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있으므로 행복하기를
엑시스 호텔과 동물원을 잇는 통로가 된 차원문.
평소에는 수린이와 반려몬들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이곳이었지만, 오늘만은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이 됨으로써 반려몬 아이들은 몬스터 호텔에 맡겨 둔 상황.
“아니, 누가 결혼식장에 반려몬을 데려와?”
“아무리 요즘 사회가 반려몬에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결혼식장에까지 데려오는 건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냐?”
“조용히 말해. 다 들리겠어.”
“들리면 뭐 어때? 예의 없는 건 사실이잖아?”
차원문을 통과하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반려몬이 잠들어 있는 켄넬을 쥔 채 걷고 있는 노신사였다.
“연세가 좀 있으신 것 같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자.”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데, 어르신이라 애써 참는다 내가.”
평소와는 달리 차원문 내부에 반려몬은 단 한 마리도 없다.
결혼식 장소가 동물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쓴소리도 좀 적었겠지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선 노신사의 모습이 마냥 좋아 보일 리는 없었다.
“쯧, 재혁이 녀석이 반려몬을 데려와도 된다고 해서 데려왔건만.”
푸념하듯 말을 읊조린 노신가가 살짝 비틀거렸다.
이젠 나이가 나이인지라 지팡이를 짚고 있어도 가끔은 균형이 무너질 때가 있었다.
“의사 양반 말대로 내가 진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모양이지. 그래도 내가 왕년엔 잘나가는 헌터였는데.”
세월이 야속하다.
후배들을 양성하며 함께 전장을 누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아끼던 후배의 자식까지 결혼을 한다고 하니, 흘러간 시간들이 더욱 체감이 된다.
영원토록 강인할 것만 같던 마음과 단단한 육체도 이렇게 시들어 버리기까지 했으니…….
“……음?”
노신사가 힘겹게 균형을 다시 잡은 그때였다.
조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눈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 녀석 참 예쁘게도 생겼구나. 넌 누구니?”
“오늘 결혼식장 안내를 맡은 안내원이랍니다! 혹시 할아버지 혼자 오신 거면, 제가 도와드리까요?”
“껄껄껄! 얼굴도 예쁜 아이가 마음씨도 참 곱구나.”
“헤헤헤. 저희 할아버지가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했해꺼든요.”
“어려운 사람? 내가? 껄껄껄!”
노신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이젠 혼자서 걷는 것조차도 삐꺽거리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재혁이 녀석이 사람 보내 준다고 할 때 그냥 알았다고 할 것을. 괜히 자존심을 부려 가지고선.’
노신사에게도 체면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후배와 그 아들에게 이렇게나 무너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었다.
“이거 제가 들어 드리께요!”
여자아이가 노신사의 켄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신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단다. 켄넬 안에 있는 아이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 성격은 온순한 종이지만, 이 아이가 유독 특별해서 그런지 사람에게 쉽게 곁을 내주질 않아.”
“저희 집에도 반려몬들 완전 많거든요! 근데 우리 애들은 저를 엄청 잘 따라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흐음. 켄넬에 손만 대려고 해도 난리를 칠 텐……?”
노신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여자아이가 켄넬에 손을 가져가자, 안쪽에 있던 녀석이 대뜸 아이의 손가락을 핥는 것이 아닌가.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신사에게 아주 놀랄 만한 일이었다.
‘허어? 요 녀석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인데?’
“혹시 한번 안아 보겠느냐?”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신사가 켄넬 문을 열었다.
켄넬 안쪽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와 아이의 품속에 냅다 안겼다.
“꺄아! 얘 완전 귀엽다! 할아버지 얘가 절 좋아하는 거 같아요!”
“허…….”
노신사는 잠시 동안 놀란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영감. 고양이는 영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특별한 아이인 만큼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먼저 세상을 떠난 할멈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작디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던 노신사의 눈빛에 살짝 이채가 발했다.
“영물을 이리도 쉽게 다루다니. 범상치 않은 아이로구나.”
“영물이요?”
“네가 아주 많이 비범하다는 뜻이다. 혹시 괜찮다면, 네 이름을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수린이요, 전수린!”
노신사가 수린이의 이름을 곱씹었다.
