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부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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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손이 맞닿는 순간, 그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동시에 생각해낸 키워드는 영업사원 한재현의 대리수술. 굳이 고민할 필요 없이 그것보다 직접적인 키워드는 없었다.
‘...’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기억은 한재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집도해야 할 수술실에 한재현을 불러들였고, 그에게 대리수술을 요구했다.
‘아무렇지 않게 수술을 맡겼어···.’
아무리 작은 수술이라 할지라도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전혀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처음에는 수술을 집도하는 그의 옆에 지켜서서 이것저것 지시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조차 행하지 않았다.
대리 수술의 규모는 점점 커졌지만, 그는 오히려 수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재현이 수술을 집도하는 동안 그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심지어 잠을 자는 때도 없지 않았다.
‘전문지식이 없는 한재현이 수술을 진행해도 곁에 있는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라···.’
수술실에는 그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닌, 간호사를 비롯한 전문의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익숙한 듯 한재현의 수술을 도와줄 뿐, 그저 침묵했다.
그것은 수술실 안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당시의 행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의료전문이 들이라면 오히려 더 심각하길 여길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사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 문제를 제기했을 때 생기는 불이익 때문이겠지.’
수술실에서의 갑과 을의 관계는 오로지 의사 신명호와 영업직원인 한재현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용건만 빨리 해결합시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뭡니까?”
강민혁이 한동안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신명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알겠습니다. 너무 시간 뺏지 않도록 하죠.”
한시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고, 그것은 강민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지금,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
질문한다고 하여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미리 인쇄해온 기사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강민혁이 오랜 시간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한재현의 폭로기사였다.
“아, 이거.”
신명호는 그 기사의 내용을 확인했지만,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히 헛소리죠. 오보입니다. 오보. 아직도 안 내려간 게 있었나 보네. 제가 연락해놓죠. 이것도 이제 곧 내려갈 겁니다.”
그의 태도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기사가 내려가리란 사실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강민혁은 애써 그의 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힘을 써뒀겠지···.’
아니, 그가 굳이 힘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한재현의 폭로기사가 사회적 논란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나 신명호의 개인적인 노력보다는 의사 협회의 힘이 더 컸다.
한재현의 폭로는 꽤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에게 갑의 권한을 이용해 수술을 대리하여 시키는 의사’ 단순히 신명호의 문제만이 아닌, 의사 전체의 권위가 무너지고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당연하게도 의사 협회가 그것을 두고 볼 리만은 없었고, 무엇보다 한재현의 폭로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기사를 낼 수 없었겠지.’
기사를 냈다고 해도 협회 차원에서 움직여 기사를 내리도록 했을 것이기에 사회적 논란이 될 수 없었다.
강민혁이 그 기사를 찾아냈던 건 어디까지나 운과 타이밍이 좋았을 뿐. 그나마도 조회 수가 없다시피 한 기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불법 대리수술을 진행한 적은 있습니까?”
강민혁은 그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저 형식적인 질문만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신명호는 그러한 사실을 전부 부정하는 대답을 쏟아냈다.
더 이 대화를 이어간다 해도 의미는 없을 터. 강민혁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 하나만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된 겁니까? 싱겁군요.”
강민혁이 자리를 끝맺으며 손을 건넸고, 신명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듯한 거만한 태도로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착각일 뿐. 강민혁은 그의 기억을 한 번 더 읽어냄과 동시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오, 그랬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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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팀장님, 요청하신 자료 찾아왔습니다.”
강민혁이 사무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이민재가 달려와 요청한 조사 결과물을 가지고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강민혁은 곧바로 그 자료를 훑어보며 내용을 확인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강민혁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고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자료와 한재현의 증언을 바탕으로 압수수색 영장 발부받으세요.”
“예? 하지만 수술실에 CCTV 같은 건···.”
“CCTV는 상관없습니다.”
“아, 예. 바로 요청하겠습니다.”
이민재는 강민혁의 요구가 의외인 듯 되물었지만, 확신에 가득 찬 대답에 더는 반문하지 않았다.
병원에 수술실에 CCTV가 없는 것은 당연했고, 대리수술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있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압수수색 영장은 정황상의 이유만 있으면 발부받는 것이 가능했다. 증거를 찾기 위한 과정이니 어찌 보면 당연할 터. 그것은 한재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이민재의 의문처럼, 지금 수많은 경찰이 들이닥친다고 하더라도 그에 관한 증거를 찾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강민혁 자신만은 예외였다.
