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여기 아메리카노도 없어?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사 측은 추가로 주장할 내용 없습니다.”
필웅은 나른하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 기일에 선고하겠습니다.”
판사의 선언과 함께 재판이 종료되었다.
필웅은 주섬주섬 기록을 주워들고 재판정 밖으로 나왔다.
필웅은 수사검사여서 일반적으로는 공판까지 참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감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몇 가지 자잘한 사건들의 공판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사건들은 하나같이 사소한 것들이어서, 필웅으로서는 재판 중 하품을 참는 것도 힘들었다.
복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그에게 주 계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영감님. 방금 공판 때 추가 증거 제출을 신청했었어야 하는데요.”
“예? 왜 이야기 안 해 주셨어요?”
“어제랑 방금 공판 들어가시기 전에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그래요? 허 참. 뭐 할 수 없죠.”
필웅은 고개를 젓고는 하품을 하며 휘적휘적 사무실로 걸어갔다.
“저, 영감님. 근데 그 증거가 제출되야 유죄 판결이 나올텐데요. 워낙에 결정적인 증거라서.”
“계장님! 기껏해야 절도사건이잖아요. 먹고 살자고 라면이나 몇 개 훔친 거 아닙니까?”
“라면이 아니라 담배가게에서 현금을 턴 건데요.”
“그거나 그거나. 담배가게에 현금이 뭐 있어봐야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또 압니까? 이번에 좀 선처해 주면 뉘우치고 착하게 살지?”
필웅은 약간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적당히 좀 살자, 적당히!’
만약 정말 어떤 피의자를 잡아 넣음으로써 명성도 쌓을 수 있다면, 조필웅도 조금은 열심히 할 용의가 있었다.
‘기껏해야 담배가게를 턴 도둑놈인걸.’
피해액은 체포 당시 몰수해서 담배가게에 돌려줬다. 그러니 도둑놈이 감옥에 가든 안 가든 사실 피해자가 손해를 볼 것도 없다는 것이 필웅의 생각이었다.
결국, 피해자에 대한 보상적인 성격의 처벌은 그렇다 치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라는 원론만 남는 것인데.
필웅은 딱히 피해를 본 사람도 없는데 이런 잡범들까지 꼬치꼬치 캐물어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게 원리원칙만 강요하는 것이라 느꼈다.
“주 계장님, 식사나 같이 할까요?”
“아, 전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먼저 드시죠.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필웅은 경쾌하게 대답한 후 휘적휘적 검찰청사의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건너편에 막 토스트 가게가 오픈했는데 그 집에서 하나 사 먹어 볼 생각이었다.
‘주변에 카페가 없는 게 아쉽군!’
그는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 물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오고 싶었다. 아무래도 때가 때이다 보니 2020년처럼 카페가 많이 눈에 띄진 않았다.
“어서오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앞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며 여러 개의 토스트를 동시에 뒤집고 있었다.
“아, 예. 햄계란 토스트 하나 주세요.”
“네, 소스는 다 뿌려 드릴까요?”
“다 뿌려 주세요.”
아주머니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 토스트를 굽기 시작했다.
철판에 노릇하게 버터를 칠하고는 식빵을 꺼내 부치기 시작하자 고소한 버터가 빵에 입혀지는 향이 솔솔 올라왔다.
필웅은 불현듯 왠지 더 배가 고파지는 것을 느꼈다.
필웅의 뒤로도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어 토스트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필웅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장사가 잘 되네요.”
“아유, 그러게요. 많이들 와주시니 애 키우는 입장에서 저야 고맙죠.”
조필웅이 흘끗 가게 안쪽을 보았다. 안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은 6-7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숙제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 가게는 여기서 처음 하시는 건가요?”
“아뇨, 사실 지방에서도 작은 가게를 했었는데 일이 좀 있어서.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아주머니는 정신없이 여러 개의 토스트를 뒤집고 계란물을 입히다가 비로소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꺼내 필웅에게 내밀었다.
“자주 오세요!”
아주머니가 푸근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필웅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소스도 적절히 배어 있었고, 버터도 새 것을 썼는지 싱그럽기까지한 향이 났다.
‘이걸로 프랜차이즈를 하면 떼돈 벌겠는걸.’
필웅은 미래에 전국에 체인점이 생길 어느 유명한 토스트 가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 * *
검찰청사의 1층 휴게실.
주 계장과 얘기를 나누면서 시연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필웅이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해 보이는 건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병상에서 깨어난 그는 왠지 그 전의 그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의 생김새나 목소리 같은 외관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조필웅에게는 뭔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사소하지만 말투가 뭔가 바뀐 듯했다. 특히 얼마 전 주 계장으로부터 들은 사건 관련 일화는 그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증거를 빠트리고는 추가 증거 신청도 안 했다구요? 그럼 유죄를 받을 피고인이 무죄가 되는데도?”
커피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드는 주 계장에게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필웅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기에, 1층의 커피자판기가 놓인 휴게실은 그녀가 주 계장으로부터 필웅의 근황을 염탐할 때 자주 만나던 장소였다.
“예, 그렇다니까요. 뭐 선처를 해 주면 반성하지 않을까 하시더라구요. 그건 그렇다 쳐도 요새 좀 이상하시긴 합니다. 혼자 허공 보면서 히죽히죽 웃으실 때도 있고.”
시연은 혼란스러워 하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검사 조필웅의 행동이 아닌데.’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는 만큼 그가 중요한 증거를 빠트린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상하게 느낀 건 그 다음 필웅의 행태였다.
그녀가 아는 필웅은 범죄자의 사정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인간미 없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백히 유죄인 사건에는 범죄자의 사정을 봐 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필웅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판단 하에 유죄인 피고인이라면 반드시 잡아 넣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귀신이라도 들렸나?’
