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실수를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래. 그리고 네가 다른 날도 아닌 2056년 3월 15일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잉?”
은전차사는 근엄하게 서류 뭉치를 넘기며 말을 잇다가 갑자기 멈췄다. 그러더니 서류 중 한 페이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당최 알 수 없었던 나영전은 그저 은전차사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 무슨 일입니까?”
은전차사는 나영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나영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음, 저, 그게. 이게 뭐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착오가 있었나봐. 네가 죽을 시기가 아닌데 잘못 데리고 왔나보네.”
은전차사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고요? 그럼 내가 지금 죽을 게 아닌데 여기 왔다는 거라고요?”
나영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영전은 당장이라도 저승사자의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들 일을 뭐 이따위로 하는 거야!? 으아아아오!!”
나영전은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구르고 주변의 책들을 집어 던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온갖 기물을 때려 부수던 나영전은 비로소 은전차사를 휙 돌아보았다.
“당신!”
“?”
“이제 어떡할 거야, 어!?”
나영전은 이제 완전히 위치가 역전되어 버린 은전차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책임져.”
“내가? 하지만 다시 돌려보내는 건 이미 내 권한 밖이라니까.”
“그러면 염라대왕이라도 불러줘.”
은전차사는 경악하면서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대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당신, 제정신이야? 영혼이 사자의 집무실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린 것과 난동을 부린 이유를 알게 되면 나나 당신이나 끝장이야. 아예 영혼을 소멸시키실지도 모른다고!”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방법을 좀 알아볼 테니까.”
은전차사는 소맷자락에서 헤드셋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약 5분동안 예, 예 소리와 함께 뭔가를 받아 적기만 하던 은전차사는 전화를 끊고는 나영전을 불렀다.
“음,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은전차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흔한 케이스는 아닌데 가끔 이런 일이 있기는 있나 보더라고. 자, 이제 네 영혼을 잠시 이승에 있는 ‘그릇’에 담아 둘거야.
원칙적으로는 죽어야 하는 몸인데, 잠깐 그 몸을 빌려서 네 영혼을 담아 두는 거지.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었으니까 영혼이 겹치거나 할 일도 없고. 그 동안 내가 방법을 알아보지.”
나영전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얼마나 있어야 하는거야?”
“글쎄? 빠르면 며칠일 수도 있고, 길면 한 20년?”
“뭐? 20년이라니!? 야!”
은전차사는 씩 웃었다.
“아니, 그거야 뭐 최악의 상황일 때의 얘기고.
준비가 다 되면 부를 테니까 걱정 마. 이미 너와 비슷한 인간으로 구해 놨으니까.”
은전차사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잇지 못하는 나영전을 툭하고 밀었다.
나영전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고, 뒤에 바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뭐, 으아아아아아!!”
나영전은 끊임없이 추락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 * *
영전은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조그만 방에 누워있었다.
‘꿈을 꾼건가?’
영전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러다 이내 거울을 찾아 얼굴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나영전이 아닌 좀 더 거친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뭐야?! 꿈이 아니잖아. 이거 진짜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잖아!”
흥분한 영전은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은전차사인가 하는 놈이 말한 대로 누군가의 몸에 ‘담아진’ 것인가?
이제까지 기억나는 사실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그러고 보니 은전차사에게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은전차사가 다짜고짜 자신을 텅 하고 밀어내는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나영전이 깨어난 방은 작고 낡은 옥탑방이었다.
‘비슷한 수준이라더니.’
나영전은 자신이 원래 살던 한강뷰의 오피스텔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영전은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남자가 곧 죽을 운명이었단 말이지.’
생각에 잠겨 있던 영전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깨어진 댐을 통해 성난 물결이 몰아치듯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노도처럼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조필웅. 내 이름은 조필웅이다.’
나영전은 문득 자신의 이름을 깨달았다.
‘이렇게 이 사람의 기억을 집어넣어주는 건가?’
그가 깨닫게 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필웅의 기억에 관한 그 모든 것이 점차 자신의 기억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의 몸이지만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된 것이다.
나영전은 조필웅의 기억들을 하나씩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조필웅은 작년에 임용된 초임 검사로서 서울남부지검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필웅은 나름 정의감에 불타는 인물이다. 다만 아직 주목받는 큰 사건이나 특별한 사건을 맡아 보지는 못했으나 별다른 불만은 없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에게 응당의 벌을 받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인물이었다.
‘고리타분한 사람이구먼!‘
나영전은 조필웅을 비웃었지만 부러운 감정도 든 게 사실이었다.
물론 사시를 준비하던 시절 나영전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대형로펌에서 근무하면서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달랐다. 돈이 많아 스스로를 방어할 줄 알면 벌을 적게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할 뿐이다.
