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필웅 검사? 이게 나라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야단스런 여자의 목소리에 ’필웅’은 정신이 확 깼다.
점점 스스로의 인식이 영전보다는 필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한 켠에 던져 놓은 보따리들을 들고 와 평상 위에 풀어놓았다. 반찬꾸러미와 영양제 등 이런저런 약품들이었다.
조필웅은 빤히 여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다소 민망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남자 혼자 살면서 얼마나 안 챙겨먹으면 폐병이 걸려!? 무슨 일제시대도 아니고. 그냥 밥 먹을 때 하나씩 먹으라고 남은 돈으로 몇 개 산거야.”
‘그래서 쳐다본 건 아닌데.’
필웅이 그녀를 쳐다본 것은 아직 그녀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 다른 기억들이 머릿 속에서 계속 충돌을 하고 있었다.
나영전과 조필웅의 기억이 뭔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조필웅은 정시연이 가져온 것들 중 보약 비스무리한 것이 담긴 엑기스 팩을 빨았다.
‘아니, 왜 하필 정시연이냐고.’
정시연은 조필웅의 동기였다. 지금은 1998년. 나영전이 살던 시대보다 자그마치 20년도 전이다. 나영전 시대에서는 나이 지긋한 파트너 변호사 정시연의 파릇파릇한 신입검사시절이었다.
“후.”
조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조필웅 눈치만 보고 있던 정시연은 움찔하고 놀랐다.
“맛 없지? 보약이 그렇지 뭐. 그래도 열심히 마셔야 돼.”
조필웅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 정시연은 분명 미인이었다. 나영전이 기억하던 생기 없고 초점 흐린 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 특유의 반짝거리고 깊은 눈이 눈에 들어왔고,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한 뽀얀 피부는 20대답게 티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나영전이 기억하는 혐오스런 정시연의 모습도 얼굴에 겹쳐졌다. 그 감정이 떠오르자 조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은전차사 이 자식! 데려와도 꼭 이런 곳에! 이런 인간 옆에!’
어두워진 조필웅의 표정을 보자 정시연은 왠지 불안해졌다.
‘왜 그러지? 투병생활을 해서 그런가, 평소 조필웅이랑은 좀 다른데.’
조필웅은 갑자기 싸늘하게 말했다.
“근데 왜 반말이냐?”
정시연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조필웅을 바라보았다.
“뭐? 우리 임용될 때 말 놓기로 했잖아. 오빠 소리 듣고 싶어?”
‘내가 나이가 많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런 얘기를 한 줄은 몰랐네.’
아직도 조필웅의 기억이 완전히 들어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괜히 말실수하지 않으려면 입조심해야겠군.’
“아, 아니야. 내가 요즘 아파서 그런지 정신이 없네!”
필웅은 멋쩍게 대답하고는 이미 다 마시고 없는 애꿎은 보약만 계속 빨아댔다.
“싱겁긴.”
시연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옥탑방 너머로 보이는 낡은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다, 우리가 지켜줄 사람들이네.”
“뭐?”
“여기 사람들. 여기 사람들이 안심하고 학교도 가고, 시장도 가고, 밥도 먹고,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거. 그게 우리 일이잖아. 오다가 애들이 뛰어 노는 모습,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 사람들이 가득한 시장의 모습을 봤어.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이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내가 검사가 된 거였지 싶더라.”
조필웅은 뭔 소린가 하고 정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시연은 좋은 날씨에 취했는지 평상에 앉아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 맞다.”
정시연이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조필웅을 돌아보았다.
“이규필 부장님이 너 엄청 걱정하셨어. 요새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나보고 가보라고 하시던데? 아, 물론 안 시키셔도 한 번은 와보려고 하긴 했는데…!”
정시연은 갑자기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규필 부장? 혹시 그 이규필?’
이규필은 나영전이 살던 시대에 검찰총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나영전이 죽던 날. 술에 취해 돌아오던 골목길에서 한창 들려오던 신임 검찰총장 이규필에 대한 뉴스들이 다시 기억났다.
‘사고에 휘말려 1998년으로 돌아왔는데, 동기는 내가 극혐하는 선배에, 상사는 미래의 검찰총장이라니! 이럴 수가 있나?’
조필웅은 혼란스러웠다.
‘은전차사 이 자식! 날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희한한 곳으로 데려온 거 아니야?’
조필웅은 혼자 속으로 투덜대다가 갑자기 머리가 번뜩였다.
‘잠깐만. 내 상사가 미래에 검찰총장이 되는 거잖아. 이거 잘만하면 이 곳에서 보낼 시간들이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
검찰조직은 예나 지금이나 라인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조필웅은 조직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규필 라인만 잘타면 검찰의 수뇌부라는 권력의 정점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수 있을 터였다.
은전차사의 일처리가 뭔가 미숙하다고 느낀 그는 왠지 이 세계에서 꽤 오랜 시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이 시대에서는 남들이 전혀 모르는 미래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미래의 기억을 이용하면 여기서 어쩌면 초고속 승진도 가능하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는데?’
문득 투자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대출 다 땡겨서 강남 부동산이나 살까?
아 비트코인은? 아직 여기는 비트코인은 없겠군.
삼성전자나 SK텔레콤 이런 주식을 사둘까.’
조필웅은 혼자서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투자하고 기다리는데 은전차사가 갑자기 미래로 다시 데려가면 다 의미 없잖아!’
조필웅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정시연은 그런 조필웅을 보면서 걱정이 됐다.
‘아 아직 몸이 아픈건가? 정신이 뭔가 오락가락하는 거 같은데.’
짝!