착한 마음씨만큼이나 이름도 참 예쁜 아이였다.
- 곧 신랑 수재혁 군과 신부 김효정 양의 예식이 거행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들께서는 식장 안으로 입장하셔서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후.
사회를 맡은 팔라딘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울려 퍼졌다.
* * *
엑시스 호텔에서의 예식을 기대했던 하객들은 결혼식 장소가 호텔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사실에 다소 실망한 기색들이었다.
하지만.
예식이 시작되고 진짜 결혼식장의 모습을 보게 된 그들은 떡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 수가 없었다.
“여, 역시 엑시스는 엑시스구만! 결혼식 한 번을 하더라도 클라스가 달라, 클라스가!”
“아까는 엑시스 호텔을 두고 다른 데서 결혼식을 한다면서 투덜거렸잖아?”
“아니, 그건 지금 이 광경을 보기 전에 그랬던 거고!”
엑시스 호텔도 대단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결혼식 장소를 마주한 하객들은 연달아 감탄을 자아냈다.
화이트 캐슬.
오직 수재혁만이 만들 수 있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얼음 성에서의 결혼식은 전 세계에서도 최초일 터.
“근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
“결혼식을 보려면 얼음 성 안쪽까지 가야 하는데,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성 주변만 얼어붙어 있으니…….”
호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얼음 성이다.
주변은 아직 물인지라 수영을 하지 않는 한 그곳까지 닿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이 또한 퍼포먼스를 위한 수재혁의 계획이었다.
촤르르륵!
얼음 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길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얼음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길이 호수 밖에서 얼음 성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주었다.
“예식 직전이라, 형님께서 엄청 떨고 계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하신 모양이네?”
“응? 무슨 소리야?”
“이 얼음 다리 말이야. 다리 위에 눈이 살짝 쌓여 있잖아.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둔 거겠지. 거기에 녹아서 물이 튀면 신발이 망가질 수 있으니까, 그거까지 감안해서 계속 마력을 사용해 물기마저 제거하고 있어.”
“……큰오빠가 여기까지 설계했다고?”
“형님께서 그러셨잖아. A급 때는 모르겠지만, S급이 된 지금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대단하네. 우리 오빠는 결혼식 때 바들바들 떨기 바빴는데, 큰오빠는 긴장도 안 되나 봐?”
“내가 언제 바들바들 떨었다고!”
준우와 선화도 티격태격하며 다리 위를 걸었다.
어느새 식장 내에 하객들이 가득 찼다.
“춥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나도 안 춥네?”
선화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선화와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사방이 얼음으로 이뤄진 장소다 보니, 당연히 추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저 사람들 때문이겠지.”
준우가 예식 무대가 될 곳의 우측 끝을 가리킨다.
그곳에 신성회 문양이 박힌 옷을 입고 있는 스무 명가량의 인원들이 보였다.
“성가대?”
“보통 성가대가 아니지. 신성회 기사단 소속 성가대야. 자그마치 신성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
“그걸로 추위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야?”
“그렇지.”
“엄청 고급 인력이네?”
“그것도 맞지.”
“지금 그 고급 인력이 오늘 여기서 우리 민혁이 축가에 코러스 넣는 거고?”
“……그건 좀 묘하긴 하네.”
준우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절대 안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사회자 자리에 서 있는 팔라딘을 보고 있자니 괜히 웃음이 났다.
‘작은형님께서 성가대에 도움을 요청하셨다지? 팔라딘이 사회 보고 기사단 성가대가 축가 코러스라. 진짜 역대급 결혼식이긴 하네.’
사회자인 팔라딘의 밝고 경쾌한 개화사를 시작으로, 양가 어머님들의 화촉 점화가 진행됐다.
황장미는 전혀 떨지 않았다.
선화가 결혼할 때 한번 해봤다고, 나름 베테랑의 면모를 보이고 있달까.
“그런데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아빠가 더 긴장한 것 같지?”
“장인어른 우리 결혼식 때도 엄청 긴장하지 않으셨어?”
“우리 아빠 어마어마하게 긴장했지! 신부 입장할 때 아빠 발 꼬여서 나도 넘어질 뻔했잖아. 그때 뭐랬더라? 아빠가 리드하겠다고 잘만 따라오라더니.”
