늘 점심은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 고맙네요.”

필웅은 멋쩍게 웃으며 다혜가 힘차게 건넨 토스트를 받아 들었다.

다혜는 맑게 웃으며 자기 몫의 토스트를 꺼내 한 입 베어물고는 말했다.

“저기, 검사님 혹시 그런데 진우현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진우현이요?”

필웅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얼마 전 시연이 다녀간 이후로 관심이 동해 알아본 소문의 그 주식 투자자의 이름이었다.

“아, 그 삼청동 주식부자?”

“역시 알고 계시는구나! 그 사람, 요새 주식 사기다 뭐다 말이 많던데 혹시 잘 아세요?”

다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뇨, 뭐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요. 피해액이 수십 억에 달한다던데. 일반인 피해자도 엄청 많은가 봐요.”

“그렇군요.”

필웅은 대충 대답하며 바삭바삭한 토스트를 한 입 물었다.

다혜는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하게 필웅을 바라보며 입에 물고 있던 토스트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후 그에게 물었다.

“검사님. 그 사건, 수사할 생각 없으세요?”

필웅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토스트를 먹다 말고 다혜를 바라보았다.

“예? 제가요?”

다혜는 아예 토스트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언제 꺼내들었는지 모를 수첩을 들고 말했다.

“이런 특이한 사건들은 검사님이 한 번 조사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검사님도 일반인들이 피해 입는 이런 사건 두고 못 보시잖아요?”

필웅은 난감함을 느꼈다. 필웅이 느끼기에 자신은 다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정의의 옹호자는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니, 사건이라는 게 제가 원한다고 막 수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사건 접수가 되지도 않았는데요.”

“제가 고발하면 되죠! 고발하면 사건 수사 개시하는 거, 맞죠?”

“그렇긴 한데…….”

“그러면 됐네요! 제가 요새 취재하면서 좀 얻어들은 것들이 있는데…….”

다혜는 반색하며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필웅은 그녀를 만류하며 말했다.

“저기, 서 기자님. 이런 건 사건 청탁이에요. 피해자가 직접 고발하면 모를까 언론 같은 데서 무슨 사건 파헤치라고 요구하는 걸 저희가 주동적으로 파헤칠 수는 없습니다.”

다혜는 신나서 뭔가 자료 같은 것을 꺼내들어 필웅에게 건네 주려다가 필웅의 말을 듣고 아 하고 잠시 서류를 내려 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미처 생각 못해봤어요. 죄송해요.”

이번에는 필웅이 당황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아니에요,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제가 좀 앞서 나갔네요. 식사나마저 하시죠.”

다혜는 괜찮다고 말하며 다시 토스트를 권했다. 다혜는 그 후 십여 분 정도 최근 근황에 대해 한담을 나누다가 토스트를 쌌던 종이 등을 치우고는 일어섰다.

“제가 괜히 부담 드린 것 같네요. 그래도 혹시 사건이 접수되면 잘 처리해 주실거죠?”

필웅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나서는지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친근감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다혜가 다녀간 후, 며칠 간 필웅은 진우현의 일을 까맣게 잊고 다른 사건에 몰두하고 있었다.

“계장님, 서류 준비됐어요?”

필웅은 서류에 파묻혀 주 계장에게 말을 건넸다. 대답이 없었다.

“계장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서류에 처박다시피 하고 공소장을 써내려 가던 필웅은 조금 짜증스러움을 느끼며 주 계장을 돌아보았다.

주 계장은 책상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장님, 뭐하세요?”

필웅은 일어나 주 계장에게 다가갔다가 주 계장의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인 종이들을 흘끗 보았다.

독촉장, 압류 통지서 등 뭔가 살벌한 내용의 서류들이었다.

“계장님? 이게 다 뭡니까?”

필웅이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자 주 계장은 갑자기 꿈에서 깨기라도 한듯 잽싸게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아, 검사님? 무슨 일이시죠?”

필웅은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공소장 첨부서류 준비됐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으시길래요. 뭐 사채 같은 거 쓰셨어요?”

“예? 아니, 아닙니다! 검사님께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주 계장은 황급히 책상 위에 널부러져 있던 서류들을 그러모아 서랍에 집어넣었다. 필웅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계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저, 그래도 대한민국 검삽니다.”

주 계장은 그의 말에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앉은 자리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서랍에 꽉 찬 종이들을 다시 돌아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기, 비슷한 걸 당해서요. 허허.”

검찰청에 일하는 사람이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겸연쩍다는 듯 주 계장이 힘없이 뒷머리를 긁었다.

“사기요? 어떤 놈입니까?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필웅은 그래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주 계장의 사건이라면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어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주 계장은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고 말했다.

“그게, 진우현이라는 사람입니다.”

* * *

그 날 저녁, 이규필 부장이 필웅을 사무실로 불렀다.

“부장님, 조필웅입니다.”

“응, 들어와.”

필웅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규필 부장이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앉게.”

전에 없이 딱딱한 그의 몸짓에 필웅도 덩달아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다.

“진우현이라고 들어 봤나?”

요즘따라 참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뭘 아는지 궁금해한다고 생각하며 필웅은 대답했다.

“예, 압니다.”

“요새 진우현이 둘러싸고 사건 터진 것도 알고 있지?”

필웅은 약간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규필 부장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긁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5분 정도 흐르고, 필웅이 뭐라도 이야기를 꺼내 보려는 찰나 이규필 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게 아마 조검에게 배당될 것 같아.”

“사기 사건, 말입니까?”

“그래. 원래 이런 사건 해보고 싶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병가 후 복귀해서 이규필 부장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큰 사건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 봐. 열심히는 해 보는데, 너무 열심히는 하지 마.”

필웅의 한 쪽 눈썹이 잠시 치켜올려졌다가 내려갔다.

“그 말씀은?”

이규필 부장은 자리에 놓여 있던 다 식은 찻잔을 올려 한참을 그 안을 들여보다가 말을 이었다.

“열심히는 하는데, 너무 유죄라고 생각하고 사건 캐지는 말라는 뜻이야. 그 친구, 내가 아는 친구거든.”

“진우현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친구, 요새 매스컴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악덕 사기꾼은 아냐.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군데, 오히려 사람들한테 베풀고 많이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는 쪽에 가깝지.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도 주식으로 돈 좀 벌게 해 주려다가 그게 좀 잘못된 거야. 주식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렇긴 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이것도 그런 사건이야. 돈 잃은 사람들은 억울하겠지만, 그게 뭐 사람 뜻대로만 되는 일이겠나?”

이 부장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려 안에 남은 식은 차를 들이켰다.

“내가 전에 해준 얘기, 기억하지?”

“어떤?”

“내 선배 검사 이야기 말이야.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지?”

필웅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 때 이 부장은 자신의 부인을 기소한 선배 검사의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범죄자들, 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너무 다 괴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어.”

‘그게 그 뜻이었나!’

필웅은 이 부장의 말이 수사를 할 때에도 인간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은 결국 범죄자를 가려서 수사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범죄자를 가리는 기준은 이 부장이 제시하게 될 것이었다.

‘그게 그런 뜻이었다니.’

이 부장은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필웅의 내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부장은 그를 문가로 배웅하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조만간 진우현이랑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그 친구가 쏠거야.”

이 부장은 껄껄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필웅은 마지못해 마주 웃고는 그의 방을 나왔다.

‘열심히는 하되, 너무 열심히는 하지 말라?’

필웅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서 그의 말을 곱씹고, 한편으로는 낮에 본 주 계장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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