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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7화 (17/151)

17화 같이… 있었어요

사무실에 찾아온 장경의 말을 듣고 필웅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필웅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물었다.

“증거라구요? 근데 얼굴은 왜 그럽니까?”

“동네 똥개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구요. 증거는 이겁니다!”

장경이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필웅이 다가가서 보니 본드 통이었다.

“본드요?”

“예, 본드!”

장경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게 무슨 증거가 됩니까?”

“이게 오늘 그 나현동 폐공장에서 발견한 건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 쓰긴 했지만 겉면의 도색이 벗겨지지도 않았고 완전히 새 거에요.”

장경이 본드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긴 하네요. 그래서 뭐요?”

“검사님, 본드 불어 보셨습니까?”

“아뇨?”

“저것들 태도 보면 이 폐공장에 저것들이 있었던 건 분명한 것 같고 폐공장에서 이 쓰고 버린 본드가 나왔단 말임다. 그럼 당연히 쟤들이 쓴 걸텐데, 이걸로 공작놀이 했을 리는 없고 뭘 했겠습니까?”

“모여서 본드를 불었다?”

“그렇죠!”

장경이 이제야 알았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본드 불고 환각상태에서 뭘 했는지 알게 뭡니까?”

“그런데 그건 저희도 모르잖아요.”

“아무튼 단서가 하나 잡혔단 말입니다. 이거 갖고 추궁하면 빼도 박도 못혀요!”

장경이 흥분해서 외쳤다.

‘정말 그럴까? 가해자들이 본드를 불고 피해자를 살해한 걸로 봐야 할까?’

필웅은 일단 본드 표면에 지문이 검출되는지 감식해 달라고 요청하고 장경을 일단 내보냈다.

텅 빈 사무실을 잠시 둘러보며 나영전이었을 때 보았던 사건의 사실관계를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분명 가해자들 중 약한 고리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필웅은 스마트폰으로 사건을 검색해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려고 애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 *

며칠 후.

제1회 공판기일이 열렸다.

판사는 이번에도 왠지 최창칠이었다. 조필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저 인간과 인연이 있긴 있나 보군.’

필웅의 느낌상 최 판사는 왠지 모르게 유독 필웅을 적대하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지난 번 사건의 결과를 봤을 때 적어도 증거와 주장이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리는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피고인인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가 들어와 피고인석에 앉았다.

셋은 경찰서에서 봤을 때보다는 긴장된 모습이었다.

특히 이영혜는 다른 둘보다 좀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검사 측이 적용한 법조가 뭐였지요?”

최 판사가 이리저리 대충 기록을 넘겨보며 물었다.

제대로 기록을 보지 않고 들어온 것인지, 일부러 필웅을 도발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필웅은 별로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형법 제250조 제1항, 살인죄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들이 김혜진을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필웅 몸 안에 있는 나영전의 야성적인 직감과 필웅 본연의 집념이 하나가 되어 외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살인사건이다!’

필웅은 처음에는 정말 이런 ‘직감’을 믿고 무리하게 기소를 해도 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김태현과 피고인들을 봤을 때 눈 앞에 떠오른 ‘미래의 기록들’, 윤진의 조언, 피고인들의 미심쩍은 태도, 김혜진이 사망했을 당시의 정황,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답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필웅은 무언가,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무언가가, 그들의 살인을 입증해 주고야 말 것이라 생각했다.

필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인죄라는 얘기를 듣자, 방청석에 놀라움과 당황, 의아함을 동시에 포함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보통 사건을 방청하러 오는 사람들은 사건의 관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단지 대략적인 사실관계만 알 뿐 정확히 무슨 죄를 심판하는 재판인지 모르고 들어오는 경우도 상당했기 때문일 터였다.

“살인죄요? 자살방조나 특수폭행 같은 게 아니구요?”

“예, 맞습니다.”

최 판사는 미심쩍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판장님, 검사 측은 억지 기소로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인 피고인의 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피해자가 목숨을 끊은 데 사용한 칼에는 피해자의 지문만 있었습니다. 그 외에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죽였다고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무 데에도 없습니다!”

변호인이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다. 최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필웅에게 물었다.

“검사 측, 일단 지금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대체 검사가 어떤 근거로 피고인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살인사건 하나 해결하더니, 너무 억지로 피고인들을 다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거 아닙니까?”

마지막 말에는 대놓고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

필웅은 침착하게 말했다.

“재판장님, 피고인신문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피고인 신문이라구요?”

“예, 개별 피고인 별로 신문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재판장님, 검사 측은 부실한 증거를 피고인을 압박하여 보완하려는 것입니다.”

변호인이 일어서서 강하게 주장했다. 최판사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본 재판장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피고인 신문을 요청하는 건 금지된 것은 아니니까. 좋습니다. 일단 김태현 피고인부터 진행하지요.”

최 판사는 김태현을 손짓해 불렀다. 필웅은 일어선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피고인, 피고인은 이 장소를 알고 있습니까?”

필웅은 그에게 혜진이 그린 폐건물의 그림을 다시 꺼내어 보여줬다.

“아, 모른다니까요.”

“자세히 잘 보세요. 피고인이 사는 가현동에 있는 폐공장입니다. 정말 이 공장을 모릅니까?”

김태현은 답답해하며 외쳤다.

“그거 가현동에 있는 거 아니잖아요? 저는 그런 거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니까요?”

그 말을 들은 필웅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필웅은 다음으로 박우식에게 물었다.

“피고인, 피해자가 살해당한 날 다른 두 피고인과 독서실에 갔다구요?”

