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12화 (12/151)

12화 내 편은 아무도 없다

장경은 쫓겨나듯 집에서 나왔다.

혜진의 어머니는 혜진이 자살했다고 했다. 혜진은 인적이 뜸한 한 폐건물에서 손목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사건에 대한 정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관할서 경찰들은 자살이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혜진이 손목을 베는데 사용했던 칼에 혜진의 지문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망추정시간을 들은 장경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불과 장경을 찾아온 후 몇시간 뒤의 일이었다.

‘말도 안돼.’

관할서를 나오면서 장경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소녀에 대한 죄책감에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경찰도 심지어 혜진의 부모도 쉽게 자살로 판명한 사건이었다.

장경은 순간 아까 혜진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일기장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났다. 그는 급하게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 하지만 내가 죽긴 왜 죽어?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강아지도 키우고 싶고, 대학교도 가고 싶다. 연애도 해 보고 싶다.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뒤에서 내리친 듯한 기분이었다.

'그 모든 괴롭힘에도 이런 글을 남긴 아이가, 그렇게 홀연히 목숨을 끊을 리 없어!'

장경은 손을 덜덜 떨며 손에 들린 일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뒤의 몇 장은 뜯겨져 있었다. 혜진이 장경에게 전해준 쪽지는 일기장의 마지막 내용들을 뜯어서 준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증거로 수사기관에서 압수해 갔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자살임이 확실하다며 따로 일기장을 갖고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혜진의 어머니는 그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혜진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장경은 무엇인가 결심한듯 일기장을 다시 처음부터 펴들었다.

‘이건 절대 자살이 아니야!’

그의 눈이 처음 경찰로 임용되던 날의 그것처럼 하얗게 타올랐다.

* * *

“검사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가요?”

“관할서 형사라고 하던데요.”

심기원의 살인사건의 선고를 받고 나오던 조필웅에게 복도에서 만난 주 계장이 말했다. 필웅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주 계장에게 말했다.

“아, 계장님. 근데 요새 점심 시간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시는 거에요? 사무실 문도 다 열어 놓고.”

필웅이 약간 질책하는 투로 말하자 주 계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필웅은 생각보다 주 계장이 너무 기운 빠져 해서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아뇨. 뭐라 하는 게 아니고, 조금만 주의 부탁 드린다구요.”

“예. 정말 죄송합니다.”

필웅은 조금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필웅은 PC방 살인사건의 범인인 심기원에게 사형을 선고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이게 바로 정의 구현이라는 거지!’

필웅은 왠지 난생 처음으로 ‘정의 실현’에 기여한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범죄자에게 갱생의 여지를 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필웅은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얼마든지 기회를 주면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돌보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흉악범들에게 갱생의 기회가 우선인 건가? 그럼 피해자는?

살인범들이 감옥 안에서 실컷 참회하고 양심의 가책을 덜고 나면?

피해자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건데?’

필웅은 처음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필웅은 변화하고 있었다.

‘범죄의 피해자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갱생은커녕 계속 살아갈 기회까지 박탈당했는데,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생각을 마친 필웅은 역시 무언가 옳은 일을 한 기분에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필웅이 싱글벙글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소파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필웅은 그 뒷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필웅은 들고 있던 기록들을 문가 옆의 탁자에 올려 놓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 영감님 오셨습니까!”

남자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깍듯이 인사했다.

“아, 예.”

필웅도 맞은 편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어? 당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서로를 가리켰다.

“그 때 그 형사?”

“백화점에서 만났던?”

필웅은 지난 주 시연과 백화점을 갔다가 소매치기를 잡는 현장에서 처음 장경과 마주친 날을 기억해 냈다.

별로 유쾌한 첫 만남은 아니었기에,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까칠하게 물었다.

“그 때 그 형사님이시군요?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아, 저, 그게. 사실 사건을 하나 진행하고 있는데 보고를 드리려고…….”

