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THE END
하나….
둘….
셋….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꺼져가는 의식을 살리려 억지로 숫자를 셌다. 하지만 이내 의식이 사라졌다.
다시 처음부터
하나….
둘….
셋….
의미없는 반복이었다. 난 이미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멈춰가고 있었고
나의 혈관은 차가워졌고
나의 눈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문득 시끄러워졌다. 눈 앞의 모든 것들이 거친 소음과 함께 나의 감각을 괴롭히고 있었다.
팔을 들 힘조차 없었다. 간신히 손목만을 움직여 핸드폰을 찾아보려 했다. 힘없는 내 손이 마치 거미처럼 움직여 간신히 앞섶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힘없는 거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밑으로 떨어졌다.
“후우.”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손을 가슴 앞으로 기도하듯 모았다.
인적이 드문 이 골목. 나는 이 곳이 내 삶의 마지막 장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제길.”
이런 비극적인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다. 병원 1인실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문득 피곤해졌다. 사실은 피곤해진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 다가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죽어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나.
가슴에서 터져나온 피의 분수는 바닥에 누운 내 온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흥건해진 물침대에 누웠는데 물침대에 구멍이 나서 서서히 잠겨가는 기분이다.
눈도 또 자꾸 감겨온다. 이렇게 내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나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정했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의 사정을 일일이 다 고려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라니.
난 조심스럽게 손을 하늘로 뻗었다. 나에게 죽음을 내린 하늘의 판결에 이의를 신청하고 싶었다.
그때,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여기! 사람이 죽어가요!”
이내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 싸이렌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든다. 난 그에게 힘없이 말했다.
“아저씨……. 너무 늦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나는 죽었다.
그런데…
분명 죽었는데 여긴 어디지?
1화 지금 내가 죽었단 말입니까?
“나변, 지금 나랑 장난해?”
40대 후반의 나이치고는 고운 피부를 지닌 여성이 손톱을 다듬으며 짜증을 냈다.
‘휴우.’
한국 최고의 로펌인 법무법인 진화의 변호사 나영전은 대책없는 이 여성의 채근질에 머리가 아파왔다.
나영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조용히 이 고객에게 응대했다.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구조에 따르면 자금 지급 과정에서 한국은행에 신고가 필요한데…….”
“신고가 필요하면 하면 되잖아! 그러라고 당신들 돈 받는 거 아니야?!”
“사장님, 한국은행 신고는 저희가 한다고 그냥 다 받아 주는 게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아무나 해서 되는 신고면 내가 했지, 비싼 돈 주고 변호사를 샀겠냐고! 지금 말대답하는거야?”
나영전은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눈 앞의 고객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 가문 삼영그룹의 3세인 강유라다. 그녀는 히스테리로 업계에서 악명이 높았다.
이제 곧 50을 바라보는 노처녀. 나이만큼이나 히스테리도 농후했다.
그런 그녀를 변호사 업계에서는 ‘삼영의 마녀’라 불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혹했다가 성격에 뜨악하는 변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삼영의 마녀는 나영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방금 막 다듬은 듯한 손톱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나영전은 자신을 고객과 단둘이 던져 놓고 먼저 도망간 파트너 변호사를 향해 다시금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시연!’
진화의 파트너 변호사 정시연. 사실 이 회의는 그녀가 주관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은 피부과 예약이 있다며 도망가버렸다. 나영전만을 회의실에 몰아넣은 채.
‘도대체 뭐하는 여자야?’
그린 듯 진하지만 얇은 눈썹과 눈물점 때문에 왠지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정시연은 한때 잘나가던 검사였다.
그러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검찰조직에서 나와 이 로펌에 입사한 후부터는 무슨 사건을 하든 아무런 의욕이 없어 보였다.
로펌에서는 자신의 일을 미루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 변호사였다.
아무리 상사라고 하지만 나영전은 그런 정시연이 혐오스러웠다. 그렇다고 딱히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로펌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파트너 변호사들의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후, 조금만 더 참자.’
나영전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눈 앞의 고객에게는 자본주의의 미소를 날렸다.
“어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저희가 꼭 계획 중이신 사업에 차질 없이 진행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영의 마녀는 흘긋 그를 쳐다보고는 그렇게 나왔어야지 하는 듯한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좋아. 나 가볼 테니까 정시연 변호사한테 안부나 전해줘.”