“그래도 오늘은 신랑 측이신지라, 그때처럼 발 꼬이실 일은 없겠네.”
준우와 선화가 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드디어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한 명이 입장할 때가 되었다.
“으으, 저거 엄청 떨리는데.”
지난날을 떠올린 준우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준우는 입장하면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스텝이 꼬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선화는 식장 밖에서 입장을 대기 중이었던지라 보지 못했겠지만, 만약 그걸 봤다면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떨고 있을 신랑 수재혁 군이 모든 준비를 다 마친 것 같습니다.”
팔라딘의 목소리에 장내의 시선들이 뒤쪽으로 옮겨졌다.
“하객 여러분께서도 함성과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입장곡이 장내에 흐르기 시작한다.
“신랑 입장!”
닫혀 있던 얼음 성의 거대한 문이 열린다.
그 안에서 새하얀 공간과 전혀 상반되는 검은색 수트를 입은 수재혁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오! 큰오빠 하나도 안 떠네?”
“역시 얼음 왕자는 얼음 왕자야. 감정에 미동도 없는 것 같아.”
버진로드의 좌우.
그곳에는 루이스와 홀리 나이트의 헌터들이 검을 뽑아 든 채로 도열해 있었다.
딱 한 번이기는 해도 수재혁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루이스가 전우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서 직접 요청을 해 왔더랬지.
“하객 여러분. 다시 한번 뒤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팔라딘의 멘트가 이어짐과 동시에 신랑 입장 때보다 더 큰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부 입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늘의 신부.
김효정이 얼음 왕국의 공주와도 같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수재혁에게로 걸어간다.
결혼식장이 얼음 성이라서 그랬을까.
식장의 모든 것이 수재혁의 결혼식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얼음 왕자가 실존한다면 이런 결혼식을 했을 것만 같은…….
“……나도 또 결혼식 하고 싶다.”
선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진짜 영화 같지 않아? 리마인드 웨딩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결혼식 보고 있으니까 또 하고 싶네.”
“결혼식 또 한 번 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결혼식 만들어 줄게, 선화야.”
“정말로?”
“근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들이 너무 영화처럼 아름다워서, 영화 같은 결혼식이 과연 크게 와닿을지는 잘 모르겠네.”
“오빠.”
“응?”
“로맨스 영화 좀 그만 봐. 점점 느끼해지는 것 같어.”
“……응.”
“아무튼. 결혼식을 또 하는 건 좀 그렇고, 가볍게 웨딩 촬영이나 한 번 더 할까?”
“컨셉은? 우리도 왕자와 공주처럼?”
“아니. 비슷한 거 결혼할 때 했으니까, 이번엔 행복한 가족 컨셉으로.”
“좋지. 행복한 가족. 내가 딱 꿈꾸던 거야.”
신랑 신부의 행진을 알리는 멘트와 음악이 퍼진다.
버진로드 위를 나란히 걷는 신랑 신부의 미소와 함께, 어느덧 끝나가는 결혼식이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빛내 주고 있었다.
준우 또한 두 사람을 축복했다.
옆에 있는 선화의 손을 여전히 맞잡은 채로.
‘함께 있으므로 행복하기를.’
* * *
하객들의 결혼식 후기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는 것.
신랑 신부의 행진이 진행되면서 동혁이가 하늘에 쏘아 올린 폭죽과도 같은 불꽃들로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결혼식의 아름다움엔 어느 하나 흠잡을 게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후기는 수재혁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A급에서 S급의 경지에 오른 수재혁이 가진 능력이 이번 결혼식을 통해 만천하에 퍼지게 됐다.
결혼식장에 초대받은 몇몇 기자들이 S급 헌터의 탄생을 세계에 알림과 함께 엑시스의 명예를 드높이게 된 것이다.
전장에서 전투를 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얼음 성을 비롯해 수재혁이 보여 준 모든 기술들은 세계의 모든 헌터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재혁이 이 녀석, 엑시스를 이끌 만한 능력을 가진 사내로 성장을 했구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고서도 엑시스의 이름을 알리는 계획까지 세웠으렷다?”
내 아들놈이지만 정말 잘 났다.
수태광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장이 엑시스 호텔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였지만, 그 모든 불만은 결혼식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모두 종식됐다.
