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화.고마워요, 언니 (232/246)

◈ 고마워요, 언니

크워어어어어!

붉은 눈의 거인이 울부짖는다.

놈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하던 김강수가 흘낏 뒤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쫄기는.’

자신의 뒤를 따르다가 움찔거리는 팀원들이 보였다.

눈앞에 강력한 몬스터가 포효를 하고 있으니 움츠러드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랄까.

‘준우가 선두에 섰을 땐, 저런 모습들이 아니었지.’

다르다.

준우가 앞에 섰을 때와 자신이 앞에 섰을 때가.

이내 침착하게 따라붙는 팀원들이었지만, 김강수는 미약하게나마 팀원들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팀원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 대단한 아이작이라는 놈과 대적했을 때도 자신만만하게 검을 휘둘렀던 준우의 부재를 본인이 온전히 채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못 할 테니까.

하지만, 김강수는 묵묵히 나아갔다.

쿵! 쿵! 쿵! 쿵!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더욱 세게 지면을 밟았다.

마력이 실린 발에 지면이 깊게 파여 들어가며 진동을 울렸고, 팀원들이 그의 자취를 따라 내달렸다.

‘다들 준우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겠지…….’

모든 것은 습관이 된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 또한 마찬가지.

준우가 모든 일을 혼자서 도맡았다는 것이 아니다.

팀원들 역시 그에게 보탬이 되며 많은 것을 거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기댔던 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의지할 곳을 잃은 팀원들에게 충분히 동요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흔쾌히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불가능마저도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

팀원들에게 준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녀석들이 흔들린다는 건, 내가 준우보다 못 미덥기 때문일 테고.’

그리고 김강수에게 준우는 그가 쫓아야 할 사람이자.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 같은 존재였다.

팀원들이 자신에게 등을 맡길 수 있게끔.

그들이 자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끔 말이다.

‘그래, 의지하는 것도 습관이지.’

의지할 사람이 없어도 잘 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꼭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이제 그 습관이 내가 되어야만 한다.’

김강수가 이를 악물었다.

거인의 머리 높이까지 뛰어오른 그의 손에서 짙은 푸른빛 마력이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왔다.

까아아아앙!

거대한 주먹의 형상을 이뤄낸 마격이 거인의 정수리를 강타했으나, 아쉽게도 들려오는 것은 태현호와 다른 기동대원들이 공격했을 때와 같은 허무한 소리뿐이었다.

크워어어어어!

거인이 괴기한 목소리를 토해 내며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탄 김강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벌레 쫓듯 움직이는 커다란 손을 피한 김강수가 반대편 어깨 위로 폴짝 뛰었다.

‘내 마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격이 강타한 순간 놈이 잠시나마 비틀거리는 게 보였으니.

‘준우라면…….’

과연 어찌했을까.

이대로 포기했을까.

아니겠지.

여태 놈이 뭔가를 포기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녀석이었다면, 이렇게 했겠지!’

김강수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리고는 체내의 마력을 다시금 오른손에 집중시켜 마격을 형상화했다.

조금 전 일격을 가할 때보다 거대해진 그의 주먹이 거인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까아아아앙!

들려오는 소리는 비슷하나, 놈이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는 폭이 커졌고 고개를 털어 내는 모습까지 보인다.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내려친다!’

준우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러니 나도 할 수 있다.

까앙! 까앙! 까앙…….

연달아 울려 퍼지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팀원들이 악에 받친 김강수의 모습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았다.

거인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주먹으로는 멈추지 않고 놈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다.

“보, 본부장님…….”

이정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강수와 자신들이 준우 없이 눈앞의 놈을 처리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조금이나마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당장 염력으로 놈의 움직임을 막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 아니던가.

거인의 하체를 공략하고 있던 다른 팀원들 역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상하게 놈을 무조건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놈의 하반신은 기동대에게 맡긴다! 특수 본부 인원들은 본부장님을 지원하도록!”