압수수색을 통해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제는 증거를 찾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곳엔 반드시 증거가 있어.’
앞서 신명호의 기억을 통해 읽어낸 정보에 의하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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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강 팀장님. 저희 두 명으로 되겠습니까?”
신명호가 근무하는 병원 앞. 거대한 건물을 눈앞에 둔 채 이민재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그도 그럴 그것이 이번에 행동하는 인원은 그와 강민혁 단둘뿐. 별다른 추가 인원 없이 두 사람이 이 거대한 병원을 수색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럼요.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강민혁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신이 찾아야 할 증거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영장뿐이었다.
인원이 얼마가 되든 그것은 낭비일 뿐이었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들어가죠.”
강민혁은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병원으로 들어섰고, 이민재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프런트로 직행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프런트의 그녀가 무미건조하게 물어오는 사이, 곧바로 이민재가 압수 수색 영장을 꺼내 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 미제사건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법원에서 정식으로 발부받은 영장입니다. 확인해보시고, 지금부터 통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예? 아, 자 잠시만요.”
강민혁은 능숙하게 눈앞의 그녀에게 읊조렸고, 그녀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심하게 당황한 듯 보였다.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는 자리를 이탈하며 누군가에게 보고하려는 듯 뛰쳐나갔다.
“어, 저, 저기요.”
이민재는 순간 가버리는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소리쳤지만, 강민혁이 그를 제지했다.
“상관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어차피 그녀가 보고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했고, 지금에 와서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강민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민재는 뛰쳐나가며 병원 구석구석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증거가 될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낼 요량이었다.
강민혁 역시 그사이 병원 내부로 들어갔고, 기억 속에서 살펴봤던 길을 따라가던 와중, 누군가 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형사님.”
강민혁의 앞을 막아선 이는 신명호 그였고. 화가 단단히 난 듯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악물며 물어왔다.
“못 들으셨습니까? 압수수색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저번에 이야기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압수수색이라뇨.”
강민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고, 그것이 그를 자극한 듯 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려왔다.
“예, 이야기야 끝냈죠. 이제 해결하러 온 겁니다. 문제 있습니까?”
“병원을 뒤진다고 해서 찾아낼 건 없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면 형사님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신명호는 협박하듯 말을 건넸지만, 강민혁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말은 최후의 발악으로 보일 뿐.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고~맙습니다.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죠.”
강민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이내 주먹까지 움켜쥐며 부들대는 그를 스쳐지나 쳤다.
프런트 그리고 환자들이 대기하는 공간을 그대로 지나쳐 진료실로 향했고, 진료실 내부에 있는 신명호의 개인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 사이 신명호가 뒤따라와 강민혁의 뒤에 우두커니 멈춰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건 상관없겠죠.”
“좋으실 대로.”
신명호의 물음에 강민혁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가 자신을 따라왔다는 것은 결국 그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거와도 다름없었다.
강민혁은 그를 무시한 채 방안을 쭉 훑어보았고, 한쪽 벽에 놓인 그림에 시선이 멈췄다.
“예쁜 그림이군요. 값 좀 나가는 겁니까?”
“그, 그건···.”
강민혁은 곧장 그림 앞으로 다가가 그림을 만졌고, 신명호의 말소리가 들어옴과 동시에 그 그림을 떼어냈다.
“호오, 이런 곳에 금고가 있고. 비밀이 많으신가 봅니다?”
걸려있던 그림을 내려놓자 그 뒤에 나온 것은 아주 조그만 금고. 벽 안에 설치된 금고였다.
“쯧. 제가 병원에 오기 전부터 있던 금고입니다. 비밀번호 같은 건 저도 당연히 모르고요.”
신명호는 금고를 들킴과 동시에 그럴듯한 변명을 내뱉었다. 하지만 강민혁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의 발악이 우스울 뿐이었다.
강민혁 외에 다른 경찰이 이곳을 압수수색을 했을 경우,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을 거란 예상이 바로 이 금고 때문이었다.
비밀번호가 아닌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 물건이었고, 전문가를 동원한다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금고였다.
이 금고를 찾아낼 수는 있어도, 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고 그 사이 신명호가 증거를 인멸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강민혁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자신 있게 금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음, 여기 병원 설립 연도가···.”
능숙하게 번호를 누른 뒤, 걸쇠를 돌리자.
철컥.
금고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어, 어떻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명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