“예, 잘 알겠습니다.”
나영전은 그녀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나영전은 저런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현실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꿈을 위해 이런 치욕 따위는 이겨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 지금은 내가 고개를 숙여주마.’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정시연이 나타났다.
“아, 변호사님.”
정시연은 조금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나영전을 흘긋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후, 나변. 바보야?”
“예?”
“방금 로비에서 강 사장님 만났는데 컴플레인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바보도 아니고 그냥 예예만 하면 되는 걸 왜 못해?”
“예? 아니, 그게, 저.”
“너같은 변호사들은 그냥 의뢰인한테 굽신거리는게 본업 아니야?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해?”
“…죄송합니다.”
“됐다, 됐어. 공직에 안 있어본 애들은 이게 문제야. 뭘 시키면 딱부러지게 해 오는 맛이 없다니까?”
나영전은 정시연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뭐? 검사 출신이면 다야? 자기는 검사시절에도 놀고먹기나 했을 거면서...!’
나영전이 침묵하자, 정시연은 다시 못마땅하다는 듯 차갑게 그를 흘겨보면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나 저녁에 약속 있으니까 나변이 대충 마무리해서 내보내. 제발 좀 똑바로 좀 하자!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정시연은 자기가 할 말만 쏟아내더니 또각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자신의 사무실 방향으로 사라졌다.
‘하, 참자, 참아!!’
나영전은 울분을 참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오후의 재판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나영전은 재판을 마치고 의뢰인인 신 회장과 함께 진탕 술을 마신 후 집에 가고 있었다.
전형적인 회장님 사건이었다. 신 회장의 공장에서 오염물질이 나왔고, 근처 마을의 사람들이 그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주장한 사건이었다.
영전은 법정에서의 소란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시골 사람들은 법률이라고는 하나도 몰랐다. 제대로 된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었다. 그저 법정에 나와서 악다구니를 쓰는 게 다였다.
그런 그들에게 영전은 법률가의 쓴 맛을 보여주었다. 원고인 마을 사람들은 분통이 터져 했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법정에서 본 어린 소녀. 그 어린 소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계속 기억을 맴돌았다.
어린 소녀의 얼굴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창백했다. 이따금 이유 없이 코피도 흘렸다. 할아버지인 듯한 초로의 남자는 자신의 딸도 병에 걸려 죽고, 손녀인 아이도 신 회장의 공장에서 나온 오염물질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했다.
‘뭐, 주장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
영전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껄끄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술집들에 놓인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신임 검찰총장이 된 이규필 검사는……”
이규필이라는 검사가 검찰총장이 됐다는 뉴스였다.
‘나도 검찰총장이 꿈이였는데.’
대학교 때,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나영전의 목표는 검찰총장이었다.
연수원에서도 칼잡이 검사의 꿈을 키워갔었지만 법무법인 ‘진화’의 유혹은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진화’가 나영전을 데려가기 위해 제시한 금액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검사가 되고자 했던 나영전의 꿈은 그렇게 돈의 유혹 앞에서 쉽게 무너졌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나영전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쭈욱 빠졌다.
주저 앉은 나영전은,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눈앞의 전봇대를 부여잡았다.
너무 많이 마셨다. 식사 자리에서 신 회장이 권하는 술을 연거푸 받아 마시다보니 평소의 주량을 완전히 넘어섰다.
“우웨엑~”
나영전은 전봇대를 부여잡고 한참을 토했다. 토를 하니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온 듯 했다.
여전히 소녀의 눈빛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나영전은 애써 무시하려 했다.
나영전은 잠시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여기서 누워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술에 취해 널부려져 있다간 강도나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곳에서 잘 순 없지.’
나영전은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땅이 자꾸 나영전에게 다가왔다.
땅은 자꾸만 나영전에게 다가오더니 급기야 그의 왼쪽 뺨에 입을 맞췄다.
‘난 이렇게 너무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해 오는 것들은 좋아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나영전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거칠게 땅을 밀었다.
하지만 취한 상태에서 팔힘만으로는 중력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만 뼈아프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나영전은 땅과 두 번째로 키스했다.
“으아아아아!”