염력의 힘을 빌어 팀원들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높이가 높인지라 김강수가 있는 곳까지 닿는 것이 어렵긴 하겠으나, 마냥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었다.

후우우웅!

추재진과 공현철이 마력을 방출시켜 허공에 떠오른 이선호와 고진희를 더 높이 띄워 올린다.

고진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선호의 어깨를 발판 삼아 또다시 도약했다.

‘오, 올라왔다!’

김강수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른 고진희의 시야에 거인의 정수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찌른다!’

준우의 가장 특성으로 인해 성장한 것은 김강수뿐이 아니었다.

물론 김강수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른 팀원들과 고진희 역시 미약하게나마 마격을 형상화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촤아아악!

기다란 쇠꼬챙이 형상의 마격이 만들어진다.

고진희가 이를 악물며 거인의 정수리를 향해 마격을 쏘아 보냈다.

‘머, 먹힐까?’

준우였다면 일격에 거인의 목을 날려 버렸겠지.

고진희는 날아가는 자신의 마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과연, 그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까드드드득!

김강수의 연타에 벌어진 작은 틈으로 고진희의 마격이 내리꽂혔다.

쿠워어어어억!

울부짖는 놈의 정수리에 생긴 틈이 더 벌어진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김강수가 벌어진 틈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놈을 쓰러뜨리기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부족하면 될 때까지 내리치면 되는 것.

“시팔! 안 될 게 뭐가 있어! 하면 다 되는 거지이이!”

쾅! 쾅! 쾅! 쾅…….

미친 사람처럼 주먹을 연타하는 김강수.

얼마나 힘을 줬는지,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 제가 팀원들 걱정돼서 은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머릿속에 준우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새끼, 건방 떨기는…….

‘……잘 봐라! 너 없어도 우린 잘 해낼 테니까.’

고맙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괜히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하면 추잡스럽게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아, 에둘러 다른 말로 준비한 김강수의 작별 인사였다.

그러니.

우린 걱정 말고 여행이나 잘 다녀와라, 이 자식아!

콰아아아앙!

쉬지 않고 공격을 가한 김강수의 반쯤 찢어진 주먹이 거인의 정수리에 깊이 박혀 들어갔다.

동시에 주변으로 튀어 오르는 핏물 때문인지, 마치 그 모습이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 * *

저 멀리.

은신 상태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암행 평가단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하나둘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 기, 김강수가 태현호를 패는데?

- 뭣? 누가 누굴 패?

- 태, 태현호가 기, 기절했어!

- 태현호가 기절하면? 거인은 누가 잡아?

- 그, 그…… 김강수가 거인도 패는데?

다시금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봐도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김강수가 작전 지휘관을 팬 건 둘째 치고, 그가 위풍당당하게 거인을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으니까.

쿠우우우웅!

이윽고 붉은 눈의 거인이 쓰러졌을 때.

암행 평가단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 거인을 잡았어? 김강수가?”

전준우가 멱살 잡고 캐리한다는 말이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이 그의 덕을 본 김강수와 팀원들이었다.

사실상, 최근 승진 시험 기록만 보더라도 태현호보다 능력이 떨어지던 김강수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김강수가 태현호를 때려눕히고, 난이도가 격상된 보스급 몬스터까지 처리했다. 이 어찌 놀랍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허허…… 이 정도면 특수 본부 팀원들이 그저 전준우 헌터의 덕만 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고말고. 마냥 거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어. 전준우 헌터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없더라도 이 정도 실력들이면 협회 내 엘리트 수준이 아닌가?”

“대단하구만. 김강수가 언제 저렇게 성장을…….”

인식이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비록 준우가 많은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나, 오늘 김강수가 보여 준 모습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의 오해를 어느 정도 잠재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보고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기동대도 버벅이던 거인을 김강수와 그 팀원들이 처리했다고 보고를 해야지.”

