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얘가 진짜 엄친딸이구먼!
청사 인근 도서관. 필웅은 시연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시연은 고개를 돌려 필웅을 쳐다봤다.
시연이 숨죽인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뭐야?”
“그런 걸 왜 읽는 거야?”
시연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 번 책을 돌려 표지를 보고는 필웅에게 말했다.
“<심문의 기술>이잖아.”
“그런데?”
“그런데라니?”
“아니, 이런 책 읽을 시간이 있으면 쉬든가 어디를 놀러 나가든가 해야지, 왜 주말에 그런 살벌한 책을 읽고 있는 거냐고.”
“어허, 조필웅 검사님! 아는 것이 힘이야. 검사의 힘은 아는 것에서 나온다고!”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책 한두 권 본다고 진짜 심문을 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연이 책을 덮더니 진지한 얼굴로 훈계하듯 말했다.
“조검사님! 우리 일은 결국 범죄자들과의 심리전이야. 범죄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해야 범죄자들의 입을 열수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로서는 범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잖아? 그러니까 책으로라도 간접 경험을 해 둬야 하는 거지, 이렇게!”
시연은 말하며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탁탁 두드려 보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과 필웅 쪽을 일제히 돌아보았다.
시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곤 입을 지퍼로 채우는 시늉을 했다. 필웅은 덩달아 사과하면서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자신을 원망했다.
필웅은 토요일 오후 잠시 논의할 게 있어서 시연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마침 시연은 사무실을 나서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던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시연을 따라 도서관에 오게 되었다.
시연은 잔뜩 흥분된 표정으로 책을 산더미처럼 가져다 놓고 책상에 앉았다. 필웅은 깨작깨작 책을 고르다 대충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는 시연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필웅도 그리고 원래의 나영전도 공부에 필요한 책 외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연은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고 필웅은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필웅은 슬쩍 시연의 앞에 놓인 책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소리를 한껏 낮춰서 물었다.
“진짜 이걸 다 읽을 셈이야?”
“응? 이미 절반은 읽었는데?”
“뭐?”
“그에 반해 너는.”
시연은 빼꼼히 필웅이 읽고 있는 책을 넘겨보았다.
필웅은 이제 간신히 1/3정도를 읽은 상태였다.
“무슨 책이야?”
시연이 책 제목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즉시 써먹을 수 있는 연애의 기술 29가지>…?”
시연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냥 아무 거나 갖고 온 거야!”
시연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에~? 그냥 아무 거나 갖고 온 것치고는 너무 열심히 읽고 있는 거 아닌가?”
“시끄러워. 아무튼 진짜 다 읽고 갈 거라는 거지?”
“얼마 안 남았어.”
“난 그럼 잠깐 바람 좀 쐬고 온다.”
필웅은 계속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길을 받으며 일어섰다.
필웅은 도서관 뒤의 흡연장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잠시동안 그렇게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가 손으로 담배를 끄집어 내렸다.
필웅은 원래 담배를 피지 않았다. 흡연은 나영전의 습관이었다. 폐가 좋지 않은 필웅에게 사실 흡연은 독약과도 같았다.
필웅은 복잡한 심경으로 손에 들린 담배갑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필웅은 담배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별로 몸에 좋은 것도 아니니까.’
필웅은 피식 웃었다. 필웅은 왠지 점점 자신이 나영전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히 그런 느낌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싫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적응의 일부분인 거지 뭐.’
필웅은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어차피 2020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거잖아? 그 때가 되서 다시 피고 싶어지면 펴도 늦지 않지.’
필웅은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어느새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녹림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필웅은 기분 좋게 숨을 들이쉬었다.
‘확실히 공기는 지금이 더 좋구만.’
필웅은 시연이 보고 있던 책들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필웅은 학구적이고 시연은 외향적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필웅은 원칙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고 책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시연은 특이하게도 유도선수 출신이다. 전국체전에도 출전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대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서 운동을 포기하고 사법시험에만 몰두했다. 사람들은 시연이 운동선수 출신이라 외향적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은 모르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경향이 컸다. 우연한 기회로 친해진 필웅과는 가깝게 지냈지만 대학에서 시연과 친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시연은 연수원때도 필웅과만 꼭 붙어있으려고 했다. 동갑은 아니지만 필웅과 시연이 편하게 대화를 하는 것도 그만큼의 친밀감이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는 왜 운동을 그만 둔거지?’
시연은 고등학생 때까지 장래가 촉망받는 운동선수였다고 했다. 그러던 그녀가 대학교에 와서는 갑자기 죽자사자 공부만 해서 순식간에 사법시험을 패스하고 검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얘가 진짜 엄친딸이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생각해 보면 시연은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시연은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엄친딸임에도 모태솔로였다. 먼저 다가서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시연은 그 때마다 별 흥미 없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버리고는 했다.
필웅은 혹시 시연이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연의 사무실에서 H.O.T의 사진이 박힌 엽서들과 책받침 등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일찌감치 접었다. 동성애자라면 남자들 쫓아다닐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누군가 그의 등을 탁 쳤다. 필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연이었다.
“깜짝이야! 갈 거야?”
“응.”
“책 다 본 거 아니야?”
필웅이 한아름 책을 들고 있는 시연에게 물었다.
“그건 다 봤지. 이건 갖고 가서 읽을 거~”
“너 이정도면 병이야.”
“너야말로 책만 펴면 잠드는 거 병이야.”
시연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대답했다.
“안 무거워?”
필웅이 시연을 내려다보며 슬쩍 물었다.
“뭐, 들만해.”
“줘봐. 같이 들어 줄게.”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위에서 책 몇 권을 내밀었다.
필웅은 제일 위에 놓인 가장 얇은 책을 한 권 집어들었다.