“사건 수사하는데 뭘 일일이 보고를 하고 진행을 합니까? 조사해 보시고 기소할 만한 사건이다 싶으면 넘기시면 되지.”

“그게, 소년 사건이라서 말입니다.”

“그런데요?”

“아무래도 소년 사건들이다 보니 해봤자 소년원에나 가게 되고 판사님들도 온정적이시니까 사건이 되더라도 영감님들께서 기소를 잘 안하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미리 좀 사건의 심각성을 알려 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소년 사건이 심각할 게 뭐 있습니까? 그래봤자 애들 싸움이지.”

필웅은 흥미를 잃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책상 위의 서류를 휙휙 넘겼다.

“영감님, 혹시 왕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왕따라는 말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말부터라고 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왕따라는 말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었다.

“왕따요? 예, 알죠.”

“왕따 때문에 피해자가 자살한 사건입니다. 이걸 좀 보십쇼.”

박장경이 다가와 너덜너덜한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몇 번이나 들춰본 듯 거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할 지경이었다.

“이게 뭡니까?”

“피해자의 일기장 일부입니다. 가해자인 학생들이 어떻게 피해자를 괴롭혔는지 낱낱히 써 있어요.”

조필웅은 넘겨보던 서류 파일을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탁 하고 닫고는 장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보세요, 형사님. 사건 수사에는 절차가 있다는 거 몰라요?

그리고, 뭐가 어찌 됐든 피해자가 자살한 사건인데 옆에서 가해자들이 목에 매듭이라도 묶어준 게 아니면 이걸 도대체 어떻게 기소하라는 말입니까?”

장경이 순간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쳤다. 흥분한 나머지 장경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영감님, 그것이 아니라요. 이놈들이 얼마나 숭악한 놈들이냐 하믄…….”

“아, 됐구요. 기소하길 원하시면 제대로 절차 밟아서 사건 만들어서 갖고 오세요. 제가 그렇게 한가해 보입니까?”

필웅은 더 이상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이규필 부장과의 점심 약속이 있는 참이었다.

“영감님, 이걸 한 번만…….”

“사건 만들어서 오시면 그 때 보겠습니다.”

필웅은 차갑게 대답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 버리자 장경은 홀로 그의 사무실 안에 남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 * *

장경은 혜진의 학교에 와 있었다.

‘그려, 내가 사건으로 만들어다 가져다주겠다 이거야!’

장경은 이를 갈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어떻게든 이 사건이 평범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설령 평범한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혜진을 자살로 내몬 주범들에게 어떻게든 법의 처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장경은 먼저 혜진의 담임선생을 찾아갔다.

“혜진이요? 음. 좀 음침한 아이였어요. 말도 잘 안하고, 성적도 고만고만하고. 친구는 없는 것 같았구요.”

장경은 담임선생의 말을 받아 적으며 물었다.

“친구가 없다고 하셨는데, 혜진이가 집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모르셨습니까?”

“괴롭힘이요? 그 나이 또래 애들 사이에서는 장난이 좀 심해질 수 있죠. 그냥 장난인데 혜진이가 좀 과민반응을 한게 아닐까요?”

장경은 울분이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혜진의 일기장 뒷부분 몇 장을 내밀었다.

“선생님이 보셨을 땐 이게 그냥 장난같이 보입니까? 예?”

담임선생은 이게 뭔가 하고 받아들어 읽더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이건 좀 심하긴 하네요.”

“그렇죠?”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혜진이 잘못도 있다고 봐요.”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다른 애들은 전부 잘 어울려서 노는데, 혜진이가 워낙에 성격도 어둡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방법도 모르니까 겉돌게 되는 거죠. 저희 반에는 혜진이 말고는 이렇게 괴롭힘 당하는 애는 없거든요.”

장경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혜진이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면서요? 선생님 반에서 또 아가 죽어 나가면 그때 가서 또 갸밖에 괴롭힘 당하는 애 없다고 하실 겁니까?”

“형사님, 말씀이 지나친!”