“아, 아니, 그거 말고. 태현호 말일세. 김강수가 태현호를 때려눕히지 않았는가?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야.”

“흐음. 지휘관을 팼으니 하극상이긴 한데…….”

순간, 조금 전 미쳐 날뛰던 김강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본 것이었어도 그 광기가 여기까지 미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마치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만 같던 그 주먹질.

태현호마저 일격에 기절시켜 버리고,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거인에게 무차별 주먹 폭격을 가했던 그 모습이 문득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꿀꺽-

얼마나 그 모습이 괴이했으면, 암행 평가단이 동시에 마른침을 삼키겠는가.

자신들이 알던 김강수가 아니다.

어느덧 김강수는 자신들마저도 일격에 저승으로 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헌터가 되어 있었다.

“사,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으니 하극상 건은 보고를 해야 할 듯싶네.”

“끄응. 자네 혹시 김강수가 습관처럼 말하고 다니는 좌우명이 뭔지 아는가?”

“뭔데?”

“받은 대로 돌려준다. 은혜를 입으면 무조건 은혜를 갚는다.”

“좋은 뜻이잖아? 한데, 왜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건가?”

“그게 만약 복수가 된다면 어찌 될 거라고 생각해?”

“…….”

“우릴 태현호처럼 두들겨 패지 않겠나?”

“에이, 설마.”

“…….”

“우리가 암행 평가단인 건 어떻게 알고?”

“그야 아까 보여 준 그 독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겠지. 기억나나? 예전에 김강수가 최 팀장도 후드러 패서 골로 보낸 거.”

“기, 기억나지…….”

“복수 대상이면 남녀노소 안 가린다는 말도 있던데.”

“그, 그래도, 노소는 가리지 않겠나?”

“아까 그 주먹질 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

“…….”

“……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헛!”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할까?”

“그, 그럴까?”

시선을 주고받던 그들의 입에서 헛웃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지금껏 김강수가 쳤던 사고들까지 떠올리니, 자신들의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마냥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잠시나마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

눈치를 보던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근데, 따지고 보면 하극상이 아니지 않나?”

“응?”

“김강수가 계급이 더 높잖아?”

“그래도 이번 작전 지휘관은 태현호였는데?”

“아무리 태현호가 선배고, 작전 지휘관이라고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명백히 김강수가 상관이지!”

“그, 그런가? 아니지, 아니지!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네!”

“그렇지? 그럼 하극상에 관한 보고는 좀 달리 전달을 해야겠군. 애당초 태현호가 전투에 가담하려는 김강수를 막아 섰으니, 오히려 그게 하극상에 더 가깝지 않나?”

“맞지. 그게 맞지. 상관이 나서겠다는데, 그걸 막아서지 않았나? 쯧쯧, 먼저 맞을 짓을 한 게지.”

이들은 인사과 소속이다.

승진에 눈이 먼 태현호가 인사과 고위직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모습을 많이 봐서였는지, 그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도 한몫한 것 같았다.

“그럼, 상황이 종료됐으니 우리도 얼른 보고를 하러 가는 게 좋겠군!”

“오늘 아주 좋은 구경을 했구만! 복귀하는 걸음이 참 가볍군, 그래.”

“이게 다 김강수가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 덕분 아니겠나? 차기 구름의 주인으로도 손색이 없었다고!”

“그렇지! 그렇지! 김강수가 아니면 누가 감히 구름을 손에 쥘 수 있겠어? 하하하하핫!”

“김강수가 이토록 대단한 사람일 줄이야! 하하핫!”

복수도 복수지만, 은혜도 꼭 갚는다고 했던가.

기왕 이렇게 된 거 구름이 김강수의 것이 되도록 팍팍 밀어줄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 * *

오늘은 부부 모임이 있는 날이다.

작전 투입으로 인해 안타깝게 은퇴식에 참여하지 못한 김강수가 미련이 남아 준비한 식사 자리였다.

