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가(家)네 남자들 (1)
- 확정기에 드셨네요. 이제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화는 퇴원 준비를 시작했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확정기라는 말에 선화의 얼굴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간절히 원했던 아이였고, 과거의 아픔마저 이제는 완전히 치유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보기 좋네. 역시 선화는 웃는 게 제일 예뻐.’
준우는 퇴원 준비를 도우면서 선화의 얼굴을 힐끗힐끗 살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이 과연 얼마 전까지 어두운 표정의 선화가 맞는지 싶을 정도다.
‘다 수린이 덕분이겠지.’
병실 한편에 놓인 페스티아 나무를 챙겼다.
팔라딘의 말에 의하면 100년에 꽃 한 송이를 피울까, 말까 하는 희귀한 나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곧 꽃이 피어날 봉오리들이 잔뜩 맺혀 있었다.
나무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정제된 이 마력은 필히 수린이의 것이었다.
절대적 존재인 드래곤이라면 나무에 꽃을 피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수린이의 순수하고 마음이었다.
엄마와 동생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그 예쁜 마음이 준우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번지게 만들었다.
“집에 가자, 오빠!”
선화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좋아?”
“한동안 병원에만 누워 있느라 얼마나 답답했는데! 여기 누워 있을 바엔 차라리 출근해서 일하는 게 훨씬 낫다!”
선화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병실 침대에 누워 습관처럼 흘리던 식은땀도, 잠을 잘 때마다 그늘이 지던 얼굴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텐션 업.
입원할 때와 퇴원할 때의 선화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빠.”
“응?”
“나 배고파.”
퇴원 수속을 마치자마자 선화가 문득 말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점심을 먹긴 했는데…….
“내가 배고픈 게 아니라, 우리 분홍이가 배가 고프대.”
분홍이는 아이의 태명이었다.
페스티아의 꽃 색깔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뭐가 그렇게 먹고 싶대?”
“라멘!”
“그거면 돼?”
“샤오롱바오!”
“중국과 일본의 음식이라. 그걸 한 번에 다 파는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찾아내야지.
선화와 분홍이가 먹고 싶다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내가 지구를 싹 다 뒤질 각오로 찾아줄 테니까, 뭐든 말만 해 봐.”
“음…….”
고민하던 선화가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배를 잠시 바라보던 선화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진다.
“오빠. 근데 있잖아. 나 이렇게 막 먹어도 되는 걸까? 먹고 싶은 거 죄다 먹으면 살이 찔 텐데? 출산하고 살 빼는 게 힘들다고도 하고.”
“아직 배는 하나도 안 나왔는데 벌써부터 무슨 그런 걱정을 해?”
“지금도 좀 찐 것 같은데?”
“흐음. 이리 와 봐.”
준우가 선화를 덥석 품에 안았다.
남편의 품에 쏙 들어간 선화가 배시시 웃는다. 갑작스런 포옹이었지만, 가끔은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설레기 마련이다.
“똑같은데?”
“응?”
“살 하나도 안 쪘다고. 예전에도 선화 너 안았을 때, 딱 이 느낌이었거든.”
“에이! 뭐야! 그건 너무 오빠 주관적인 생각인 거잖아!”
“내 감각이 얼마나 정확한데? 아무튼, 선화 너 살 안 쪘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지금은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어도 돼. 만약 살이 좀 찌면 어때? 그것도 나름대로 귀여울 것 같구만. 그리고, 선화 네 미모가 고작 살로 가려지는 건 줄 알아?”
“살쪄서 오빠가 지금처럼 나 이렇게 못 안을 수도 있는데?”
“까짓거 내가 몸을 키우면 되는 거고.”
우쭐대는 준우의 모습에 선화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살 좀 찌면 어때!
내 미모는 살 따위에 가려지지 않는데?
“그나저나, 라멘하고 샤오롱바오 둘 다 파는 곳은 찾기 힘들 것 같고. 뭐가 더 먹고 싶어?”
“라멘! 라멘!”
“이왕 먹는 거 진짜 맛있는 집이 좋겠지?”
“당연하지! 잘 아는 식당이라도 있어?”
“있지. 저번에 칸나가 소개해 준 집으로 가자.”
“거, 거기, 일본에 있는 거 아냐?”
“맞아. 일본 갈 거야.”
“뭐어? 라멘 하나 먹으러 일본을 간다고?”
“응! 일본 가서 라멘 먹고 중국으로 넘어가서 샤오롱바오 먹을 거야.”
“……이동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는데? 비행기 표도 사야 하고, 대기 시간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전용기 빌리면 돼.”