‘나도 처음에는 당신과 같았다고, 하지만 현실은…….’
나영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미 변해버린 자신이 우스워졌다.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찜찜한 기분은 이어졌다.
‘이제 내가 그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가 된 거란 거지?’
그렇게 조필웅의 기억을 감상하던 나영전은 순간 소스라쳤다.
조필웅의 기억 속에, 지금은 1998년이었다.
‘1998년이라니?!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시대로는 보내줘야 할 것 아냐!’
나영전은 답답함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영전은 그대로 이부자리 위에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영전이 초조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다.
순간 은전차사의 말이 생각났다.
‘빠르면 며칠일 수도 있고, 길면 한 20년?’
‘설마 진짜 20년 걸리는 거 아니야?’
짝!
나영전은 양 손으로 자기 빰을 세게 후려쳤다.
‘정신차리자! 어차피 이 곳에 온 거 어떻게든 버텨야 해!’
생각을 정리한 나영전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초라한 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던 나영전은, 방 안에 널부러진 옷 중에서 바람막이를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을 나가니 바로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길다란 화분 몇 개에 다 죽어가는 나팔꽃이며 수세미 같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나영전은 갑작스런 공허감을 느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검사와 변호사는 서로 지향하는 길이 달랐다.
‘원래 꿈은 검사이긴 했지만.’
영전은 마치 사시를 패스하고 다시 출발선에 선 느낌이었다.
‘일단 지금 상황에 익숙해져야겠군.’
영전에게 조필웅의 기억이 한꺼번에 다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번뜩 번뜩 기억들이 밀려들어왔다.
영전은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옥상에 놓여진 평상에 걸터앉았다.
‘혼자 쓰기엔 좀 크네.’
평상에서 일어난 나영전은 갑자기 양 손 무겁게 무언가를 들고 헥헥거리며 옥상에 올라오는 한 여자와 마주쳤다.
‘누구지?’
많아 봐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봄날씨에 어울리게 청바지에 하얀 니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 정도까지 내려오는 다듬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보니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드리워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이목구비는 나름 미인이라고 할 법한 얼굴이었다.
나영전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인상을 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여자는 그가 옥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잠시 멈춰섰다. 그러고는 옥상 한켠에 들고 있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다.
“너 괜찮아?”
여자는 다짜고짜 두 손으로 나영전, 아니 조필웅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조필웅의 눈을 벌려 보고, 입을 벌려 안을 살펴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조필웅이 짜증을 내려는 찰나 여자가 조금씩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서 돌아다녀도 돼? 난 네가 정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전화는 왜 안 됐던 거야!”
이 여자에 대한 기억은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조필웅은 눈 앞의 여자가 분명 낯이 익다고 느끼면서도 정확히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잠시 조필웅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민망해졌는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나서는 민망한 듯 갑자기 쏘아붙였다.
“야!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빨리 보고를 해야 될 것 아냐! 지금 부장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 줄 알아?”
조필웅은 멍하니 듣고 있다가 자신이 잠시 휴직을 하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지병인 폐질환이 갑자기 악화되어 휴직을 신청한 상태였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쯤 폐질환이 악화되어 죽었어야 했던 건가.’
당장은 몸이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은전차사가 이 사람마저 죽으면 안되니 일단 몸을 고쳐놓은 건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대는 달랐지만 이승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또 저승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조필웅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점점 나영전도 스스로를 조필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영전이 아닌 필웅으로 기억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으로 인식해가는 그 감정은 다소 불쾌하긴 했지만 나름 신선했다.
그 때, 갑자기 머리를 한방 맞은 듯한 느낌이 들더니 여자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졌다.
“정시연?”
정시연은 이상하다는 듯 꺼내 놓은 물건들을 정리하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나영전, 아니 조필웅은 경악했다.
‘법무법인 진화의 파트너 변호사! 일은 안하고 피부과만 다니던 그 변호사! 그 변호사가 너라고?!’
정시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고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졌다.
“아, 화장 안해서 그런거야? 오늘 좀 대충하기는 했는데. 아니 그래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거든?!”
잠시 당황한 것 같았던 그녀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발끈해서 쏘아붙혔다.
조필웅은 왜 기억이 충돌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지 마침내 깨달았다.
나영전이 혐오하던 파트너 변호사 정시연이 지금 조필웅의 눈 앞에 더 젊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필웅은 정시연의 얼굴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하지만 얇은 눈썹, 똘망똘망한 눈.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까지!
진짜 정시연이 확실했다.
충격을 받은 조필웅은 정시연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필웅은 머리를 감싸쥐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왜 당신을 여기서 또 만나야 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