“지나친 건 선생님 무책임이죠. 아가 괴롭힘 당해도 모르고, 알려 줬더니 이제는 괴롭힘 당한 사람 잘못이다? 저도 선생님 한 대 쳐 볼까요? 그럼 선생님이 맞을 짓 했으니까 맞아도 싼 거 맞죠?”

장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교무실에 있던 다른 선생들이 뭔가 하고 빼꼼히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거나 일어서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제서야 관심들이 생깁니까들! 애가 죽을 때까지는 아무도 들여도 안 보다가!”

장경은 일갈하며 책상을 꽝 주먹으로 치고는 일어섰다.

‘잘 아는 아이도 아닌데.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도 없는데, 왜이리 화가 나는 거지.’

장경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화가 정말 혜진의 선생들을 향한 것인지, 혜진에게 무책임했던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니까, 애들이 혜진이를 괴롭혀도 다른 애들은 가만히 있었다?”

“네.”

장경이 사다 준 햄버거를 먹으며 소심해 보이는 남학생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애들이 다 보는 데서 괴롭혔는데도?”

“네.”

“너도?”

“네.”

“왜?”

“왜라뇨?”

“아니, 그래도 연약한 여학생이 괴롭힘을 당하는데 선생님한테라도 알려야 되겠다 뭐 그런 생각 안했어?”

“해도 소용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선생님한테 알려줘도 어차피 들은 척도 안 할건데요 뭐. 그리고 혜진이 스스로가 얘기를 안 하는데 제가 왜 해요.”

장경은 학생의 말에 갑자기 담배가 땡겼다.

“그니까, 너도, 혜진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몰라요.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괜히 나댔다가 저도 따당한단 말이에요.”

남학생은 시종일관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장경은 입이 쩍쩍 말라오는 것 같아 옆에 놓인 콜라를 들어다 벌컥벌컥 마셨다.

“아, 줘놓고 왜 다 뺏어 마셔요!”

“어릴 땐 탄산 너무 마시면 안 좋아. 넌 수돗가 가서 물 마셔.”

장경은 학생의 볼멘소리에도 꿀꺽꿀꺽 끝까지 콜라를 다 마셔버리고는 빈 캔을 집어 던졌다.

“야, 찐따. 혼자 뭐 처먹냐?”

그 때 2명의 남학생과 1명의 여학생이 햄버거를 먹고 있던 남학생에게 다가왔다.

남학생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대며 말했다.

“해, 햄버거…….”

“뭐? X발, 누가 너만 처먹으래. 내놔.”

남학생 중 좀더 키가 크고 건장해 보이는 아이가 앞으로 나와 햄버거를 빼앗고는 흙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내가 허락 없이 어디 숨어서 뭐 처먹지 말랬지?”

“미, 미안해…….”

“미안은 지랄. 따라 와 이 새끼야.”

건장한 남학생은 겁먹어서 움츠러든 남학생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고는 자기 패거리 쪽으로 아이를 떠다 밀었다.

“너희들 뭐하냐?”

그러자 비로소 아이들은 그제서야 그도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처럼 느릿느릿 장경을 돌아보았다.

“장난치고 노는 건데요.”

“장난치는데 햄버거는 왜 버려.”

“얘 속도 안좋은데 자꾸 햄버거 먹어서 못 먹게 하려는 거에요.”

“잘 먹던데?”

“식탐이 많아서 먹으면 안 되는데 잘 먹어요. 아저씨는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무거나 처먹으면 잘 먹는다고 그냥 냅둘 거에요?”

키 큰 남학생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패거리들도 킬킬거리며 웃었다.

장경은 그 때, 움츠러든 남학생의 어깨를 꽉 잡고 있던 패거리 중 남자아이 쪽이 겁먹은 남학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것을 들었다.

“너도 혜진이 꼴 나고 싶냐? 칼자국 하나 내줘?”

장경이 그 학생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너희들 뭐야. 혜진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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