준우는 곧장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뿐인 딸과 배 속의 손주가 밥 먹으러 일본과 중국을 간다면, 기꺼이 전용기를 내어 주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 그래, 전 서방! 선화 퇴원 수속은 잘 마쳤고?
“예, 장인어른. 무사히 퇴원하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만,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
- 아아! 내가 보낸 문자 보고 전화한 건가?
“……무슨 문자요?”
* * *
온 신경을 선화에게 쏟느라 준우는 한동안 핸드폰을 멀리했다.
무음이었던 핸드폰에는 광고 스팸 문자를 비롯한 다수의 문자들이 쌓여 있었고, 그 틈엔 수태광이 보낸 문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 수 가(家)네 남자들 전원 집합.
문자에 친히 한자까지 붙여 넣은 걸 보면 분명히 아주 중요한 일일 터.
며칠 뒤.
수 가네 남자들이 수태광의 집무실에 모였다.
“매제는? 매제가 안 보이네?”
“매형은 수 씨가 아니니까.”
“그래도 서운하게 매제만 빼고 모이는 건 좀…….”
수태광이 자식들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이 녀석들아. 전 서방의 성이 수 씨가 아니더라도, 명색이 우리 집에 하나뿐인 사위인데! 내가 그런 어여쁜 사위를 빼고 불렀겠느냐?”
“근데 왜 매제는 이 자리에 없습니까?”
“선화랑 일본 간다기에 전용기를 내주었다.”
“갑자기 일본을요?”
“선화가 라멘이 먹고 싶다더구나. 사람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야지.”
“……뭔 라멘 하나 먹으러 가는 데 전용기까지?”
수재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수태광의 말에 곧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선화가 임신을 했다.”
짧고 담백한 한마디.
그간 선화의 임신 소식을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수태광이었지만, 선화가 확정기에 들 때까지 여태 참았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참지 않아도 된다.
유산 위험은 사라졌으니, 집안의 큰 경사를 널리 퍼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서, 선화가 임신을요?”
기분 좋은 소식에 마냥 얼굴이 좋은 형제들이었지만, 유독 아버지를 많이 겪어온 수재혁은 필히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선화의 임신 소식을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지금 집에 계신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쯤 잔뜩 흥분하셔서 파티를 벌이고도 남았어야…….’
수태광이 누구인가.
수린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온갖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피웠던 사람이다. 절대 선화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작전은 뭡니까?”
“작전? 무슨 작전?”
“곧 손주를 보실 테니, 손주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저희를 이렇게 부르신 거 아닙니까?”
“뭔가를 하려고 한다기보단…….”
“얼마 전에 스페인에서 만든 쪽쪽이가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미 한국에선 품절이구요.”
“그런데?”
“그 쪽쪽이를 스페인에 가서 공수해 오는 작전이라면…….”
“이놈아! 내가 고작 쪽쪽이 하나 사러 스페인까지 가라고 하겠느냐?”
“……아버지시라면 그러시고도 남죠.”
“맞아! 아빠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저번에 수린이가 스핑크스 보고 싶다고 이집트에 가자니까, 차라리 한국에 스핑크스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어!”
“도, 동혁이 너까지! 그건 농담이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수린이가 제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를 땐 가수의 기질이 있다면서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려고 하셨죠.”
“그, 그건 민혁이 네 미래까지 생각해서…….”
“아무튼. 오늘 여기에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저희는 다 이해하니까, 속 시원하게 얘기해보십쇼.”
“거참. 도대체 이 애비를 뭘로 보고. 누가 보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녀석에 호들갑이나 떨어 대는 노인네로 생각하겠구나.”
“…….”
“…….”
“…….”
세 아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나도 똑같다.
집안의 큰 경사인 선화의 임신 소식이 알려진 순간부터 다들 어느 정도 각오를 했기 때문이었다.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내 오늘 너희들을 이리 부른 것은 선화가 출산을 할 때까지 옆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다.”
“부탁이라면?”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다만, 홀몸이 아니니 형제들인 너희가 이전보단 더 각별히! 아주 각별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전부입니까? 뭔가 따로 작전을 지시한다거나 그런 건 없으신 거구요?”
“선화의 임신은 우리 집안의 아주 큰 경사다.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여 보다 진지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너희도 이제 다 컸는데, 내가 이렇게 말만 해도 대충 알아듣지 않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아버지께선 이제 뭘 하시려구요?”
“뭘 하다니? 당연히 선화가 무사히 출산을 할 수 있게 간절히 기도를 해야겠지.”
“그건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사람 불안하게 왜 이러십니까, 대체?”