그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런 추측이 놀랍게도 진실에 상당히 근접한 결론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물론, 그녀는 기본적으로 초자연적 현상이나 미신을 신봉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겪고 사람이 변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그런 일들에 모두 초자연적인 의지가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뭔가가 미심쩍다고 느꼈다.
“주 계장님, 앞으로도 혹시 필웅이가 뭔가 이상한 짓 하거나 이상한 소리 하면 저한테도 알려 주실래요?”
“예? 예. 뭐 그러시죠.”
주 계장은 두 검사 모두 뭔가 이상하다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 * *
필웅은 매일 출근길에 토스트를 샀다.
맛있는 데다 단골이라며 햄이나 계란이라도 기어이 더 얹어 주고야 마는 아주머니의 인심에 내심 조금 감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아주머니에게서 나영전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영전이 어렸을 적에는, 장사를 하는 어머니 옆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곤 했다.
그렇게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토스트집을 계속 찾고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아침이었다.
필웅은 여느 때와 같이 토스트집에 들렀지만 토스트집이 문을 닫았다.
필웅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푸른 셔터가 내려진 가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 아프신가?’
혼자 하시는 가게이기에 몸이 아프면 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필웅은 약간 아쉬워하면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무실로 들어와 우산을 탈탈 털어내는 그에게 주 계장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영감님,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이요?”
“그게, 저, 왜 영감님 좋아하시는 청사 앞 토스트 가게 있지 않습니까.”
“네, 그게 왜요?”
“어제 저녁에 그 집 사장이 퇴근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그만……. 현재 의식이 없답니다.”
필웅은 뭔가 덜컥 하고 가슴을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짐짓 담담한 듯 되물었다.
“그래요? 뭐 심각하답니까?”
“예, 저녁에 그 날 판 돈 갖고 퇴근하려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돈을 안 주고 저항하니 들고 있던 칼로 찌른 모양입니다.”
조필웅은 코트와 우산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그래서요, 범인은 잡았대요?”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요. 경찰이 출동해서 바로 잡았답니다.”
“잘됐네요! 뭐 하는 놈이랍니까?”
“그게…….”
갑자기 주 계장은 우물쭈물하며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답답함을 느끼며 옆의 책상을 탁탁 내리쳤다.
“아니, 뭔데요? 안다는 거에요, 모른다는 거에요?”
“그게, 저, 아는 놈입니다. 영감님도 아시는.”
“제가 안다구요?”
“얼마 전에 추가 증거 신청 안하셔서 1심에서 무죄 선고 받고 풀려난 놈 있지 않습니까?
그 놈이 풀려나와서는 며칠만에 또 저지른 것 같습니다.
원래는 빈 가게만 털던 놈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몇 번 반복되고 처벌도 피해가다 보니 더 대담해진 모양입니다.”
그 후로도 주 계장은 경찰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풀어 놓았다.
필웅은 충격을 받았다. 그 뒤 주계장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뭐? 그 놈이라고?’
그래봤자 잡범이라고 생각했다. 필웅은 그가 사람을 해치지도 않았고 절도 금액도 모두 돌려줬으니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용도 용서도 아닌 나태함일 뿐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처벌받지 않으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거나, 자신은 처벌을 비껴갈 수 있다는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히고 만다.
필웅이 담당했던 소매치기는 매번 무언가 괴상한 요행으로 혐의가 벗겨졌었다. 증인이 증언을 번복하거나 필웅처럼 사건을 담당한 검사의 어이없는 실수로 처벌의 그물에서 달아났었다.
이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자 그 소매치기는 자신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결과로 저항하는 피해자를 찌르고는 피해자가 들고 있던 돈을 빼앗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손에 쥔 것은 고작 2만 3천원이었다.
‘개과천선이라고? 이런 빌어먹을!’
필웅은 힘없이 자리에 앉아 띄엄띄엄 듣게 된 사건의 경위를 떠올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필웅은 자책했다. 자신이 그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나중에라도 바로잡을 생각을 했더라면 토스트집 아줌마는 무사했을 것이다.
필웅은 그 사건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필웅은 검사실에 앉아 하루종일 기계적으로 서류들을 검토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는 옆에서 졸고 있는 주 계장을 바라보았다.
“주 계장님!”
주 계장은 깜짝 놀라 허리를 펴고 앉았다.
“예!?”
“아침에 그 토스트집 사건 있잖아요. 그 피해자 분 어디에 입원했답니까?”
“아, 그거요? 역 앞에 성신병원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다행히도 상처가 깊지는 않았는지 오늘 오후에 깨어났다고는 들었습니다.”
“그, 그래요? 잘됐네요. 전 퇴근할 테니까 계장님도 퇴근하세요.”
“예, 예.”
조필웅은 서류가방을 집어들고 미처 보지 못한 기록들을 쑤셔넣고는 급히 일어섰다.
같은 날 저녁 성신 병원.
이미 면회 시간도 끝나 복도에는 당직을 서는 간호사 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복도의 불도 몇 개만 빼고는 꺼져 있는 상태였다.
그 날 병원에서 당직을 서던 간호사는 누군가가 몸을 낮춰 복도로 통하는 문 쪽으로 엉금엉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세요?”
간호사의 목소리를 듣자 그 사람은 복도 반대로 잽싸게 뛰어갔다.
그녀는 그 사람이 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근처를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칼에 찔려 입원한 환자의 병실 앞에 못 보던 과일바구니가 놓여 있던 것이다.
과일바구니 안에 놓여진 작은 메모지엔 다섯글자만이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