하객들도 좋아하고.
엑시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던가.
“흐음. 이제 남은 문제가 있다면, 음식들이 맛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러나 모든 걱정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이곳은 야외 식장이고 엑시스 호텔의 셰프들마저도 없는 상황이다.
자그마치 엑시스의 장남이 결혼하는 자리에 하객들을 대접할 음식이 맛이 없었다는 오점은 절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완벽한 결혼식이지 않았던가.
순백의 결혼식, 거기에 작은 점 하나라도 찍히면 크게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이었다.
“맛이 좋구만. 아주 훌륭해.”
음식을 맛본 노신사가 기분 좋은 시식평을 했다.
그가 누군가. 수태광의 선배이자, 막 각성했을 무렵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을 수 있게 이끌어준 스승인 사람이었다.
“스승님의 입에 맛으시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맛이 없을 리가 없다.
칸나가 자신의 맛집 라인을 가동해 각국의 유명 주방장들을 초빙해 왔으니까.
“난 음식 맛은 의심치 않았네. 여기 와서 재혁이 녀석 능력을 보니까 뭐든 알아서 잘 해낼 것 같았거든. 태광이 자넨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스승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걱정이 많은 만큼 많은 문제들을 빠르게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그랬나?”
“제가 젊었을 적에 지겹도록 그리 말씀하셨죠.”
“껄껄껄! 내가 그랬단 말이지? 한데, 말일세. 내가 나이가 들어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니, 앞서 걱정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건 또 아닌 것 같으이.”
“무슨 뜻이십니까?”
“세월은 막지 못한다는 뜻이야, 세월은.”
노신사는 있는 힘껏 마력을 짜내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애제자였던 수태광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기에.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 역시 자식들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월의 흐름을 통감하고 있으니까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수태광은 아까 전부터 노신사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불안정해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태광이 자네. 아직 장가보낼 아들들이 셋이나 남았다지?”
“실상은 둘입니다. 한 놈은 아까 보셨다시피 신성회에 몸담은 녀석인지라…….”
“그래도 둘이나 남았어, 둘이나. 막내 녀석이 아직 한참 어린 것 같던데, 그 녀석 장가가는 모습까지 보려면…… 껄껄! 자네가 걱정이 많은 게 꼭 나 때문만은 아닌 것 같네!”
수태광이 호탕하게 웃는 스승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람을 보냈음에도 굳이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이유, 그리고는 이곳에서 자신을 만나 여느 때와는 달리 가벼운 농담까지 하는 이유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오늘 내가 기분이 아주 좋구만 그래.”
“꼭 어디 멀리 가시려는 분 같습니다.”
“마침 긴 여행을 떠나려고 했거든. 예매해 둔 기차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말이야.”
“스, 스승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난들 가고 싶어서 가나? 아까 말했잖나. 세월은 막을 수 없다고. 사는 게 다 그런 게지. 시간이 흐르면 다 그리운 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야.”
“하,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면, 자식 놈 같은 저 녀석이었네. 반려몬 보호시설에 맡기자니 뉴스에서도 가끔 그런 곳에서 반려몬을 학대하거나 하는 일들이 있어서 영 불안했는데…….”
노신사가 저 멀리를 응시했다.
그곳에 수린이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다행히 좋은 곳을 찾아간 것 같아, 내 맘이 놓이네.”
노신사의 시선이 고양이에게서 수린이에게로 옮겨졌다.
생기를 잃은 그의 눈빛에 잠시나마 이채가 발했다.
“저 아이. 자네 손주라고 했지?”
“예, 스승님.”
“재혁이 다음엔 저 아이가 엑시스의 주인이 되겠구만.”
“아마 그렇겠지요.”
수태광의 시선도 수린이를 향했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수린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더니, 이내 자신을 품에 안아 줄 그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아빠아아!”
“응?”
“우리 고양이 키워도 돼?”
“갑자기 웬 고양이?”
“어떤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을 가야 된다고 나한테 맡아 줄 수 있냐고 그래꺼든! 대답해 드리기 전에 아빠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아서!”
수린이가 품속에 있던 고양이를 슬그머니 꺼내 보였다.
고양이를 마주한 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해, 해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