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16화 (16/151)

16화 나는 이 사건을 본 적이 있다

시연이 필웅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시연은 걱정스럽게 필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 소년부에 안 넘기고 그냥 기소할거야?”

“응.”

“그래도, 이거 소년사건인데, 소년부에서 판단하는 게 맞지 않을까?”

“소년부로 가면 결국 소년부 판사가 다 결정하게 되잖아.”

“꼭 네가 뭔가를 해야 돼?”

“가끔은.”

시연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고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 진짜 걱정되서 이러는 거야. 소년사건 건드리면 꼭 애들 괴롭히는 건달 같아 보이잖아.

소년부로 안 보내고 직접 기소하는 게 일반적이지도 않고.”

“애들은 죄 안지어? 애초에 난 애들이라고 일반 절차랑 다른 절차로 재판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

필웅이 퉁명스럽게 시연의 말에 반박했다.

“알았어. 죄명은 뭐로 할 건데?”

“가능한 한 세게!"

“아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나중에 알려 줄게.”

필웅은 기록들을 챙겨 집어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나중엔 너도 다 이해하게 될거야.”

공소장을 제출한 후 사무실로 돌아온 필웅은 자리에 앉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 내가 본 것들. 그건 다 뭐지?’

필웅은 경찰서에서 김태현을 바라보자 떠올랐던 영상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마치 자신만을 위한 자료실 같았다. 거기에는 미래 시점에서 기록된 사건에 대한 내용들, 논문, 기사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필웅은 미처 그것들을 전부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장경이 심문하고 있을 때 최대한 많은 내용들을 확인하고 기억해 두었다.

‘아무래도 사건의 범인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구조인가 보군.

자, 현재의 소년법에 따르면 18세 미만인 사람이 저지른 사건은 웬만하면 소년부에 보내서 판결해야 하고, 중대한 범죄인 경우에만 일반 형사사건처럼 다룰 수 있지.’

원칙적으로 검사는 경미한 사건을 발견하면 이를 법원의 소년부에 보낸다. 소년부는 심리 후 수강명령이나 소년원 수감 등 비교적 경미한 처분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필웅은 이 사건을 소년부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대한 사건으로 만들어 주지.’

필웅은 어떻게든 이 사건을 일반 사건 절차로 끌고 와서 범죄를 저지르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필웅은 또 한번 다짐하며 굳게 주먹을 쥐다가, 죄와 그에 맞는 벌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에 생경함을 느꼈다.

‘진짜 조필웅에 동화라도 되는 건가. 일단, 내일부터는 좀더 증거와 증인을 수집해 봐야 하니까 일찍 퇴근하자.’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퇴근 준비를 했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필웅은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들어오세요.”

박장경 형사였다.

왠지 안 어울리게 조금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

“웬일입니까?”

장경이 머뭇거렸다. 그 또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필웅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고백하러 온 소녀마냥 그렇게 수줍게 서 있기만 할 겁니까?”

“검사님, 그게.”

“아, 뭔데요?”

“제가 이 사건에서 빠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필웅은 비로소 심각성을 깨닫고는 장경에게 들어와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무슨 소립니까?”

“서장님한테서 지시가 내려왔어요. 저는 이 사건에서 빠지랍니다.”

“그러니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구요? 아니, 형사님 뭐 사고쳤어요?”

“무슨 사고를 칩니까, 제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처음부터 사건 수사하던 사람을 갑자기 빠지라고 합니까? 경찰은 원래 일을 그렇게 해요?”

필웅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필웅은 이제야 뭔가 해 볼 의욕이 막 생긴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함께 수사를 해 온 형사를 업무에서 배제시킨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박우식인가 하는 놈의 아버지가 전직 경찰 간부였답니다. 뒤에서 뭔가 손을 쓴 것 같아요. 갑자기 자살사건으로 판명난 걸 왜 헤집느냐며 상부에서 당장 사건 접으라고 난리네요. 이미 검찰로 넘어간 자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 이상 수사하지 말고 종결하랍니다.”