물론, 그간의 회포를 회식 자리에서 풀기는 했다.

하지만 김강수는 김강수고, 김강수의 아내인 서영희가 식사 대접은 한번 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준우 덕분에 김강수가 협회 내에서 승승장구하게 됐으니, 아내 된 도리로서 작은 선물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약속 장소는 서울의 한 고급 레스토랑.

자주는 아니어도 몇 번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 두 부부였다. 남편들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가끔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달까.

언제나 부부 모임을 가질 때마다 그러했듯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특히나 김강수의 표정은 그 여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크흠!”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구름을 괜히 만지작거리는 김강수. 그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기분이 좋은 이유였다.

“여보. 식사하는데 칼을 여기 올려두면 어떡해.”

“아, 아니, 나는 이걸로 당신 스테이크나 좀 썰어 줄까 해서…….”

“몬스터 잡는 칼로 무슨 스테이크를 썰어!”

“아, 아무래도 좀 별로겠지?”

눈치를 보던 김강수가 슬쩍 구름을 뒤쪽에 숨겼다.

그리도 자랑을 하고 싶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구름의 차기 주인이 정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제 자리를 빨리 찾아간 것 같았다.

‘뭐, 태 팀장하고 본부장님이 가장 유력했으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태 팀장이 김강수의 한참 밑이다.

때문에, 당연히 김강수가 준우의 뒤를 이어 구름을 갖게 되리라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긴 했다.

‘그래도 협회장님이 꽤 고심하는 듯했는데…….’

은퇴식을 하고 고작 며칠밖에 안 지난 사이에 강재호가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계기라도 있었던 걸까.

“고맙다, 준우야. 네 덕분에 내가 이런 명검을 쥐어도 본다, 야.”

“그게 왜 제 덕분입니까. 본부장님께서 열심히 일하신 덕분인 거죠.”

“내가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네 덕분 아니겠냐? 하하하핫! 고맙습니다, 제수씨! 훌륭한 남편 저한테 보내 주셔서!”

뭐든 다 준우 덕분이란다.

검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의 김강수였다.

협회장이 이토록 빨리 결정을 내린 이유가 뭐가 중하겠는가. 김강수가 구름을 갖게 됐고 좋아하면 된 거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오늘은 실컷 먹어라! 내가 거하게 쏠 테니까! 제수씨도 많이 드십쇼!”

“저희가 살게요, 본부장님.”

“예? 제수씨가요? 왜요?”

“본부장님께서 그동안 저희 신랑 잘 보살펴 주셨잖아요. 덕분에 몸 건강히 은퇴할 수 있었구요.”

“아, 아이구! 그런 말씀 마세요, 제수씨. 오히려 준우가 저와 팀원들을 보살폈으면 보살폈지, 제가 준우를 보살피다니요.”

“남편한테 귀가 닳도록 들었거든요. 항상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챙겨 주시기 바쁘시다고.”

“그래도 오늘 식사는 저희가 대접하려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건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갔고, 어느새 부부의 앞에 놓인 테이블엔 보기 좋은 디저트가 놓였다.

“그나저나, 선화 씨. 내일모레 유럽으로 여행 가신다고 하셨죠?”

“네! 정말 오랜만에 단둘이 가는 여행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설레고 그러네요.”

“부럽다. 우리도 유럽 다녀온 지 한참 됐는데. 또 언제쯤 다녀올 수 있으려나…….”

“왜, 왜 날 그렇게 봐?”

그 순간 뜨끔하는 김강수였지만, 다행히도 아내들이 여행 관련 이야기에 집중하는 탓에 불똥이 크게 튀진 않았다.

“어느 나라부터 가요, 선화 씨?”

“영국 먼저 갔다가 프랑스로 가게 될 것 같아요.”

“오오! 영국! 우리도 유럽 여행 갔을 때 영국을 제일 처음 갔었거든요!”