나영전은 짜증과 분노, 취기 그리고 알 수 없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을 외침에 넣어 내뱉었다.
“다, 당신. 나 기억하지?”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나영전은 간신히 옆에 선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고개를 돌렸다.
“누구시죠?”
나영전은 비틀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남자를 제대로 쳐다보려 애썼다.
그는 바로 오늘 재판에서 소녀를 데리고 왔던 초로의 남자였다.
나영전은 다시 희미해지려고 하는 정신줄을 겨우 다잡으며 말했다.
“아~ 아까 재판, 장에서 뵀던 분이시군요?”
“당신, 다, 당장 이 재판에서 물러나!”
“네에?”
나영전은 정신을 부여잡고 이 남자에게 친절하게 설명이라는 것을 해주자 생각했다.
“저기요, 아저씨. 딱,한 사정은 이해는 가지만 어차피 끝난 판결이라고요. 딸꾹~ 아시겠어요? 지금 내가 물러나봤자 바뀌는 건 없다고요!”
나영전은 한편으로 그 남자가 짠하기도 했다.
억울할 만도 했다. 자식에 손녀까지 그렇게 되어버린 마당에 이 남자는 절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영전은 비틀비틀 거리며 이 남자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이렇게 나를 찾아와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시다 고요? 아시겠, 어요?”
그 때, 나영전은 그 남자의 손에 뭔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어, 저건.’
나영전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남자의 손을 응시했다.
“칼? 당, 당신, 뭐, 하려고?”
남자는 손에 칼을 쥔 채 아무말 없이 벌벌 떨고 있었다.
“당신, 내 딸이, 어떻게 병에 걸려 죽어갔는지 알기나 해?”
칼을 본 나영전은 술이 번쩍 깼다.
“잠시만, 잠시만요. 흥분하지 마시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러면 안된다고? 당신은 그렇게 법정에서 우리를 난도질 해놨는데, 난, 난 왜 이러면 안되는데?”
“아니 제가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칼을 든 남자는 나영전 앞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나영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를 말리려고 한걸음 내딛은 나영전은, 바닥에 튀어나온 무언가에 걸려 순간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나영전을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여전히 칼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 남자의 칼은 나영전의 가슴팍으로 꽂혔다.
남자는 당황해서 재빨리 칼을 빼고 뒷걸음질쳤다.
“아니, 내가 찌르려고, 한 게…….”
나영전의 가슴에서는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안돼.”
당황한 남자는 나영전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솟구치는 피를 본 남자는 이내 두려움에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치던 남자는 이내 나영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영전은 힘없이 쓰려졌다.
그렇게…
그렇게…
나영전은 죽었다.
* * *
[영전아~ 영전아~]
나영전은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전은 힘들게 눈을 떴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려 했지만 눈 앞은 캄캄할 뿐이었다.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영전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깼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나영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나영전은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검은 흑발에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눈에 띄는 귀여운 얼굴의 앳된 소년이었다. 나이는 많아봐야 13살정도 되어보였다.
아이는 하얀 드레스셔츠에 검은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바지의 주머니에서는 은색 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외모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피가 섞인 혼혈 같았다.
소년은 소맷단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한 장씩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름은 나영전. 나이는 29세, 그리고 변호사구먼. 아 내가 변호사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앳된 외모와는 다른 소년의 중압감 있는 목소리에 나영전은 다소 위축되었다.
나영전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누구세요?”
소년은 당황한 듯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나영전은 뭔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뭐야? 해인차사가 얘기 안 해줬어?”
“해인, 뭐요? 대체 여기는 어딥니까?”
나영전은 자신 앞의 소년을 빤히 쳐다만 보았다.
“내 이름은 은전차사. 소위 말하는 저승사자지. 아까 말한 해인차사는 출장직이고 나는 사무직이야.
해인차사는 죽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나는 여기서 1차적으로 영혼들을 심사해서 재판에 넘기는 역할을 하는 거지.”
나영전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펄떡 뛰며 외쳤다.
“저승사자? 저승사자라구요!?”
“아이, 깜짝이야! 그렇다니까!”
은전차사는 나영전의 외침에 깜짝 놀라 곰방대를 떨어뜨렸다.
“그럼 제가 죽었단 말입니까!?”
검사로 개과천선
지은이 : 한림
제 공 :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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