“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 몰라? 가자. 배고파.”
필웅은 싱글싱글 웃으며 가볍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시연은 필웅이 미래의 자신에게 당한 걸 사소하게 갚아줬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어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이건 안 들켜서 다행이다.’
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들고 있는 책꾸러미의 제일 밑에 깔린 <즉시 써먹을 수 있는 연애의 기술 29가지>를 보면서 혼자서 피식 웃었다.
* * *
며칠 후.
필웅은 얼떨결에 시연이 진행하는 공판의 방청석에 와 앉아 있었다.
얼마 전 복도를 지나가다가 수사관들이 모여 수근대는 것을 엿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정시연 검사님이 심문하시는 거 봤어?”
“아, 그거. 진짜 굉장하더라.”
“그렇지? 막 다른 검사님들처럼 다짜고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닌데 증인이며 피고인이며 어느샌가 죄다 술술 실토하고 있더라니까?”
필웅은 지나가다가 수사관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크흠하고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수사관들이 화들짝 놀라 그제서야 필웅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인사했다.
“아, 영감님.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정시연 검사 얘기하고 계셨나봐요?”
“그게, 워낙에 젊으신데 실력도 좋으시고. 저희끼리 참 대단하신 것 같다고 얘기 중이었습니다.”
“흠! 그렇군요. 시연이 얘기가 들리길래 무슨 얘긴가 조금 궁금해서요.”
수사관 중 하나가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얼마 전에 한 공판에서 피고인이 죽어라고 딴 소리만 하면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 검사님이 조곤조곤 심문을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서 이 놈이 홀린 것처럼 대답을 술술 하더란 말이죠.”
‘그렇단 말이지?’
필웅은 흥미가 동했다.
정말 이 수사관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신기해 할 정도라면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정시연 파트너도 로펌에 오기 전까지는 잘 나가는 검사였다고 했지.’
필웅에게는 도대체 그녀가 어떻게 ‘잘 나가는 검사’가 된 것인지 확인할 기회이기도 했다.
문득 필웅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검사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던 애가 그런 인간이 된 거지?’
필웅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부여잡고 가장 가까운 시연의 재판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필웅은 마치 관객처럼 시연의 재판정에 와 있었다.
이른바 퍽치기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야밤에 골목길에서 누군가로부터 퍽치기를 당했고 범인은 쓰러진 피해자로부터 금품을 훔쳐갔다. 그런데 우연히 이를 목격한 행인이 있었고 그 행인은 근처에서 불량배로 악명이 높은 전과자 한 명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오늘은 피고인을 검찰이 신문할 차례였다.
“검찰 측, 신문하세요.”
재판장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시연이 일어섰다
시연이 피고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피고인, 피고인의 취미는 뭔가요?”
필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건과 아무 상관없는 질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피고인도 비슷하게 느낀 듯했다.
“당구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저도 당구 좋아하는데! 몇 치세요?”
필웅이 알기로 거짓말이었다. 시연은 태어나서 당구를 쳐 본 적이 없었다.
“300이요.”
“우와, 정말 잘 치시는구나!”
“뭐 보통 치면 돈은 안 잃습니다.”
“내기 당구도 자주 치세요?”
“가끔 치는 편이죠.”
“혹시 이 사건이 있던 날에도 치셨나요? 치셨다면 이기셨나요 아니면 지셨나요?”
“한 게임 쳤는데 져서 돈을 좀 잃었습니다.”
“화가 좀 많이 나셨겠네요?”
“조금요.”
“당구장 위치는 어딘가요?”
“나현동 중앙상가 쪽입니다.”
“당구가 끝나고 몇 시에 나오셨나요?”
“한 9시쯤 나왔습니다.”
“당구가 끝나고 집으로 곧장 가신거죠?”
“그럼요, 물론입니다.”
“어딘가를 들른 건 아닌가요? 도박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근처 불법 도박장이라든가…….”
“아닙니다! 집으로 바로 갔어요!”
“그렇다면 사건 현장을 목격하셨겠군요?”
“예?”
“당구장에서 나온 시간은 9시. 사건 현장은 집으로 가는 외길. 다른 곳을 들르지도 않았고, 사건 현장과 당구장은 고작 5분 거리. 아무리 봐도 동선이 겹치는데요?”
“그건… 그래요, 맞습니다! 제가 사건 현장을 봤어요! 누군가가 피해자를 벽돌로 내리치는 걸 봤습니다!”
“본인이 또다른 목격자시다?”
“예, 맞습니다!”
“그러면 왜 범행을 바로 신고하지 않았죠?”
“그건, 무서우니까…….”
“범인의 얼굴을 보셨나요?”
“그게, 밤이라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다른 증인은 피고인의 얼굴을 어떻게 봤겠어요? 사건 현장은 가로등 바로 밑이었습니다. 피고인 주장대로라면 그 근처를 지나고 있었을 피고인이 범인의 인상착의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
“피고인은 범행시각 무렵 범행현장을 지나갔는데 범행을 ‘목격’하지는 못했고,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이상입니다.”
피고인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계속해서 입을 움찔거렸으나 시연은 몸을 그대로 돌려 자리에 와 앉았다.
필웅은 새삼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시연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한데?’
시연의 질문들은 때론 투박한 필웅의 신문과는 뭔가가 달랐다. 처음에는 사건과 상관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피고인의 주의를 흐뜨려 놓고는 단박에 핵심을 향해 내찌르는 창과 같았다.
재판이 그렇게 종료됐다. 필웅은 재판정을 빠져 나오며 생각했다.
‘다음에 혹시 사건이 있으면 한 번 부탁을 해봐야겠는데?’
필웅은 미래에 진상 파트너였던 시연의 새로운 모습들을 알아가는 게 점점 흥미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