“그럼, 혹시 가 볼 만한 곳 추천해 주실 수 있어요?”

“어떤 느낌으로?”

“으음. 뭔가 좀 비밀스러운 곳?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이라…….”

지난날의 영국 여행을 떠올린 서영희가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핸드폰 갤러리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빠르게 넘기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어딨더라? 아! 여기다, 여기!”

서영희가 아름다운 석양 아래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선화에게 들이밀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강수의 시선도 그 사진으로 자연스레 그 사진으로 쏠렸다.

“와, 사진 엄청 예쁘네? 어디야, 거기?”

“플라워 아일랜드. 당신이랑 같이 갔잖아.”

“……아? 그, 그랬지.”

괜히 입을 열었나.

움찔한 김강수가 화제를 전환하려 다시금 입을 열었다.

“크으! 사진 기가 막히게 잘 찍었네. 내가 찍어 준 거겠지?”

“뭔 소리야. 삼각대에 얹고 내가 찍은 건데.”

“……그, 그랬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김강수를 바라보던 서영희가 선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추천드릴 게요, 선화 씨. ‘플라워 아일랜드’라고 들어봤어요?”

“플라워 아일랜드요?”

“석양이 꽃 모양으로 진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영국의 섬이에요. 제가 예전에 남편이랑 갔었는데, 정말 너무 예뻤거든요.”

선화가 서영희가 보여 준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플라워 아일랜드에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바다 위의 던전 하나가 소멸되면서 만들어진 섬이라는데 그 모습이 사람을 홀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앞서 언급한 대로 꽃 모양으로 석양이 지는 것이 특히나 장관이다.

서영희와 김강수가 갔을 땐 외지에 속하는 곳이었고, 최근에는 섬 안에 리조트가 들어서긴 했으나 아직 그 유명세가 여타 관광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좋은데요. 신비로운 느낌이 나기도 하구요.”

“딱 그거에요. 신비로움. 영국에서도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지, 섬 입장 인원에 제한을 뒀더라구요.”

“어머! 운 나쁘면 섬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거네요?”

“배만 타면 들어갈 수는 있거든요? 아마 예약을 따로 받을 거예요. 거기 사이트가…….”

두 여자가 예약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준우와 김강수는 서로 계산을 하겠다며 저만치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서영희가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선화에게 건넸다.

“……어?”

선화가 눈앞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바라본다.

서영희가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선물 상자를 들이밀었다.

저 앞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김강수의 눈치를 살피는 걸로 보아, 남편 몰래 준비한 선물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 남편이 준우 씨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잖아요. 덕분에 저도 누리지 못할 것들을 누리고 살고 있구요. 뭐라도 보답을 해 주고 싶었어요.”

“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제가 한 일도 아니고 저희 신랑이 한 일들인데…….”

“부부는 하나라잖아요. 선화 씨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고생한 게 뭐 있다고.”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계속 거절하면 나 너무 서운할지도 몰라요.”

“제, 제가 과연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싶어서…….”

선화가 머뭇거렸다.

선물을 준우가 받는다면 모를까, 자신이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왠지 모르게 준우가 받아야 할 선물을 가로채는 것 같아 미안한 느낌마저 든다.

“진짜 괜찮으니까 받아요, 선화 씨.”

“그, 그래도…….”

“두 사람이 단둘이 여행가는 게 오랜만이라길래 준비한 선물이에요. 여행 기간이 꽤 길다고 했잖아요? 혹시나 이게 행복한 여행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름 고심해서 고른 거기도 하고.”

“행복한 여행이 되기 위한 선물이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

“……남자한테 엄청 좋은 거라던데.”

그때였다.

선화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더니.

샤샥!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선물을 낚아챈다.

보물단지 마냥 선물 상자를 품에 꽉 껴안은 선화가 서영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고마워요, 언니. 잘 쓸게요.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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