“네, 맞습니다.”

“독서실의 총무는 피고인이 가현 독서실에 온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예? 그게, 음. 저는 원래 나현동 독서실에 다녀요.”

“그럼 다른 피고인들은 가현 독서실에 다니는데 피고인만 나현동 독서실에 다닌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같이 독서실에 갈 수 있죠?”

“가, 같이 가다가 중간에 길에서 따로 가는 거에요!”

“그러면 피고인이 나현동 독서실에 갔다는 것을 김태현과 이영혜 두 피고인은 증언해 줄 수 없겠군요?”

“그게 무슨?”

“저 둘은 같은 독서실에 갔을테니 서로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길이 갈라진 다음 박우식 피고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 날 다같이!”

“다같이 있었다구요? 대체 어디에, 누가 누구와 있었다는 겁니까? 다같이 있었는지, 따로 있었는지, 다같이 혹은 따로 어디 있었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세요.”

“…!”

박우식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필웅을 노려보기만 했다.

필웅은 차갑게 몸을 돌려 이제는 이영혜를 바라보았다.

이영혜는 아까보다도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필웅은 흘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일전 김태현을 봤을 때 나타났던 것과 같은 영상들이 필웅의 눈 앞에 떠올랐다.

‘그렇지, 그렇군. 좋아.’

필웅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사, 지금 뭐하는 겁니까?”

“잠시만요. 눈이 좀 뻑뻑해서요.”

필웅은 능청스럽게 대꾸하고는 먼 산을 보듯 이영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눈 앞에 튀어나오는 이 영상을 끄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피고인, 피고인은 피해자 김혜진의 친구였죠?”

이영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다. 필웅은 재차 물었다.

“피고인, 피고인은 김혜진과 친구였다가 다른 두 피고인과 친해지면서 피해자를 괴롭히는 데 가담했습니다. 아닙니까?”

“재판장님! 사건과 상관없는 질문입니다.”

변호인이 인상을 쓰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런 것 같네요. 검사 측은 사건과 직접 관련된 질문만 해주세요.”

필웅은 건성으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이영혜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피고인, 나현동의 폐건물에는 왜 갔습니까?”

이영혜가 고개를 번쩍 들며 경악에 찬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잇지 못했지만, 그 동요만으로도 필웅은 이미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아, 아니에요! 가지 않았어요.”

“김태현 피고인의 진술에 따르면 세 피고인은 피해자가 죽은 날 저녁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나현 독서실에 갔어요!”

갑자기 박우식이 소리쳤다. 변호인은 황급히 그를 제지하며 묻지 않은 말에 대답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필웅은 이상하다는 듯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진술이 갈리네요. 셋이 같이 있었던 겁니까? 이영혜 피고인과 김태현 피고인만 같이 있었던 겁니까?”

이영혜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면서 두 손을 꽉 맞잡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있었어요.”

“박우식 피고인은 거짓말을 한 게 되는군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현 독서실에 갔나요?”

“그게…….”

“그럴 리는 없겠지요. 박우식 피고인은 평소 가현 독서실을 다니지도 않는데 거길 같이 갔을 리가 없으니까요. 같이 어딜 간 겁니까?”

“그냥, 근처 여기저기를…….”

“나현동에 갔었죠?”

“재판장님, 근거도 없는 질문입니다!”

“근거가 왜 없습니까!”

변호인이 다시 제지를 하려고 하자 필웅이 그에게 빙글 돌아서며 맞받아 외쳤다.

“제가 폐건물을 김태현 피고인에게 보여줄 때 김태현 피고인은 그 건물에 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태현 피고인은 당연하다는 듯 그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그 건물은 가현동에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군요.

정말 그 건물을 모른다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거나,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답 아닙니까?

그러면 적어도 김태현 피고인은 나현동의 폐건물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고, 박우식 피고인은 셋이 함께 있었는데도 아닌 척했으며, 이영혜 피고인은 앞서 두 피고인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현동 폐공장이라는 장소를 듣고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셋이 함께 나현동 폐공장에 간 적이 있거나 적어도 그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게 합리적인 추측 아닙니까?”

변호인은 뭔가 말하려다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피고인들의 돌발행동 때문에 어지간히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이영혜 피고인, 말해 보세요.

셋 중 누군가는 반드시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 거짓말쟁이는 피해자의 죽음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이영혜 피고인인가요?”

필웅은 마지막 질문을 하며 한껏 뉘앙스를 살려 ‘그게 너일 필요는 없겠지?’라는 뜻을 온 몸과 표정, 목소리, 어투에 실어 보냈다.

이영혜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벌벌 떨고만 있었다.

“이영혜 피고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아니에요!”

“그럼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죠?”

이영혜는 떨리는 손으로 박우식과 김태현을 차례로 가리켰다.

“저 둘, 저 둘이에요!”

필웅은 씨익 웃었다.

필웅이 일전에 김태현으로부터 본 미래의 기록들에서, 피고인들은 모두 소년법에 따라 훈방조치되거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사건이 모두 종료된 후에야 피고인들 중 하나가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김혜진이 자살에 이르렀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이미 형사절차가 모두 종료된 후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런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 피고인이 추가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당시 양심선언의 내용 역시 결국 자신들은 별 잘못이 없는데 김혜진이 자살했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심선언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이영혜로부터 나타난 자료들에 따르면, 그 ‘양심선언’을 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영혜였다.

‘그래, 네가 약한 연결고리였어!’

필웅은 확신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이영혜를 득의양양하게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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