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의경 살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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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내용 전부 네 노트에 적어놓고, 전부 외우면 돼. 소대 생활부터 근무에 관한 내용이니 요령 피울 생각 말고.”
“예, 예. 알겠습니다.”
최원희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맞선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자잘한 규칙부터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사항을 교육했지만.
집중될 리가 있나.
“쟤가 신병이야?”
“서른 살이 넘었다는 데. 약사 출신이고.”
“와, 그럼 나이는 제일 많은데 막내야?”
두 사람은 소대의 한가운데 놓인 책상에 앉아있었고, 오가는 모든 소대원의 관심은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새로운 신병의 전입은 소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고, 독특한 이력을 가진 최원희의 등장은 단연 화젯거리였다.
“야, 당장 사팔부터 외우라고 시켜. 약사였다며. 금방 외우겠네.”
“예, 알겠습니다.”
“내일 내가 같이 근무 들어가서 테스트했는데, 하나라도 틀린다. 그럼 네가 죽는 거다.”
두 사람을 삥 둘러싼 소대원들은 그저 그의 옆에 있는 맞선임에만 한마디씩 던질 뿐. 최원희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들 어색해서 그래. 나 때도 그랬어. 너무 그렇게 얼어있지 마. 우선 이 페이지부터 외워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맞선임은 얼어있는 최원희를 보며 옛 생각이 떠오른 듯 웃으며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 쓰인 내용은.
[청장 – xxx가 xxxx 검은색 K7]
[1부장 – xxx가 xxxx 회색 K3]
[2부장···.]
차량 번호와 종류가 적혀있었다.
“저, 이건···.”
신병인 최원희는 당연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그에 관해 묻자 친절히 답해주었다.
“의경 교육센터에서 무전 음어는 배웠지?”
“예, 배웠습니다.”
“사팔지 가 뭐야.”
“현재 위치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최원희의 대답이 곧장 돌아오자 흡족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줄여서 사팔이라 불러. 내일 근무 들어가면 알게 될 텐데. 여기 적혀있는 건 청장부터 부장이 타는 차들. 외웠다가 이 차들 들어오면 바로 안전바 열고 경례하면 돼. 그다음에는 부서실에 연락 돌리면 되고. 그게 우리 주 업무라 보면 돼.”
최원희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해했으면, 빨리 외워. 웬만한 빡 대가리도 일주일 면 다 외우니까.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보통 사흘은 주는데, 왜 또 저 지랄인지는 모르겠네···.”
그리고 그는 소대의 눈치를 쓱 보더니 최원희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네가 약사 하다 왔다니까 저러는 것 같아. 조심해. 다들 멀쩡해 보여도 나사 빠진 놈들 한둘이 아니야. 자격지심 센 놈들도 마찬가지고.”
“예, 예. 알겠습니다.”
더불어 최원희 역시 소리 낮추며 대답했다.
그리고 몇 시간 째 그 자리에 앉아 차량 번호를 외우고 있을 무렵.
“소대장님, 근무 다녀왔습니다.”
누군가 이제 막 근무를 끝마친 듯, 소대장 자리에서 경례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맞선임이 툭 치며 또 한 번 속삭였다.
“저 새끼. 네가 제일 조심해야 할 새끼야.”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는 표정을 싹 바꾸며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현수 상경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신병 맞지? CCTV로 봤어.”
장현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겉옷을 던지며 다가와 앉았다.
맞선임은 자연스러운 듯 표정 하나 구기지 않은 채 옷을 정갈하게 개어 그의 침상에 올려두었다.
“반갑다? 약사 출신이라며?”
“이, 이경 최원희. 맞습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며 손을 내밀었고.
“부럽네. 나는 개 좆도 없는데.”
그것이 최원희와 장현수의 악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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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뭐야 누가 이따위로 가르쳤어? 약사였던 거 맞아? 개판이 따로 없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갈굼에 지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장현수는 항상 최원희 곁을 맴돌았고, 의경 생활이 처음인 그는 당연히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장현수의 직업인 ‘약사’를 걸고넘어졌다.
또한, 그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한마디.
“너 내가 고졸이라고 무시하냐?”
그의 이유 없는 괴롭힘은 다름 아닌 자격지심 때문.
대학 입시, 재수, 삼수까지 떨어지고 도피하듯 입대한 그는 능력 있는 신병이 올 때마다 이런 짓을 반복했고.
사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들어온 최원희가 들어오자 자격지심이 폭발하듯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최원희는 묵묵히 제 일에 집중했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앞으로 원희는 나랑 근무 같이 들어가자?”
최원희가 일경이 되고, 장현수가 상경 말 호봉이 됐을 때. 그의 괴롭힘은 점점 더 교활해지기 시작했다.
소대에서 상경 말 호봉이 되면, 근무 시간표를 짤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보통 수경들은 그들이 원하는 시간, 또는 가장 유동인구가 적은 시간대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대원들의 근무시간은 전부 장현수에 의해 결정됐다.
“예, 예. 알겠습니다.”
어찌 보면 수경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장현수의 말을 일경인 그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근무를 포함한 식사부터 여가까지 전부. 장현수는 최원희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야 담배 좀 줘봐라.”