“그래서요? 그냥 손 놓을 거에요?”

“저도 공무원인데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필웅이 책상을 내려쳤다.

“아니, 형사님! 도대체 뭡니까? 저 납치해서 끌고 다니던 패기는 어디 갔어요?”

“그것은 납치가 아니고…….”

“뭐가 됐던지요. 지금 추가 증거 수집이 제일 절실한 상황인데 갑자기 그만두면 어떡합니까?”

장경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썼다.

필웅이 다시 간곡히 말했다.

“적어도 현장이라도 한 번 더 돌아봅시다. 지금은 형사님 도움이 필요해요.”

장경은 진지한 얼굴로 필웅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이마를 손으로 받치고 아무 말 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좋습니다. 조금만 더 해봅시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나현동 폐공장부터 한 번 다시 봐야 되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내일 오전에 한 번 갔다와 보겠습니다.”

장경이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필웅은 생각보다 사건이 꼬이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직 경찰이 입김을 넣기 시작한다니. 이 사건도 정말이지 갈 데까지 가는군.’

* * *

다음 날.

장경은 나현동의 폐공장에 와 있었다.

폐공장이긴 했지만 부지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먼저 장경은 처음 혜진의 시체가 목격된 장소로 향했다.

이미 조사가 끝난 듯 미처 철거되지 않은 폴리스라인의 잔해 등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장경은 경찰들이 초동 수사때 쉽게 혜진을 자살로 단정한 것을 기억해 냈다.

‘만약 처음부터 자살이라고 단정했다면 사건 현장을 샅샅히 뒤지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장경은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여기저기 남은 공장의 잔해와 먼지 자욱한 기계 더미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기기들은 무거웠고 먼지도 엄청나게 날렸다.

장경은 쉴새없이 기침을 하며 공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 때 장경은 주의 깊게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이게 뭣이여?’

바닥에 다 쓴 본드 통이 버려져 있었다.

‘원래 공장에서 쓰던 건가…?’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본드 통이 너무 새 것이었다.

다 썼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며칠 전 새로 산 물건이라 해도 믿을 법한 상태였다.

‘가만.’

아마도 김태현, 박우식, 이영혜 이 세 학생은 부인하고는 있었지만 최근 이 폐공장에 왔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그 놈들 것인가? 이걸로 여기서 뭐 공작놀이라도 했을리는 없고……. 아!’

한창 학생들의 본드 흡입이 문제시되던 시기였다.

‘이 놈들, 모여서 본드를 불었구나!’

본드를 분 후 환각상태라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모여서 본드를 불고 나서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장경은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고 가져 온 비닐팩에 본드통을 집어 넣었다.

그때였다.

“잠깐! 거기서 뭐하십니까?”

누군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경은 황급히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 서너 명이 달려오듯 빠르게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경이 먼저 물었다.

“누구요?”

“경찰입니다.”

“나도 경찰인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박장경 형사님이시죠?”

“그런데.”

“청에서 수사 종결하라는 지시 못 들었습니까? 애초에 관할도 아닌 사건에 왜 나타나서는 난립니까?”

남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장경을 바라보다가 장경이 손에 든 것을 발견했다.

“그건 또 뭡니까?”

“어, 그냥 길에서 주운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구요. 사건 현장에서 아무거나 가져가면 안 됩니다.”

“나도 형산디 안 되긴 뭐가 안돼?”

“손 떼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까?”

남자가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다른 두 남자가 위협적으로 장경에게 다가왔다.

“느그들 뭐, 깡패여?”

“경찰이라고 말씀 드렸을텐데요.”

“하는 짓이 깡패잖아?”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듯 다가와 장경이 들고 있는 비닐 팩을 손으로 잡았다.

장경이 눈을 부릅떴다.

“안 놔?”

“먼저 놓으십시오.”