“차라리 누나 따라서 일본을 가지 그랬어, 아빠? 지금이라도 가서 같이 라멘 먹고 와!”
“저번에 제 팬미팅 때처럼 제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 아, 아니, 손주 얼굴 그려진 티셔츠라도 입고 계시면 오히려 좀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아? 아직 손주 얼굴을 모르지?”
“허어! 이 녀석들이 대체 왜 이래? 나도 진중할 때는 진중한 몸이야! 이 나이쯤 됐으면 손주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을, 나이 먹고서 호들갑 떨면 사람들 눈에 좋게 보이겠느냐? 사람이 때를 가려야지, 때를!”
불안하다.
얌전할 사람이 얌전해야지, 얌전하지 않을 사람이 얌전한다고 하니 더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정혁이 녀석도 며칠 내로 한국 대회당으로 발령 난다고 하니, 그때 재혁이 네가 잘 말을 해 주거라. 오다가다 선화를 좀 살피고 그러라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명심해라. 선화한테 ‘각별히’ 신경 쓰라고 했다.”
“예, 각별히…….”
그 말이 꼭 너희가 똑바로 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경고처럼 들려오는 것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세 형제가 다 같이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집무실을 나서던 동혁이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수태광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수 씨 집안 남자들에겐 호들갑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그 피는 아마 수태광에게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수태광이 이렇게나 평온해 보인다니.
‘이상하다, 이상해. 아빠가 너어어무 이상해!’
폭풍전야.
수태광의 그 평온함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각별히 신경 쓰라고 했지?’
그래도 뭐.
아빠가 나서기 전에 내가 잘하면 별일 없겠지.
* * *
선화가 입원해 있는 동안 김 관장이 동물원 업무를 대리해 주었지만, 오늘부턴 다시 출근을 해야 했다.
며칠간 일본과 중국을 다녀오며 더없이 좋은 나날을 보내긴 했으니, 이젠 동물원장으로서 본업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괜찮겠지?”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임산부들도 다 일하면서들 살어. 의사 선생님도 일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셨잖아.”
“그, 그래도, 좀 불안해서…….”
“아휴! 유난 좀 떨지 말라니깐!”
“……같이 출근할까?”
“괜히 나 따라와서 옆에서 불안불안하고 있으려고? 오빠 정식 입사 날짜는 다음 달이야. 그때까지 그냥 놀아.”
“같이 가고 싶은데…….”
“그게 더 신경 쓰인다니까. 걱정 말고 집에 있어. 이따 퇴근할 때 연락할게!”
“무사히 출근 마치면 문자해!”
“알았어, 알았어! 무슨 물가에 애 내놓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너무나도 밝은 선화였다.
임신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임산부를 챙겨 준다더니, 이런 게 딱 그거였나 보다.
사실, 준우야 평소에도 워낙에 선화에게 잘해주었으니 큰 변화랄 것까지는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유별나진 느낌이랄까.
‘너무 좋다. 이런 소중한 삶…….’
선화는 항상 이런 삶을 꿈꿨다.
엑시스라는 재벌가에서 사는 삶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아이를 낳고, 소박한 추억들이 모여 소박한 것들마저도 특별함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비록 유산을 경험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지금의 삶을 위한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빠랑 나. 그리고 수린이랑 분홍이. 앞으로도 이렇게 아이들이랑 오순도순 소박한 행복을 모아가면서 사는 거야.’
소박함도 모이고 모이면 커다란 행복이 되기 마련.
선화는 오직 그것이 가족들의 행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랐다.
‘소박한 것들을 하나, 하나 더해 가면서…… 응?’
동물원 입구를 지나 막 사무실에 도착한 그때였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목에 못 보던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서, 설마 저거 검색대야?’
공항에서나 볼 법한 검색대.
직원들이 그걸 통과한 후 사무실로 향하고 있질 않은가.
“누, 누가 이런 걸 설치해 놓은 거야?”
검색대 옆에는 발열 체크하는 장비가 놓여 있었다.
모든 장비가 최고급이며, 딱 봐도 오늘 아침에 설치한 새것들이었다.
“아! 원장님 오셨어요?”
“저, 저 기계들 다 누가 설치한 거예요?”
“오늘 본사에서 지침이 있었다네요. 새벽부터 사람들이 와서 설치하고 갔다고 하더라구요.”
“엑시스 본사에서요? 왜요?”
“정확한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부마스터님 특별 지시라던데요?”
선화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마 자신의 임신 사실 때문인 것 같은데, 이 일을 벌인 이가 수태광이 아닌 수재혁이라는 것이 상당히 놀라워서다.
‘평소에 아빠가 벌이던 일을 큰오빠가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