“저. 담배 안 피웁니다.”
“...하. 내가 피자나 새끼야. 아 이 새끼 봐라. 약사였다며.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주, 주의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사놓겠습니다.”
“쯧. 어차피 돈 많잖아. 약사라며. 약사.”
더는 단순한 갈굼을 넘어 금전적인 피해까지 넘보기 시작함은 물론.
더욱 악질적으로 진화해 갔다.
“허허. 현수랑 원희는 매일 붙어 다니는구먼. 보기 좋아. 현수 이놈이 옛날부터 신병들을 잘 챙겨준다니까.”
“아이, 소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부끄럽습니다.”
남들에게는 그저 사이좋을 뿐,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이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소대장을 비롯한 같은 대원들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는 단둘이 있을 때만 은밀하게 괴롭힘을 유지했다.
“아, 이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괴롭힘은 점점 심해져, 기어코 손찌검하기에 이르렷다.
최원희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대 내 신고 시스템인 ‘마음의 소리’를 작성해 봤지만.
“야, 이거 네가 넣어놨냐?”
그조차도 아무 소용 없었다.
이미 소대는 장현수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고, 그에게서 피할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괴롭힘은 집요할 정도로 더욱 심해졌다.
욕설은 기본이며 구타, 금품 갈취, 폭행, 성추행까지.
이제는 참고 넘어가기엔 정도가 심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뭐 먹냐? 같이 좀 먹자.”
“이, 이거. 영양제입니다.”
“와, 역시 약사는 다르네. 이딴 것도 챙겨 먹고, 나도 먹자. 괜찮지?”
장현수는 그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에 들려있던 약통을 뺏어 들며 가져갔다.
그리고 최원희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이거다. 장현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약사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약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약을 구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약물들.’
최원희는 휴가를 나간 사이, 자신이 직접 고농축 카페인과 콜레스테롤이 든 알약을 제조했다.
그리고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표시한 뒤, 그것들을 영양제 통 안에 섞어놓았다.
“장현수 상경님, 영양제 드실 시간입니다.”
“어?”
“저번에 영양제 같이 먹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맞지. 줘봐.”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겨우 이걸로 사람이 죽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 요즘에 왜 이렇게 잠이 안 오지. 속도 쓰리고. 미치겠네.”
장현수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이제 전역이 가까워져서 고민이 많아지신 거 아닙니까?”
“그런가?”
“뭣하면 제가 불면증에 좋은 약이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있어? 그럼 줘봐. 아, 역시 약사라 다르네.”
그럴수록 최원희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확신하게 됐고, 그에게 더욱 많은 알약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어떤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전역이 가까워지기 시작한 장현수는 몸을 사리기 시작했고, 상경이 된 최원희에 대한 괴롭힘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원희는 도저히 그를 곱게 보내줄 수 없었다.
“이거 숙취 해소 약입니다. 오늘 친구분들이랑 전역 파티한다길래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오, 뭐 이런걸. 고맙다. 역시 약사가 다르긴 다르네.”
최원희는 장현수가 휴가를 떠나는 그 날. 기존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고농축 약물을 그에게 건넸다.
장현수는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이 숙취 해소 약이라고 믿었고, 밤샘 술자리 후 그것을 먹은 순간.
“구에에엑.”
몸이 이상했다.
심장이 너무나도 빨리 뛰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단순한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괴로움.
온몸의 피가 너무 빨리 도는 느낌에, 제대로 걷는 그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유추되는 것은.
“이 개 새···. 우우욱. 도대체 뭘 준거야?”
최원희가 건넨 알약.
그것 말고 의심되는 것은 없었다.
“내가···. 내가 죽여버릴 거야.”
장현수는 곧장 최원희에게 따지기 위해 소대로 향했다. 숨은 가빠지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 소대에 도착했지만,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술 냄새를 걱정했고, 전역을 앞둔 처지를 걱정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개구멍.
“그래, 최원희 그 새끼만. 잠깐 보고 나오자.”
소대장에 들켜 전역이 늦춰질 것을 걱정한 그는 소대에 몰래 들어가기로 한다.
개구멍을 통해 경찰청에 들어온 그는 CCTV를 피해 별관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왜 이렇게 숨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그 계단이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한 발짝 두 발짝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으윽. 허억.”
결국, 근무소대가 있는 3층까지 도착했지만,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잠깐만. 잠깐만 쉬었다 가자.”
복도에도 CCTV가 있는걸 아는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쉬었다 가기로 했고.
도착한 순간.
“억.”
심장마비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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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희 관물대가 어디야?”
강민혁이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 물었다. 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며 한 관물대를 가리켰다.
쿵. 쿵. 쿵.
강민혁은 곧장 그곳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당겼지만 잠겨있는 관물대.
쿵. 콰지직.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안전장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번 힘을 준 것만으로 관물대는 활짝 열렸고, 강민혁은 그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꺼내 든 것은 평범한 영양제 통.
어느새 자신의 뒤를 쫓아온 그를 보며 물었다.
“어때 최원희. 감식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