“한 번 해보자는겨?”

장경은 화를 버럭 내면서 비닐 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장경은 겉으로는 강하게 나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어쨌든 눈 앞의 상대방이 경찰인 건 사실이었다. 아마도 외압을 받은 경찰의 윗선에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개돼지 같은 놈들, 아무리 그래도 증거까지 인멸하려고 들어?’

장경은 비닐 팩을 확 잡아채듯 당겨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남자들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우리가 어디서 온지 몰라요?”

“느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박장경 씨, 눈치가 그렇게 없습니까?”

남자가 딱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눈치가 없는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없는 건 아니지.’

장경도 여기서 반항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셋이고 셋 다 경찰이니 장경이 쉽게 혼자서 제압하기는 힘들 터였다.

남자들은 점점 간격을 좁혀가며 장경을 포위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읍시다. 저도 식구끼리 이러고 싶지 않아요.”

“너 같은 호로새끼가 내 식구였으면 진작에 호적에서 파버렸을 것이여.”

장경은 씹어뱉듯 말하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남자들도 기민하게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를 다시 에워쌌다.

장경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장경은 주먹을 앞으로 세우고 방어할 자세를 취했다.

“쳐!”

줄곧 대화를 이어가던 남자가 외쳤다.

장경의 뒤에서 다른 남자가 장경의 다리로 발차기를 날렸다. 장경은 가까스로 위로 펄쩍 뛰어 피하고는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뒤에서 장경을 끌어안았다. 장경은 뒤로 박치기를 하고는 힘이 빠진 남자의 팔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그 때 장경과 대화하던 남자가 달려들어 장경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장경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연이어 쓰러진 장경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장경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비닐 팩에 손을 뻗었다.

“잠깐!”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서 일어서던 남자의 일행들과 비닐 팩에 막 손을 뻗던 남자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경의 상사인 김도율 강력계장과 후배들이었다.

남자는 인상을 쓰며 일어섰다.

“또 뭡니까?”

“또 뭡니까? 이 싸가지없는 새끼, 나 강력계장이다. 너 계급 뭐야?”

김 계장이 일갈을 지르며 재빨리 다가와 장경을 부축했다.

계급 이야기가 나오니 남자의 사나운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저희 지금 공무집행 중입니다.”

“나는 소풍 나온 것 같냐?”

김 계장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히고는 장경에게 물었다.

“괜찮냐?”

“뭔 애들을 이렇게 떼거지로 끌고 옵니까?”

김 계장은 뒤에 늘어선 후배들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는 되야 사람이 힘이 있어 보이지 않겠냐?”

“예, 예. 물론입죠.”

“이놈 자식은 도와주러 와도 난리네.”

김 계장은 툴툴대고는 여전히 표정이 썩어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 사건 우리 강력계가 접수할 거니까 그만 나대고 가라.”

“계장님, 지금 크게 실수하시는 겁니다.”

“지금 경찰이 경찰 패 놓고 누가 누구보고 실수래? 라인은 너만 타는 줄 알아?”

김 계장이 으르렁거렸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장경이 강력계장에게 다가왔다.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저 놈들 어디랑 연결되어 있는지 아시잖아요.”

강력계장이 슥 코를 훔치고는 말했다.

“에휴, 부하 복이 없으니 어쩌겠냐. 사람 구실 못하던 놈이 오랜만에 사람 구실좀 해 보겠다는데 상관이 되서 도와는 못줘도 방해꾼은 치워줘야지.”

장경은 내심 크게 감격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툴툴댔다.

“라인이라고는 쥐뿔도 없음서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너 때문에 옷 벗으면 네가 책임져 주겠지.”

“제가 개털인데 뭘 어떻게 책임집니까?”

“아, 몰라. 알아서 잘 좀 해라 이제.”

김 계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후배들과 함께 들어온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장경은 힘들게 지켜낸 주머니 속의 비닐 팩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제 시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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