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신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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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의 연락을 받음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엘리베이터를 탄 후, 5층의 청장실로 들어가자 청장 부속실장이 맞아주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이미 이야기를 들은 듯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실장을 지나쳐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문 너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고, 망설일 것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경감. 강민혁!”
심재준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경례를 올리자, 그가 환한 웃음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까닥임과 동시에 경례 중이던 손을 내렸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앉게. 차라도 한잔하지.”
심재준은 자연스럽게 청장실 내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고, 미리 준비된 다과를 사이에 둔 채 그와 마주 앉았다.
“...선물 받은 차인데 향이 괜찮다네. 사양 말고 들게나.”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찻잔을 채워주었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그를 보며 차를 홀짝였다.
차의 종류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였으나, 편안한 향에 내심 감탄하던 와중 그가 말을 걸어왔다.
“훌륭하게 해결했더군.”
“아, 예. 감사합니다.”
주어가 없는 말이었으나,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불법 대리 수술에 관한 사건 그리고 자신의 딸 심지현에 관한 이야기겠지.
곧바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하자,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바라보았다. 기쁜 듯 슬픔이 묻어나는 표정.
“자네가 이번에 해결한 이 사건. 사실 나는 이 사건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네.”
“...”
심재준은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진지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내 딸이 피해자인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었지. 범인을 잡겠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무식하게 달려들었었네.”
“...”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흔적 하나도 찾을 수 없었어. 범인은커녕 제대로 된 용의자조차 특정해내지 못했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심재준이 행했을 행동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처럼 청장의 위치는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도 고위 간부급 인사라는 사실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딸이 피해자로 나온 사건.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해결해야 했을 것이 당연했다. 무슨 일을 저질러서라도 범인을 검거하고 싶어 했을 테지만.
“애초에 수사 방향이 틀렸던 거지···.”
심재준은 씁쓸한 듯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 어떤 사건보다 해결하고 하고 싶었던, 해결해야 했던 그런 사건이었지만, 실패했던 이유가 수사지휘관이었던 자신의 실수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네. 내 모든 경찰 인생을 걸고서라도 그 사건만은 해결하고 싶었어.”
“...”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미제사건팀을 만드는 것이었다네.”
“...”
“자네가 속한 미제사건팀은 사실 내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팀이었네.”
심재준은 나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인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팀을 만들었고, 사실 너는 그것을 위해 나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러한 것이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랬었군요.”
그가 나를 장기 말로 이용했다는 사실에 억울하거나 분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심재준의 목적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에게 접근한 것이었고, 미제사건팀에 합류했다. 나 또한 내 목적을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게 전부인가? 자네가 모든 노력, 열정을 쏟았던 그 팀이 사실은 내 개인의 욕망을 위해 운영되었다는 뜻이네. 나를 질타하거나 욕을 해도 상관없네.”
심드렁한 반응이 이어지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설명이 이어졌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각자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이득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그를 원망하거나 나무랄 이유는 없었다.
“각자에게 사정이 있는 법이죠.”
모든 일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그것이 불법적인 행위도 아니었고, 결국은 미제사건을 해결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으로 이어졌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특별히 문제가 여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군.”
심재준은 한층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던 응어리를 해결한 모양이었으나 관심은 없었다.
“그럼, 저희 과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보다 궁금한 것은 미제사건수사과의 미래였다. 그가 말한 고백 아닌 고백처럼, 이 팀은 심지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었다.
그 목적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해결이 되었기에 앞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지금의 소속이 아니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팀원 그리고 동료들이 마음에 들었기에 과가 해체되는 건 반기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목표였을 뿐. 과는 그대로 유지될걸세.”
심재준은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챈 듯,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미제사건수사과는 이제 경찰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그리고 언론에서까지 주목하고 있네.”
“...”
“엄청난 성과를 갱신하고 있는 과를 해체할 이유야 없지. 처음 이 팀을 만들 땐 이렇게 되리라 상상조차 못 했다네···. 물론 전부 자네 덕분이지만 말이야.”