정시연은 조필웅의 정신이 바짝 들도록 세게 박수를 쳤다.
“정신 좀 차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정시연은 조필웅 눈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아, 깜짝이야!”
조필웅은 갑자기 치고 들어온 정시연을 가볍게 밀쳤다.
시연이 여전히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다 말했다.
“몸 괜찮아졌으면 부장님께 전화라도 드려 봐. 이번에 PCS폰인가? 새로 사셨다는데 진짜 신기하더라! 이제 시티폰 들고 공중전화박스 안 찾아도 된다구!”
조필웅은 처음에는 그게 뭐가 신기한가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1998년은 스마트폰은커녕 초창기의 핸드폰, 즉 PCS폰도 희귀한 시절이었다.
필웅은 비로소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부장님 전화번호나 알려줘.”
“알았어! 부장님께 좀 살갑게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을지도 말씀드리고.”
정시연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를 꺼내서 조필웅에게 건네고는 일어섰다.
“나 그럼 먼저 가볼게.”
“응, 조심히 들어가.”
정시연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쭈뼛대다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조필웅은 평상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이규필이라.’
조필웅은 왠지 이 곳에서의 삶이 재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필웅은 고장난 집 전화 대신 공중전화를 찾아가 공손하게 이규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규필 부장은 편하게 쉬다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하라고 유쾌한 어투로 말했다. 필웅은 그래도 내일부터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 * *
다음 날.
필웅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당당한 발걸음으로 검찰청사에 들어섰다.
그를 알아본 계장들과 검사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필웅도 겉으로는 미소를 띠고 인사를 받는 척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얼굴과 기억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검사로서 첫 출근길. 필웅은 왠지 긴장됐다. 혹시나 누가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며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선 조필웅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필웅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문을 열었다.
“영감님,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담당계장인 주현철이 반갑게 그를 알아보며 인사했다.
계장 주현철. 40대에 막 접어든 유부남으로 일적인 면이나 인간관계 면에서도 무난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외모도 누구나 좋아할 만한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래 예전에는 검사를 영감이라 했지. 이 사람 성격은 좋지만 특출난 건 없어 보이네.’
필웅은 짤막하게 그에 대한 평가를 마치고, 겉으로는 반갑게 손을 맞잡고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필웅은 자리에 앉아 배당된 사건들을 훑어보았다. 스윽 보니 전부 평범한 사건들이었다.
굳이 검찰까지 올라오지 않고 즉결심판에 처했어도 될 법한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사건들은 그냥 즉결심판으로 처리하면 되지, 뭘 기소까지 하라고 올려보낸 거야?’
필웅은 짜증을 느끼며 거칠게 기록을 휙휙 넘겼다.
뭔가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했다.
그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이름을 알릴 수 있을 만한 사건.
그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이규필의 눈에 들 수 있는 사건.
그런 사건을 맡을 수만 있다면 이규필의 오른팔이 되어 검찰의 정점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20년을 머문다면?’
이규필을 보좌만 할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의 후계자가 되어 후임 검찰총장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20년을 여기서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저, 영감님?”
주현철이 넋이 나간 듯 실실대고 있는 조필웅에게 다가왔다.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예. 다녀오세요.”
벌써 열두시였다.
조필웅도 슬슬 밥을 먹으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출근했네?”
정시연이었다. 시연은 조필웅을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시연은 그러다 이내 자신이 너무 들떠 보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정색하고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크흠!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야지.”
“네가 상사도 아닌데 보고를 해야 되냐.”
조필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필웅은 정시연의 말을 자르며 외투를 집어들었다.
사실 그로서도 정시연을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남부지검에서 유일한 동기이자 같은 학교 출신인 정시연은 필웅에게는 여동생 같은 애틋한 존재였다.
단지 나영전으로서 정시연을 혐오하던 기억들이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 필웅으로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조필웅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졸래졸래 따라오는 정시연을 돌아보았다.
* * *
“계장님, 잠깐 저 좀 보실래요?”
점심을 먹고 돌아와 자리에 앉은 조필웅은 주현철 계장을 불렀다.
“지금 배당된 사건들, 경중에 따라서 분류 한 번만 해주세요.”
“아, 예.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각 봐서 징역형 나올 만한 것들만 이쪽으로 모아 주시구요. 벌금형이나 불기소처분 내릴 만한 것들은 저쪽으로 모아 주세요.”
“예? 하지만 법정형 찾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자유형으로 갈지 벌금형으로 갈지는 영감님께서 결정하셔야…….”
주현철이 난감해하자 조필웅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에이, 계장님도 짬이 몇 년인데 대충 보면 각 나오시잖아요? 제가 좀 쉬다 나와서 사건이 눈에 안 익어서 그래요. 오늘 저녁까지 좀 부탁드릴게요.”
“오늘 저녁이요?”
“예, 대신 다른 새로운 사건은 안 드릴 테니까 이것만 처리해 주세요.”
조필웅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툭툭 치며 말했다. 건수로만 따지면 10개는 넘어 보이는 사건들이었다.
“아, 예. 잘 알겠습니다.”
‘아~ 영감님, 오늘 좀 이상한데~’
주 계장은 필웅의 눈치를 보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자신의 자리로 들어 옮겼다.
‘대충 무거운 사건들만 좀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 사건들은 뭉게거나 그냥 불기소하면 되겠지?
어차피 뭐가 됐든 다 중요한 사건들도 아니잖아?
절도범이나 그깟 성추행범 좀 덜 잡아 넣었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필웅은 책상에 놓인 잔을 들어 녹차를 한 입 머금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녹차의 맛은 쌉쌀하면서도 왠지 감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