그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말한 대로 지금의 과는 처음과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없어질 위기부터 시작한 팀이었으나, 이제는 청사 내 그 어떤 수사팀보다 월등한 성과를 기록해내고 있었다.
비단, 서울지방청 내에서 뿐만이 아닌 전국단위로 해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그러한 성과였다.
“과찬이십니다.”
그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강민혁 그 덕분이었다. 파죽지세로 해결해내는 사건 그리고 검거해내는 범인은 그 어떤 형사와 비교해보려 해도 대상이 없었다.
원탑 중에서도 원탑.
그의 존재만으로 범죄율이 낮아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가 지금껏 이뤄낸 성과는 가히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청장인 심재준으로서도 그런 그의 행보가 나빠 보일 리는 없었다. 자신의 숙원까지 이뤄준 그였기에 굴러들어온 복덕이 그 이상의 존재였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기특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심재준은 겸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흡족하게 웃어보았다.
“흠, 그보다 사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본론을 말할 작정인 듯 진지한 표정으로 화두를 열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강민혁 역시 비운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청장실까지 직접 불러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히 잡히지 않았다.
혹여나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건을 부탁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와중,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이어졌다.
“자네는 목표가 무엇인가?”
“...목표 말입니까?”
생각하기에 따라 뜬금없다 느껴지는 질문. 강민혁은 난데없이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오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심재준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목표라···.’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시점으로 보자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자신이었다.
당시에 느꼈던 부조리함. 사건을 해결하고 파헤치려 했지만, 계급 그리고 권력 따위의 압박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그랬기에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계급에 집착했고, 권력의 필요성을 느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냈다.
또한, 율촌 오거리사건과 연관된 수많은 의문, 이민재의 죽음부터 자신을 덮쳐온 불시의 기습까지. 이 사건 만큼은 심재준 그가 심지현 사건에 집착하듯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목표라고 한다면 목표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기에 선뜻 입을 열지 못한 것이었다.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결국, 압축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대답이 가장 적절했다. 누구에게도 압박받지 않고 원하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서는 것. 그것이 강민혁의 목표였다.
“허허허, 역시 그랬구먼. 야망이 있는 친구였어.”
심재준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온 듯 껄껄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자네의 목표가 청장까지 올라서는 거라 봐도 되겠는가?”
매우 직접적인 질문. 누군가 같은 질문하여온다면 웃으며 대답했을 그러한 물음이었으나. 물어오는 대상이 청장 그 자신이었다.
자신의 위치까지 올라서고 싶냐는 그 물음에 왠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고, 한번 고민하게 했다.
“예.”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짧은 한마디였으나, 진심이 느껴지는 그 대답에 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눈을 마주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도와주도록 하지.”
그냥 흘러가는 말이 아닌,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현직 경찰청장인 그가 직접 강민혁의 지원군이 되어주겠다 자청한 것이었다. 거절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제안이었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강민혁에게도 라인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강력한 빽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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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팀장, 다음 사건 나왔네.”
사건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곧바로 다음 사건이 배정되었다. 최재희 과장의 부름에 강민혁이 곧바로 달려갔고, 그에게서 뭉텅이의 사건들을 넘겨받았다.
수많은 사건 중, 적절한 사건을 골라내 팀원들에게 배정해주는 것이 그의 임무였기에 곧바로 그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하나 같이 미제사건이 어울릴만한 사건 중,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사건은 없어 보이네.’
익숙한 사건이란 결국, 알고 있는 사건을 뜻했다. 미래에서 이미 경험했던 사건이거나 뉴스와 같은 언론을 통해 접한 적이 있던 사건들.
꼼수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큰 사건을 빨리 해결해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사건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어? 잠깐만···. 이거···.”
그들 중 하나의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사건. 기억이 날 듯 말 듯 간질거리는 순간.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왜 미제사건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